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야훼 라카민 2006년 06월 13일
작성자
야훼 라카민 <우주공간에서 우리의 별 지구는 다른 별 하나를 만난다. 그 별이 지구에게 묻는다. “너 잘 지내니?” 우리의 별은 이렇게 대답한다. “그렇지가 못해. 나는 호모 사피엔스를 태우고 다니거든.” 그러자 그 낯선 별이 지구를 이렇게 위로해주었다고 한다. “까짓것, 신경쓰지 마. 금방 사라질 거야.”> —프란츠 알트, <<생태주의자 예수>>, 손성현 역, 나무심는사람, 2003, 44쪽) • 부수적인 손실이라고? 초록별 지구가 몸살을 앓고 있다. 북극의 빙하는 녹아내리고, 바다는 백화현상을 일으키며 죽어가고 있고, 숲은 사라지고, 대기는 오염되었고, 하천은 죽어가고 있으며, 질병은 대륙을 쉽게 넘나든다. 도시는 중금속을 포함한 미세먼지로 가득하고, 사람들은 원인을 알 수 없는 질병으로 시름시름 앓고 있다. 재생 불가능한 자원은 고갈을 향해 치닫고 있고, 수많은 생물 종들이 소리도 없이 사라지고 있다. 별빛은 흐릿하고 태양조차 그 밝은 빛을 잃었다. 묵시록에 나오는 네 기사가 말 위에 마구(馬具)를 얹고 있다. 사람들은 우리 삶의 자리가 빠르게 황폐화되고 있다는 말에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그 상황을 되돌리기 위해 일어서는 사람은 많지 않다. 저마다 할 일이 많은 것이다. 사람들이 나뭇가지 위에 앉아 톱질을 하고 있다. 어느 순간 나뭇가지가 부러지면서 한 사람이 쿵 소리와 함께 땅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진다. 사람들은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본다. 그리고 잠시 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들은 톱질을 계속한다. 브레히트(Bertolt Brecht)가 들려주는 이 이야기는 어느 어리석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들 자신의 이야기이다. 나의 고향집은 물맛이 일품이었다. 무더운 여름날 펌프로 길어 올린 물을 등에 끼얹으면 머리까지 시원해졌다. 그런데 이제 고향집에는 더 이상 물이 나오지 않는다. 간척 사업에 필요한 흙을 얻기 위해 개발업자들이 뒷산을 허물었기 때문이다. 장독대를 둘러싸고 운치 있게 펼쳐졌던 뒷담은 다 무너져 버렸다. 바람을 막아주던 산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하염없이 바라만 봐도 좋았던 앞산도 사라졌다. 개발업자들의 돈이 마을 공동체로 유입된 후 사람들을 이어주던 연대의 끈은 사라졌고,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은 가팔라졌다. 아이들은 더 이상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를 노래하지 않는다. 작지만 소중하던 것들, 많은 아름다운 것들이 이렇게 속절없이 사라지고 있다. 하지만 자본은 이 모든 것을 ‘부수적인 손실’로 여긴다. •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언젠가 어떤 영상물을 본 적이 있다. 존 레넌의 아내 오노 요꼬의 작품이 아니었나 싶다. 전쟁으로 황폐하게 변해가는 세상을 바라보는 아픔 때문이었을 것이다. 작가는 포탄이 발사되고, 건물이 파괴되고, 먼지가 구름처럼 피어오르는 광경을 보여준 후에, 그 필름을 되감아 보여준다. 그러자 먼지 구름이 서서히 사라지고 무너졌던 건물은 일으켜 세워지고, 발사되었던 포탄은 다시 대포 속으로 들어갔다. 작가는 그렇게라도 희망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생태계 파괴의 흐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시간은 불가역적(不可逆的)이다. 뒤로 돌아가는 방법은 없다. 앞으로 가는 길밖에는 없다. 문제는 그 길이 풍요의 신을 섬기는 발전 이데올로기 중독자들과 함께 가야 하는 길이라는 사실이다. 파시스트적인 속도로 우리를 몰아가는 시간 속에서 제 정신을 차리고 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모두가 풍요를 말하는 세상에서 검약을 말하고, 모두가 발전을 말하는 세상에서 피조물의 아픔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일종의 모험이다. 그러나 눈을 뜬 자는 침묵할 수 없다. 모든 사람이 다 열을 지어 행진하는 세상에서 대열에서 이탈하여 다른 곳으로 걸어가는 사람은 다른 북소리를 듣고 있는 것이라 했다(헨리 데이빗 쏘로우). 지금 우리는 누구의 북소리에 맞추어 걷고 있는가? 개발과 생명 보존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생명 보존이 ‘본本’이라면 개발은 ‘말末’이다. ‘본’과 ‘말’이 뒤집힌 것은 오늘의 현실이다. 그렇다면 누가 생명을 보존하는 일을 자기 소명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생명의 아픔을 자기 몸의 아픔으로 느끼는 사람이다. 지율 스님은 천성산의 울음소리를 들었고, 그 고통을 온 몸으로 경험했다. 그래서 생태근본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천성산을 살리기 위해 자기 생명을 걸었다. 끙끙 앓는 하나님 누구보다도 당신이 불쌍합니다 우리가 암덩어리가 아니어야 당신 몸이 거뜬할 텐데 피둥피둥 회충떼처럼 불어나며 이리저리 힘차게 회오리치는 온몸이 혓바닥뿐인 벌건 욕망들 —최승호 <몸> 전문 시인은 하나님의 신음소리를 듣고 있다. 인간의 욕망이 빚어낸 생명 세계의 참극을 온 몸으로 아파하는 하나님! 하나님이 아파하는 것은 인간의 아픔만이 아니다. 독극물에 중독되어 죽어가는 땅 속의 미생물, 맹독성 농약의 세례를 받는 먹을거리들, 시커먼 기름덩이를 뒤집어 쓴 가마우지, 시멘트 구조물 위에서 태어나 그 위에서 사육되다가 죽어가는 소, 전쟁터에서 영문도 모른 채 죽어가는 사람들, 물을 찾아 수십 킬로미터를 걸어가는 사람들…. 그들의 현실에 눈을 감고 하나님을 믿을 수는 없다. 평화와 생명을 지키기 위해 투신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 길이 대체 있기는 있는 건가? • 창조 신앙의 의미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고백은 다른 종교나 과학적 진실을 부정하기 위한 말이 아니다. 세상에 있는 어떤 것도 우리가 임의로 다룰 수 없다는 고백이자, 세상의 모든 것들이 그 뿌리에서는 다 연결되어 있다는 고백(天地萬物與我同根)이다. 에콜로지(ecology)라는 말의 뿌리인 그리스어 ‘오이코스’는 살림하는 집을 가리키는 말이다. 세계는 하나의 살림 공동체이다. 아담과 하와의 창조 이야기도 같은 사실을 가리키고 있다. 사람은 ‘홀로’ 주체가 아니라 ‘서로’ 주체이다. 그래서 생명은 ‘고마움’이다. ‘덕분에’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생태학적 감수성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땅은 ‘토지’이거나 ‘자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눈을 뜬 사람들에게 땅은 거룩한 곳이다. 한 숟가락 흙 속에 미생물이 1억 5천만 마리래! 왜 아니겠는가, 흙 한 술, 삼천대천세계가 거기인 것을! 알겠네 내가 더러 개미도 밟으며 흙길을 갈 때 발바닥에 기막히게 오는 그 탄력을 실은 수십억 마리 미생물이 밀어올리는 바로 그 힘이었다는 걸! —정현종 <한 숟가락 흙 속에> 전문 ‘덕분에’ 사는 사람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남용하거나 허투루 사용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밥 한 톨 속에도 하늘과 땅과 사람이 들어있음을 안다면 어찌 감히 밥을 함부로 먹겠으며, 흙 속에 깃든 무수한 생명들의 숨결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어찌 땅을 함부로 파헤치고 그 속에 맹독성 농약을 투여하겠는가? ‘잘 살아보세’라는 노랫가락이 키르케의 노랫소리처럼 우리를 매혹시키고 있다. 그 결과는 죽음인 것을 사람들은 주목하지 않는다. 간디는 지구가 인간의 기본욕구를 위해서는 항상 풍요로운 곳이지만, 인간의 탐욕 앞에서는 매우 궁핍한 곳이라고 말했다. 덜 갖고, 조금 더 불편하게 살기로 작정하면 인생이 쾌적해진다. 성경은 사람을 가리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존재라 말한다. 많은 이들이 이 말을 실체론적으로 파악해 여타의 피조물에 대한 인간의 우월적 지위를 나타내는 말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 말은 ‘관계론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의 소명이다.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현전(現前)시킬 때, 곧 생명을 돌보고, 지지하고, 가꾸고, 북돋을 때 인간은 비로소 하나님의 형상이다. 신음하고 있는 피조 세계는 지금 하나님의 아들딸들이 나타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다. 영성이란 다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 마음을 함석헌 선생은 ‘전체의 뜻으로 수정(受精)된 마음’이라 했다. “꽃이 아무리 피어도 수정이 못 되면 열매를 못 맺듯이 전체의 뜻으로 수정이 못된 마음은 쓸레 마음이다. 젊음은 전체의 위대한 영으로 수정이 돼야 한다.” 지금 우리 마음이 쓸레 마음으로 변한 것은 아닌가? 우리 마음이 하나님의 뜻으로 수정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지나친 탐욕이다. 탐욕으로 벌개진 눈과 마음은 검은 커튼이 드리워진 실내와 같다. 하늘의 빛이 비쳐들 수 없는 것이다. 지금은 자다가 깨어 커튼을 걷을 때다. • 우리의 성소 나는 지금 기독교인의 으뜸가는 덕목이 뭐냐고 물으면 ‘절제’라고 말한다. 교회에서부터 이런 삶을 훈련해야 한다. 교인수가 늘어나고, 재정 규모가 커지고, 큰 교회를 짓고, 땅을 사고, 목사들이 배기량 큰 차를 타고 다니는 것을 교회 성장의 가시적 징표로 보는 태도는 악마의 유혹이다. 진정한 교회 성장은 그리스도의 뜻을 올곧게 따르는 것이다. 생명을 보살피고, 평화 세상을 열기 위해 고난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어야 교회는 산다. 자본주의의 물결이 교회를 삼킬 듯 일렁이는 이 시대에, 우리는 풍랑이 이는 바다 위를 사뿐히 걸어오셨던 예수를 바라본다. 생태적 흔적을 가능한 한 적게 남기고 살기 위해 즐겁게 불편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는 곳, 그곳이 바로 거룩한 땅이다. 수백억을 들인 교회당이 성전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뜻이 수행되는 자리 바로 그곳이 우리의 성소이다. 희망은 있는가? 희망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분 안에 있으며, 우리 가운데 있는 것이다. 참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가능성을 따지는 사람이 아니라 힘겨워도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사람이다.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은 우리에게 희망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고 있다. 작품의 화자는 한 때 사람들이 살았지만 지금은 황무지로 변한 곳을 찾아간다. 며칠 동안 메마른 땅 이곳저곳을 걸어 다니던 화자는 목이 말라 지칠 즈음 나무를 심고 있는 목자로 살고 있는 한 노인을 만난다. 그는 말이 별로 없는 사람이었다. 저녁이면 그는 작은 주머니에 담긴 도토리를 책상 위에 쏟아놓고는 썩은 것이 없는지 하나하나 세심하게 살펴보면서 좋은 것을 골라냈다. 날이 밝으면 언제나 양떼를 데리고 광야에 나가 작은 부삽으로 땅을 파고는 거기에 도토리를 묻곤 했다. 그 땅이 누구의 소유냐고 물었지만 그는 모른다고 대답했다. 양 몇 마리를 데리고 사는 그는 그 황무해진 땅에 생명을 초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도 그에게 그 일을 부탁하지 않았다. 물론 그의 수고를 알아주는 사람도 없었다. 여러 해가 지난 후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빠져나온 화자가 그곳을 다시 찾았을 때 그는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나무를 보았고, 물줄기가 싱그럽게 흐르는 것을 보았다. 새들의 즐거운 지저귐도 들려왔다. 많은 사람들이 이 놀라운 자연의 기적을 보기 위해 몰려들었다. 하지만 한때 광야였던 그곳이 아름다운 생명의 숲으로 바뀐 것이 한 늙은 목동의 수고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이슬떨이가 된 사람들 한 사람이 변하면 세상이 변한다. 자본주의가 확대재생산하는 욕망의 구조로부터 해방된 사람, 개발 지상주의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하면서, 생명 세상을 여는 일에 동참할 일꾼을 부르는 하나님의 초대에 ‘예’라고 확고하게 대답하는 사람을 통해 세상을 새롭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꿈은 현실이 된다. 심판의 자리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얼마나 큰 교회를 담임했는지, 어떤 직분을 가지고 일했는지’를 묻지 않으실 것이다. ‘가장 작은 자들을 위해 무엇을 했느냐’고 물으실 것이다. 이 시대의 가장 작은 자는 어쩌면 생태계의 이웃들이 아닐까 한다. 상처 입은 것들과 연대하지 않고는 십자가를 말할 수 없다. 죽음의 위기 앞에 있는 이들의 삶에 화육하지 않고는 부활의 능력도 경험할 수 없다. ‘크기’의 신화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보살핌과 공경’의 삶을 말하는 것은 외로운 일이다. 하지만 그 길을 걷지 않고 하나님께 이르는 길은 없다. 길은 처음부터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한 사람이 먼저 걸어가고, 그의 발자취를 따라 걷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길이 생기는 것이다. 새벽 이슬이 맺혀있는 풀밭을 앞서 걸어가 길을 여는 이슬떨이들, 그들이 있어 세상은 희망이 있다. 끌로드 레비스트로스는 “예술은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를 알려주기 위해서 남겨둔 작은 야생의 섬처럼 현대 문명 속에 살아 있다”고 말했다. ‘예술’이라는 단어 대신 ‘기독교인’이라는 말을 넣어도 비웃음거리가 되지 않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끙끙 앓는 하나님은 지금 당신의 아픔을 함께 아파할 이들을 찾고 계신다. 하나님은 진정 고통 받는 피조물과 사람들을 품에 안고 뜨거운 정과 사랑으로 보살피시느라 신음하시는 야훼 라카민(Yahweh Rachamin)이시다. * 이 글은 기독교대한감리회 여교역자회 제33차 연차대회 및 수련회에서 읽은 주제강연 원고입니다.
목록편집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