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고요함 속에서 부르는 생명의 노래 2006년 07월 0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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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함 속에서 부르는 생명의 노래 해외 근무를 위해 출국하면서 잠시 휴가 기간을 이용해 미국에 들른 교회 청년이 자기 블로그에 ‘월든 호수’를 찍은 사진을 올려놓았습니다. 여러 해 전 청년들과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월든>>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감수성이 예민한 그 청년은 언젠가 월든 호수를 꼭 방문하고 싶어 했는데 마침내 꿈을 이룬 것입니다. 호수를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겠지만 세상에 길들여지기를 거부하며 철저한 자유인으로 살았던 소로우의 숨결을 느껴보고 싶은 마음이 더 컸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사진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소로우의 의자가 떠올랐습니다. “내 집에는 세 개의 의자가 있다. 하나는 고독을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정을 위한 것이며, 세 번째 것은 사교를 위한 것이다.” 나는 마음 속 고독의 의자에 앉아 월든 호수를 가만히 내려다보는 호사를 누렸습니다. 소로우가 슬며시 다가와 하염없는 눈길로 호수를 바라보는 듯 했습니다. 적요로운 마음에 평화가 찾아들었습니다. 도시에 살면서 마음이 한가로웠던 때가 없는 것 같습니다. 도시의 건설자가 가인이라는 성경의 증언은 시사해주는 바가 많습니다. 어딘들 그렇지 않겠습니까만 도시는 특히나 경쟁의식이 지배하는 곳입니다. 마르틴 하이데거는 타락한 현대인의 특색을 ‘호기심’, ‘쓸데없는 말’, ‘평균적 일상성에의 집착’을 들었습니다. 남에게 뒤쳐질까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무능한 사람처럼 보이기 싫어 사사건건 말추렴하고, 남과 구별되기를 원하면서도 결국은 남과 같아지려 안간힘을 다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경쟁의식이 내면화되면서 마음에 불이 붙었습니다. 마음에 불이 붙었으니 가만히 있지를 못합니다. 존재가 아니라 소유와 행동을 정체성의 뿌리로 삼다보니 안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가위눌림에서 스스로 깨어나기 어렵듯이 뭔가 이건 아닌데 하면서도 그런 현실의 질곡으로부터 좀처럼 벗어나지 못합니다. “신들을 찾아 나선 여행길이 고되어서 지쳤으면서도 너는 ‘헛수고’라고 말하지 않는구나.”(사57:10) 가끔은 멈추어 서서 걸어온 자취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영혼이 왜 이리도 팍팍하게 되었는지, 작은 자극에도 왜 그리 성마르게 반응하며 사는지, 세상의 아픔에 대해 어쩜 이리도 둔감하게 되었는지 말입니다. 하비 콕스는 ‘현대인의 우상은 출세’라고 말했습니다. 출세는 돈과 인기와 권력으로 치환됨을 알기에 사람들은 출세에 집착합니다. 출세를 위해 이곳저곳 기웃거리다보니 고요함을 잃었습니다. 흐르는 물에 얼굴을 비춰 볼 수 없는 것처럼 고요함이 없는 마음에 하늘은 비치지 않게 마련입니다. 몇 해 전 영국의 브리스톨에 간 적이 있습니다. 존 웨슬리 목사의 유적을 몇 군데 둘러보고, 서점도 둘러보고, 공원도 걷다보니 조금 피곤해졌습니다. 그런데 어느 허름한 집 옆을 지나는데 문득 그 집 대문 위에 이런 문구가 눈에 뜨였습니다. “초대받든 초대받지 않든 하나님은 이곳에 계신다”. 나는 끌리듯 그 집 대문을 두들겼습니다. 앞치마를 두른 내 또래의 아주머니가 문을 열었습니다. 대문 위의 쓰여 있는 문구를 보고 문을 두드렸다고 말하자, 아주 반갑게 집안으로 맞아주었습니다. 잠시 대화를 나누다보니 그는 대학에서 영성 신학을 가르치는 교수였습니다. 대화가 토마스 머튼 신부의 영성에 대한 이야기에 이르자 우리 사이의 친밀함은 더욱 커졌습니다. 그는 차를 끓여 내오더니 집 뒤꼍에 있는 정원으로 안내해주었습니다. 그곳이 자기에게는 기도와 사색의 장소라면서 고요함을 맛보라고 말했습니다. 꽃이 만개한 정원에 앉아 나는 영문 모를 환대에 마냥 기뻐했습니다. 낯선 이에게 주어진 그 무조건적인 환대는 내 영혼 깊은 곳을 툭 건드렸습니다. 한참을 앉아 있다가 나오는데 출입구 한 켠에 걸린 칠판에 그가 남긴 인사말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침묵 기도 시간이어서 인사를 못 드립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하나님의 은총을 빕니다.” 돌아나오는 내게 여행객의 고단함과 외로움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진정한 쉼이란 마음을 내려놓는 것임을 그때 배웠습니다. 평안, 정적, 휴식을 자신에게 허락하지 않는 성급함을 인류의 중죄라고 말한 카프카의 말이 옳습니다. 우리는 자기 집을 이고 다니는 달팽이처럼 살아갑니다. 무겁지만 어쩔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지켜야 하는 자아가 우리를 지치게 만듭니다. 그런데 여기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가면서 지친 이들의 품이 되어주시마고 약속하신 분이 계십니다. 나를 속이는 내 마음의 괴로움을 숨김없이 내놓을 수 있는 분, 허망에 대한 생래적 기호를 가진 우리를 탓하지 않고 품어주는 분, 사람들을 부둥켜안을 때 그 팔이 한없이 늘어나는 분에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침묵이라는 길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문제는 소란에 길들여진 영혼이 침묵을 견디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자기와의 대면을 꺼리는 사람들은 소란함으로 도피하곤 합니다. 지금 내 앞에는 지거 쾨더(Sieger koeder) 신부의 그림 한 장이 놓여 있습니다. 붉은 망토로 온 몸을 가린 엘리야가 동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습니다. 산 너머로 벼락이 치고 있고 산에는 불길이 치솟습니다. 지진이 일어나 산이 갈라졌습니다. 오른손으로 얼굴을 가린 엘리야의 왼손 바닥 위에 나뭇잎 한 장이 조용히 내려앉았습니다. ‘세미한 음성’의 형상화일 것입니다. 엘리야의 눈코입귀는 모두 손과 망토로 가려져 있습니다. 세상을 향한 감각의 창문이 모두 닫힌 상태, 자신의 내면만을 응시하면서 그는 신의 음성을 듣습니다. 침묵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입니다. 그 침묵은 세상의 어떤 소란도 깨뜨릴 수 없이 단단합니다. 그리고 그 침묵의 소리는 그를 재창조하는 신의 숨결입니다. 예수님은 분주한 일상을 뒤로 하고 늘 한적한 곳을 찾아가 하나님 앞에 엎드리셨습니다. 아버지와의 사랑에 찬 대면, 그것이야말로 예수님의 가장 깊은 쉼이었고, 새 날의 문을 여는 행위였던 것입니다. 나는 타고르의 노래로 여름을 맞이합니다. 오늘/여름은 나의 창가에 와서 한숨지며 속삭이고 별들은 꽃이 만발한 정원에서 시를 노래합니다. 지금은/당신과 얼굴을 마주하고 앉아서 이 고요함 넘치는 휴식 속에서 생명을 찬미하는 노래를 부를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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