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하늘땅사람이야기28: 반항하는 정신 2006년 05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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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항하는 정신 • 날마다 애굽에서 탈출하는 것 장로님, 분주한 시간을 내서 좋은 강의를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동북아시아의 정세와 한반도의 상황>에 대한 강의를 부탁드린 까닭은 젊은이들에게 우리 시대를 바라보는 하나의 관점이라도 제공해주었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었습니다. 얼마 전 서울대학교 총학생회가 한총련과 관계를 단절한다는 보도를 보았습니다만, 청년들의 탈정치화는 심각한 정도에 이른 것 같습니다. 오죽하면 서울대학교 정운찬 총장이 한총련과의 단절 선언을 비판하면서 “학생들이 때로는 나라 걱정도 해야 한다”고 말했겠습니까? 새만금 문제나 평택 미군기지 이전 문제 등 우리 시대의 중요한 현안에 대해 자기 나름의 분명한 입장을 가지고 말하는 이들은 만나보기 어렵습니다. 기득권자들의 논리를 비판적 검토조차 없이 받아들이면서, ‘아니오’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혼란을 조성하는 불순한 자들로 바라보는 냉소적 시선이 오히려 더 많은 것 같습니다. 냉소주의는 비겁한 자들의 운명이라지요? 타르코프스키 감독은 현대인의 위대함은 저항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무감각하고 침묵하는 군중 앞에서 스스로 몸을 불사르는 사람들, 형벌을 무릅쓰면서 플래카드나 슬로건을 들고 광장으로 걸어가는 사람들, 천박한 이기주의와 무신론에 대해 ‘아니오(No)’라고 말하는 사람들―이들을 주신 것을 하느님에게 감사한다”(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타르코프스키의 순교일기>>, 두레, 1997, 44쪽). 믿음이란 ‘날마다 애굽에서 탈출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노예적 안일함을 박차고 일어나 자유를 향해 길 떠나는 것, 바로 그것이 청년 정신이 아니겠습니까? 사유하지 않는 젊은이, 불온하지 않은 젊은이, 기존 질서에 순치된 젊은이, 소비사회에 투항해버린 젊은이를 바라보는 것보다 슬픈 일은 없을 것입니다. 사실 비판적 성찰이란 귀찮은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안일하게 통설에 기울고 맙니다. 결국 그들은 ‘조작하기 좋은 대중’이 되고 마는 것이지요. 나는 우리 젊은이들이 만만치 않는 사유의 힘을 바탕으로 우리 시대의 논리와 정신을 꿰뚫어보면서 자기 삶을 선택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젊은이들에게 다소 불편스러울 정도로 사유를 강조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저는 제 애들 이름을 지을 때 돌림자가 아닌 데도 ‘뜻 지志’를 넣었습니다. 좋은 생각이 나오면 그것을 굳게 붙잡아 발전시키고, 나쁜 생각이 나오면 그것을 잘 살펴서 없애버리는 것이 곧 ‘지志’라고 배웠기 때문입니다. 저는 아이들이 그렇게만 살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그 생각은 별로 바뀌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이 자기 이름값을 하며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살고 있는 아이들이 고맙기도 하지만, 주체성이라는 측면에서는 왠지 미덥지 못하여 염려가 많습니다.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아이들에게 새벽이야말로 정신이 들 때이고, 진짜 인간이 되는 때라고 말하며 ‘야기夜氣’에 대해 말해주어도 그냥 빙그레 웃을 뿐 응답이 없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참주였던 페리클레스는 자기 시대를 이런 말로 요약하고 있더군요. “우리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면서도 사치로 흐르지 않고, 지(智)를 사랑하면서도 유약함에 빠지지 않습니다.” 자부심이 느껴지는 말입니다. 저는 이런 멋있고 강건한 젊은이들을 보고 싶습니다. • 부드러움과 호기豪氣의 조화 요즘 교우들과 <전도서>를 함께 읽고 있습니다. 인도자로서의 제 임무는 교우들이 아무런 교리적 전제 없이 있는 그대로의 성경과 만나도록 돕는 것입니다. 성경을 본다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과 만나는 과정이 되어야 하니까요. 그 과정을 통해 고민이 생기고, 그 고민을 풀기 위해 자꾸 생각을 하다보면 깨달음이 생길 것이고, 깨달음은 샘이 되어 우리에게 생수를 제공할 것입니다. 이래저래 나는 사람들을 편안하게 내버려두지 못하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며칠 전에는 8장 1절을 두고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지혜자와 같은 자가 누구며 사리의 해석을 아는 자 누구냐. 사람의 지혜는 그 사람의 얼굴에 광채가 나게 하나니 그 얼굴의 사나운 것이 변하느니라.” 저는 이 대목을 보면서 몇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부드럽고 환한 얼굴이 아니라 딱딱하게 굳어진 얼굴이었습니다. 자기 의(義)에 사로잡혀 가차 없이 남을 정죄하는 사람들의 굳은 얼굴이었습니다. 신념은 좋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타자와의 창조적인 소통을 불가능하게 하는 신념이라면 문제가 있습니다. 갑각류처럼 자기 틀을 만들고 그 틀 밖에 선 사람들에게 날선 말의 비수를 던지는 사람들을 보면 소름이 돋습니다. 교우들에게 참된 지혜가 있어 그 얼굴빛이 부드러운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더군요. 어느 분이 마지못해 ‘목사님’이라고 대답해서 머쓱해졌는데, 다른 분이 얼른 그렇지 않다고 말해서 웃음이 터졌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내 모습은 부드럽지 않습니다. 아직도 내 속의 결기가 삭지 않았습니다. 누군가를 적극적으로 미워하거나 원수로 삼지는 않지만 싫은 사람 앞에서까지 부드러운 미소를 지을 자신은 없습니다. 상황이 어떠하든지 곰삭은 지혜로 편안하기까지 가야 할 길이 아직 멀기만 합니다. 얼굴은 얼의 골짜기라지요? 세월이 가면 내 모습도 부드러워질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부드러운 것이 곧 바로 영성의 깊이와 동일시될 수 있는 것은 아닐 겁니다. 공평함이 없는 세상, 거짓과 위선이 득세하는 세상에 충격을 주기 위해서라도 땡감처럼 떫은 사람도 필요한 법입니다. 그리스어 ‘튀모스thumos'는 사람이나 동물들 속에 깃든 어떤 요소를 지칭하는 말인데, 예컨대 위협을 받을 때 거기에 맞서 싸우도록 하는 힘을 뜻합니다. 개가 자기 영역을 지키려고 으르렁거리는 것이나, 사람이 자기의 가족과 종교, 자기 삶의 원리를 지켜내기 위해 감연히 일어서도록 하는 힘이 그것이지요. '호기豪氣'라고 번역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물론 사람들은 자기 밥그릇 싸움에는 양보가 없는 듯이 보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대의 앞에서는 몸을 도사리고 만다면 동물과 구별되는 점이 무엇이겠습니까? 땡감처럼 떫은 사람은 분란을 일으키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그런 이들을 꺼립니다. 불편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한 공동체 속에 그런 이들이 없다면 발전도 진보도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부드러움과 호기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입니다. 경직된 마음으로 ‘아니오’라고 말하면 누군가를 변화시키기보다는 그에게 상처를 입히기 마련입니다. 그러면 진실은 실종되고 대립하는 두 성격만 남게 됩니다. 저는 이런 시행착오를 참 많이 겪었습니다. 움베르토 에코는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방법>>이라는 책도 썼습니다만 나는 아직 웃으면서(조롱이 아닙니다) ‘아니오’라고 말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시중時中’의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얼마나 더 노력해야 할까요? • 인간에게 내재된 폭력성 어느 날 염구(冉求)가 공자에게 물었습니다. “의로운 일을 들으면 바로 실천해야 합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실천해야 한다.” 자로가 물었다. “의로운 일을 들으면 바로 실천해야 합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아버지와 형이 살아 계신데 어찌 들은 것을 바로 실천하겠느냐?” 자화(子華)가 공자의 대답이 다른 것을 의아해하며 물었다. “감히 여쭙겠습니다. 어찌하여 같은 질문인데 달리 대답을 하십니까?” 공자가 말했다. “염구는 머뭇거리는 성격이므로 앞으로 나아가게 해준 것이고, 자로는 지나치게 용감하므로 제지한 것이다.” (사마천, <<사기열전>>, 을유문화사, 2004, 102쪽) 스승이란 아마 이런 사람을 일컫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자기 앞에 서 있는 사람을 알지 못하고는 제대로 가르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보편을 추구합니다. 하지만 시중의 지혜를 갖추지 못한 보편은 이론일 뿐입니다. 때로는 그것이 폭력이 되기도 합니다. 장로님께서도 어떤 사회의 발전 단계를 무시한 보편에 대한 요구가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가를 말씀하셨습니다. 이슬람 세계를 자의적인 잣대로 바라보는 서구의 시선은 얼마나 폭력적입니까. 기아에 허덕이는 나라에 식량을 공급하기보다는 인권 침해에 대해서 지적하는 일은 얼마나 가소로운 일입니까? 요즘 들어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 참 좋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상을 원리에 입각해 보기보다 현실 그대로 보게 되니 말입니다. 아직도 나는 충분히 나이를 먹지 못했습니다. 장로님은 폭탄이 터지는 사진 한 장을 보여주시면서 인간의 내재적 폭력성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 섬광과 폭발음 그리고 엄청난 에너지를 보면서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흥분하게 된다고 하셨지요? 설마 그럴까 싶지만 그건 사실일 겁니다. 고대 그리스 사회는 디오니소스 축제를 허용했습니다. 그 축제는 제도와 질서 속에 억압되었던 인간의 야수적 본능을 해방시키는 계기였던 셈입니다. 과거에 저는 인간에 대한 낙관론자였습니다. 습관의 교정과 교육에 의해 사람은 선하게 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측은지심惻隱之心의 바탕인 ‘인仁’이나 수오지심羞惡之心의 바탕인 ‘의義’가 사람에게 있음을 제가 왜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우리 마음속에는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거친 욕망과 폭력성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잠재워지고 있을 뿐 언제라도 깨어날 수 있는 것이 인간의 폭력성이고 악마성입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무의식의 무저갱이 열리면 우리 속의 악마는 깨어나게 되고, 이성과 교양이라는 통제 장치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게 됩니다. 존 웨슬리(John Wesley) 목사는 인간의 원죄를 강조합니다. 그는 인간의 죄는 환경의 영향으로 조성된 나쁜 습관의 결과라고 주장한 존 테일러(John Taylor)의 이신론적인 입장을 반박하기 위해 긴 글을 썼습니다. 그가 원죄를 강조하는 것은 교인들을 교리와 두려움의 올가미로 묶어두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나는 가장 나쁜 종교는 사람들을 형벌의 두려움과 보상에 대한 기대 속에 가두는 종교라 생각합니다. • 엎드리지 않을 수 없는 이유 수피교의 신비가인 라비아(Rabia)의 일화가 떠오르네요. 어느 날 사람들은 라비아가 한손에는 횃불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물통을 들고 달려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그녀에게 그 이상스런 행동의 의미가 뭔지 그리고 어디를 향해 가는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라비아는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낙원에 불을 지르고, 지옥에 물을 끼얹으려고 가는 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참된 비전을 가로막는) 그 두 가지 너울을 없애버리려고요.” 라비아는 이런 기도를 신께 바쳤습니다. 오 나의 주님, 내가 만일 지옥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당신을 섬긴다면 나를 지옥불로 태워주십시오. 만일 내가 낙원에 대한 기대 때문에 당신을 경배한다면 나를 낙원에 들이지 마십시오. 그러나 내가 당신을 당신 자신을 위해 섬긴다면 당신의 영원한 아름다움으로부터 나를 멀리하지 말아주십시오.(James Fadiman & Robert Frager edit. <>, HarperSanFransico, 1997, 86쪽). 이게 하나님 앞에 서있는 이들의 온당한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죄를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우리의 의지와 노력만으로는 새로운 삶이 불가능하다는 자각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고는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만연한 무지와 오류 그리고 고통을 해결할 수 있는 힘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 마음에 부어지지 않으면 우리는 좌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장로님의 삶의 주제는 평화입니다. 전쟁을 말하고 무기를 말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지만 궁극적인 지향점은 평화이니 말입니다. 힘이 곧 평화는 아니지만, 국제 정치의 현실을 볼 때 힘이 없는 평화란 가능하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동감입니다. 지금 세계는 플라톤의 <<국가>>에 등장하는 트라시마코스의 논리로 무장하고 있습니다. 그는 “올바른 것(to dikaion)이란 '더 강한 자(ho kreittōn)의 편익(이득: to sympheron)’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힘이 정의라는 말이겠지요.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견해를 따라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래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이상을 배반합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고, 나라와 나라가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않는 세상, 더 이상 전쟁 연습을 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의 꿈은 아름답지만 그 꿈의 실현은 아직 요원합니다. 꿈을 잃는다는 것은 지향점을 잃는 것이니까, 우리는 미가와 이사야의 노래를 계속 불러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를 지킬 힘을 갖춰야 합니다. 두 지점 사이에 드리운 외줄을 어떻게 타고 걷느냐가 항상 문제입니다.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함부로 행사하지 않고, 타자를 지배하려 들지 않는 능력은 힘 자체로부터 나올 수 없습니다. 그것은 위로부터 주어집니다. 이게 우리가 엎드리지 않을 수 없는 이유입니다. • 참회록을 쓰는 심정으로 하지만, 하지만 말입니다. 오늘의 교회는 타락했습니다. 자신을 버리고 낮춤으로 남을 살리던 예수의 정신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갈릴리의 밑바닥 사람들의 삶 속에 화육했던 예수, 열병 걸린 이들의 손을 붙잡고 마음 아파 눈물을 글썽이는 그 소박한 예수의 모습은 실종되고 말았습니다. 카타콤베 시대에 나타난 양을 어깨에 메고 있는 그리스도의 이미지는 콘스탄틴 대제 이후 우주의 주관자인 판토크라토르 그리스도로 대체되고 말았습니다. 꿩 잡는 게 매라고, 암암리에 교회의 크기가 목회자들의 영성을 평가하는 척도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많은 목회자들이 평화의 문제도 생명의 문제도 한쪽으로 밀쳐놓고 오로지 교인수 늘리는 일에만 몰두합니다. 때로는 그들의 불가사의한 열정이 부럽기도 합니다. 문제는 모든 열심이 좋은 것이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어느 날 어느 분에 제게 물었습니다. “목사님, 왜 믿음이 좋은 사람일수록 편협할까요?” 나는 그 물음에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마음이 울울할 때면 참회록을 쓰는 심정으로 칼릴 지브란의 글을 읽습니다. 태풍처럼 몰아치는 <반항하는 정신>의 ‘칼릴’의 날선 말들 앞에 나는 죄인이 되어 전전긍긍하기도 하고, 스스로 칼릴의 마음이 되어 혼자 끓어오르기도 합니다. <어찌해서 당신들은 여기 수도원에 편히 앉아 가난한 사람들의 땀과 눈물로 빚어진 빵을 먹으면서, 그 지식을 필요로 하는 백성들과는 동떨어져서, 저들의 무지를 깨우쳐 주기는커녕 고지식한 그들의 피를 빨아먹고 있습니까? 예수께서는 당신들 보고 이리떼로부터 양들을 지키는 어진 목자들이 되라 하셨는데, 어떻게 당신들은 양들을 잡아먹는 이리떼가 될 수 있습니까? 어떻게 당신들은 가난 속에서 평생토록 헌신적인 삶을 살기로 굳게 맹세하고 또 서약하고서도, 당신들이 한 말은 모두 잊어버린 채,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산다고 하면서, 종교가 뜻하는 모든 것을 다 저버릴 수 있습니까? 마음이 욕심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 어떻게 수도를 한다는 것입니까? 당신들은 겉으로는 당신들의 육신을 죽이는 체하나, 속으로는 당신들의 영혼을 죽이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이 세상의 모든 세속적인 것들을 질색인 양하면서도 속마음은 탐욕으로 부풀어 있습니다. 스스로를 백성의 지도자요, 스승이라 지칭하나, 사실을 말하자면 당신들은 강도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칼릴 지브란, <<반항하는 정신>>, 당그래, 1991, 22-23쪽) 이제 곧 5월이 지나면 6월이 오겠지요? 아름다운 5월에 아름다움의 노래를 맘껏 부를 수 없게 된지가 벌써 여러 해입니다. 생명의 노래가 들려와야 할 들판에서 신음소리와 울부짖음이 들려오는 현실이 가슴 아픕니다. 하늘 이야기와 땅의 이야기,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내 귀가 너무 무뎌졌습니다. 분주함 속에 둥둥 떠다니다가 정신을 차려 자리에 앉고 보니 누렇게 떠버린 내 몰골이 딱하기만 합니다. 내 속에 침묵이 고갈되어 버렸습니다. 이제는 침묵이 차오를 때까지 조금 앉아 있어야 하겠습니다. 생각을 나눌 수 있는 이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장로님, 늘 감사합니다. 샨티, 샨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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