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하늘땅사람이야기27: 기억을 공유한다는 것 2006년 04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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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공유한다는 것 한 목사님, 봄의 한복판입니다. 올해는 유난히 봄이 사랑스럽네요. 사람들은 그게 나이가 들어가는 증거라더군요. 며칠 정신없이 지내다가 눈도 쉴 겸 교회 화단에 나갔다가 나는 탄성을 질렀습니다. 함박꽃 붉은 싹은 어느 새 제법 자라 꼴을 갖추어가고, 봄이 오건 말건 나와 무슨 상관이냐는 듯 딴청이던 산딸나무도 어쩔 수 없다는 듯 푸른 잎을 머금었습니다. 몇 년 째 몸살을 하고 있는 산수유는 뒤늦게나마 잎을 피어올리고 있었습니다. 가시오가피나무 줄기에는 제법 가시가 돋아나 자기가 누구인지를 과시하고 있습니다. 새싹은 ‘대지가 터뜨리는 감탄사’라는 한 목사님의 말에 맞장구를 치게 됩니다. 그런데 상사초 푸른 잎은 벌써 지친 기색이 역력하네요. 이 친구를 볼 때마다 “침묵 속에서/나는 당신께 말하는 법을 배웠고/어둠 속에서/위로 없이도/신뢰하는 법을 익혀왔습니다”라고 노래한 어느 가슴 따뜻한 시인의 시린 마음이 떠오르곤 합니다. 잎이 다 지고, 그 잎이 얼크러진 후에야 꽃대를 밀어 올려 꽃을 피어내는 상사초의 어긋난 운명이 구도자들의 운명인 듯도 싶어 가슴이 뭉클합니다. 벌써 여러 해가 지났지요? 마음으로는 그리워하면서도 그것을 드러내지 못하는 것은 나의 어쩔 수 없는 고질병인가 봅니다. ‘형’이라고 불리우면서도 형답게 아우를 보듬지 못한 자책감이 참 큽니다. 그저 내성적인 성격 때문이려니 하고 받아들여주세요. 간혹 그곳을 다녀오는 이들을 통해서 잘 지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몇 년의 세월이 만만치 않았음을 나는 압니다. 세상에서 제일 괴로운 것은 소통 부재의 상황에 빠진다는 것이지요. 나의 진심이 너의 가슴에 가닿지 않을 때, 진정을 담은 말이 메아리도 없이 흩어져 버릴 때 우리는 상실감을 느낍니다. 하지만 그것도 견뎌야 할 생의 한 면입니다. 편안하기를 바랐다면 한 목사님은 그 한적한 시골 마을을 떠나지 못했을 겁니다. 많은 사람들의 만류를 무릅쓰고 새로운 도전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떠날 때, 나는 한 목사님의 가슴에 먼지처럼 소리없이 쌓여간 울울함을 얼핏 본 듯 싶었습니다. 비가 되어 내리지 못하는 먹장구름처럼 삶이 버거워도 그런 상황을 애써 외면하며 현실에 안주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한 목사님은 그곳을 떠났습니다. 나는 소리 없는 박수를 보냈더랬습니다. • 날개를 편다는 일은 절해고도에 갇힌 채 희망 없는 나날을 보내던 ‘드가’는 끝없이 탈주를 감행하는 ‘빠삐용’의 결기에 두 손을 들고 맙니다. 집 채 만한 파도에 밀려 절벽에 내동댕이쳐질 수도 있건만 빠삐용은 절벽을 새처럼 날아 바다로 뛰어들지요. 그리고 득의의 웃음을 지으며 망망한 바다로 나아가고, 남겨진 드가는 씨앗이 담긴 바구니를 들고 가축들을 돌보기 위해 섬의 안쪽으로 걸어 들어갑니다. 그 쓸쓸한 표정이라니. 나는 지금 빠삐용을 꿈꾸었던 드가로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성서의 사람이 그러했듯이 우리는 이미 ‘떠나라’는 명령을 받아놓고 살고 있습니다. 애집하는 것을 만들지 말아야 그 명령에 순종할 수 있겠지요? 우리 스승께서는 제자들을 세상에 내보내시면서 사람들이 차려주는 것은 무엇이든 달게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칭찬이든 모욕이든 말입니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사람이 조금 겸손해지기 위해서는 많은 모욕을 견뎌야 한다지요? 그런데 어쩌지요? 우리는 칭찬에만 익숙해지고 있으니 말이에요. 세상일에는 다 때가 있는 법이지요. 그렇기에 기다림은 지혜요 사랑입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조르바’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기억나네요. 어느 날 아침 그는 나무등걸에 붙어 있는 나비집을 발견했습니다. 나비는 마침 집에서 나오려고 고치에 구멍을 내고 있는 참이었습니다. 그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생명의 기적을 지켜보려고 한참을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은 너무 더디어 참기가 힘들었습니다. 급기야 그는 허리를 굽히고 입김으로 그것을 덥히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생명의 속도보다 빠른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집이 열리고 나비가 엉금엉금 기어 나온 것이지요. 하지만 그는 금방 공포에 사로잡힙니다. 나비의 한쪽 날개가 뒤로 붙은 채 구겨져 있었던 것입니다. 나비를 떨면서 날개들을 펴보려고 기를 썼습니다. 조르바는 자책감에 사로잡힌 채 나비가 날개 펴는 것을 도우려고 해보았지만 부질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결국 나비는 그의 손바닥 위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입김이 나비로 하여금 나올 시간보다 앞당겨 나오도록 강요했음을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날개를 편다는 일은 태양 아래에서 천천히 진행되는 작업이어야만 했다.” 나는 이것이 조르바의 생에 있어서 사소하지만 근본적인 경험이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나는 복음서를 읽다가 제자들을 대하는 예수님의 마음에 가슴 뭉클한 감동을 느낄 때가 많아요. 예수님에게는 억지가 없어요. 제자들의 무지와 무능을 탄식하실 뿐 그들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하지도 않고, 화를 내지도 않지요. 그저 믿어주시고 기다리실 뿐. 사랑은 바라고 믿고 참아내는 것이라지요. 그 사랑 덕분에 제자들은 새로운 세상의 주춧돌 혹은 징검돌이 될 수 있었던 아닐까 싶어요. 종교란 생명의 신비에 대한 반응이고 우주의 무한함에 대한 외경심일 텐데, 오늘의 한국 교회는 상인 근성이 지배하는 시장거리가 된 것 같아 암담합니다. 크기의 신화가 진실과 생명을 압도하고 있습니다. 눈빛이 살아있던 젊은 구도자들도 교직 구조 속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그 야성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주님이 이런 우리를 끝내 기다려주실지 모르겠습니다. 권위주의의 옷을 한사코 거부해야 할 사람들이 기꺼이 그 옷을 구매합니다. 아니 어쩌면 자기 손으로 만든 옷을 입고 거들먹거립니다. 누가 보아도 어울리지 않는 옷인 줄을 오직 그만이 모릅니다. 정신의 크기보다는 교회의 크기가, 인격의 향기보다는 타고 다니는 차의 크기가 그 사람의 존재로 인정되는 오늘의 교회 현실이 암담합니다. 꿩 잡는 게 매인가요? 도덕적으로 수용하기 어려운 일을 저지른 사람이라 해도 그가 큰 교회를 담임하고 있으면 면죄부가 주어지는 판입니다. 통렬한 참회도 없이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더욱 크기에 집착하게 됩니다. 교회는 이제 공신력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생명의 신비를 말하고, 우주의 무한함에 대한 외경과 기다림을 말하는 사람들은 세상모르는 철부지로 취급받는 것이 오늘 우리의 현실입니다. 하지만 어쩝니까? 그러려면 그러라지요. 나는 내 속도에 따라 살겠습니다. • 우정과 기억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엘리 비젤(Elie Wiesel)은 <흑야>, <새벽>, <팔티엘의 비망록>, <예루살렘의 거지들>, <벽 너머 마을> 등의 소설을 통해 80년대 초반의 내 가슴을 뛰게 만들었는데, 놀랍게도 그는 1986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이 되었어요. 문학상이 아닌 평화상이라는 것이 다소 의외이기는 했지만 나중에는 그럴 만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시상식 강연에서 하시딤에서 전해오는 아름다운 전설 하나를 들려주었습니다. 위대한 랍비 바알 셈 토브는 매우 긴급하고 위험한 임무 수행해야 했습니다. 그것은 메시아의 도래를 앞당기는 일이었습니다. 유대인은 물론이고 모든 인류가 너무 큰 고통을 당하고 있었기에 그들은 메시아의 강림을 학수고대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알 셈 토브는 하나님의 역사에 부당하게 간섭하려 했기에 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신실한 종과 함께 먼 섬에 유배되었습니다. 종은 그 위대한 랍비에게 그들이 함께 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신비한 능력을 발휘할 것을 종용합니다. 하지만 주인은 그건 불가능하다고 말하면서 침통하게 말합니다. “나의 힘은 사라져 버렸다네.” 종은 다급하게 말합니다. “그렇다면 어서 기도를 드리세요. 탄원의 기도를 바치세요. 그리고 기적을 행하세요.” 랍비는 맥없이 대답합니다. “그것도 불가능하다네. 나는 기도문 가운데 하나도 기억할 수 없네.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리고 말았네.” 둘은 함께 울었습니다. 그러다가 바알 셈 토브는 좋은 생각이 떠오른 듯 종에게 부탁합니다. “자네가 내게 기도를 상기시켜주게나. 어떤 기도든 말일세.” 하지만 종은 침통한 표정으로 말합니다. “그럴 수 있다면 좋겠지만 나 역시 아무 것도 기억할 수가 없습니다.” “모두 다?” “예, 하지만…”. “하지만 뭐?” “알파벳만 빼고요.” 이 짧은 문답 끝에 주인은 기뻐하며 외쳤습니다. “그러면 뭘 기다리고 있나? 그 알파벳을 암송하게. 천천히. 내가 따라 할 수 있도록.” 종이 먼저 말하면 주인이 따라 하며 둘은 함께 알파벳을 암송했습니다. 처음에는 나지막하게, 나중에는 큰 소리로. “알레프 Aleph, 베트 beth, 지멜 gimel, 달레트 daleth……". 그들은 알파벳을 열정을 가지고 암송했습니다. 결국 바알 셈 토브는 그의 기억을 되찾았고, 그의 신비한 능력도 되찾게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 끝에 엘리 비젤은 이 이야기에 담긴 두 가지의 중요한 교훈을 끄집어냈습니다. 첫째로 이 이야기는 한 사람이 자기 상황의 질곡으로부터 벗어나는 능력을 발휘하는 데 있어서 우정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밝혀준다고 말합니다. 둘째로 이 이야기는 기억의 신비한 능력에 대해 말해준다는 것이지요. 기억이 사라진다면 우리 실존은 마치 빛이 비쳐들지 않는 감방처럼 황량하고 우중충한 것이 되고 말 거라는 것이지요. • 놋주발보다 더 쨍쨍 울리는 추억 느닷없이 김수영 시인의 <巨大한 뿌리>가 생각나네요. 삶이 힘들었던 게지요. 아니 역사 속에서 벌어지는 온갖 일들이 오욕의 물결이 되어 시인의 감성을 뒤흔들어 놓았던 게지요. 근대와 전근대의 착종, 진보와 보수의 힘겨루기, 물질과 정신의 자리바꿈, 그 난장 속에서 토악질을 해대던 시인은, 어느 날 ‘이사벨 버드 비숍여사’의 글을 읽다가 우리 역사의 뒤안길을 둘러보게 됩니다. 외국인의 눈에 비친 이상한 나라의 풍경이야말로 부정할 수도 없고, 단절할 수 없는 나의 역사임을 받아들입니다. 그다지 자랑스러울 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부끄럽다고 외면할 것도 없는 것이 역사입니다. 아니, 부끄러워했던 역사가 오히려 나의 뿌리임을 그는 자각하게 되지요. 傳統은 아무리 더러운 傳統이라도 좋다 나는 光化門 네거리에서 시구문의 진창을 연상하고 寅煥네 처갓집 옆의 지금은 埋立한 개울에서 아낙네들이 양잿물 솥에 불을 지피며 빨래하던 시절을 생각하고 이 우울한 시대를 패러다이스처럼 생각한다 버드 비숍女史를 안 뒤부터는 썩어빠진 대한민국이 괴롭지 않다 오히려 황송하다 歷史는 아무리 더러운 歷史라도 좋다 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 나에게 놋주발보다 더 쨍쨍 울리는 追憶이 있는 한 人間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 (<巨大한 뿌리> 부분) ‘놋주발보다 더 쨍쨍 울리는…’이라는 대목을 읽을 때마다 내 마음 속에서 잠들어 있던 종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는 것을 느끼곤 했습니다. 아름다운 기억만 소중한 것은 아니지요. 슬프고 고통스러운 기억도 소중하지요. 하지만 잊을 수 있다는 사실이 고마울 때도 많습니다. 매 순간 살면서 겪어온 고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면 어떻게 살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에 우리는 망각의 은총을 달라고 빌기도 합니다. 인생은 어쩌면 즐거운 기억과 고통스러운 기억으로 엮은 실을 씨실로 삼고 보이지 않는 손길의 돌봄을 날실로 삼아 짜내려가는 태피스트리(tapestry)인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잊지 말아야지요. 조금 전에 새만금 어민들이 그린 지도를 들여다보았습니다. 어민들은 마치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자기 몸에 메모를 남기는 <메멘토>의 주인공처럼 평생을 지켜온 개펄이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기억을 더듬어 생태지도를 작성한 것입니다. 그 지도에는 소라, 죽합, 노랑조개, 개우렁 등 다양한 어패류들이 많이 잡히던 곳이 표기돼 있고, 조개풀, 오전풀, 속풀, 광장풀, 구복작, 삼성풀, 만전연풀, 갈련초, 새땅 등 갯벌에서 자라는 식물들의 위치도 그려져 있습니다. 이름만으로도 정겨운 이 생명들이 소리 없이 죽어갈 생각을 하니 가슴이 미어집니다. 언젠가는 죽어간 그 생명체들이 큰 함성이 되어 우리의 죄를 꾸짖을 것만 같습니다. 모두가 시간의 가속 페달을 밟고 있는 인간 중심의 문명이 만들어낸 폭력입니다. 시간을 앞당기려고 서둘다보면 우리는 가장 소중한 것을 망각하게 됩니다. 내 삶의 뿌리 말입니다. 인디언들은 말을 타고 달리다가도 잠시 멈추곤 했다지요. 영혼의 속도는 말의 속도를 따를 수 없기 때문에 영혼이 당도하기를 기다리는 것이라더군요. 시간 속의 성소인 ‘안식일’의 의미도 그런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잠시 멈추어 서라는 것이지요. 분주함 속에서는 성찰이 불가능합니다. 한 목사님이 살아가면서 보고 듣고 느끼는 것들을 기록했던 것도 망각에 대한 저항의 몸짓이 아니었나 싶어요. • 기억의 날 로시 하샤나(Rosh Hashana)는 유다인들의 설날입니다. 대개 고레고리력으로는 9월이나 10월이 된다더군요. 그런데 그들은 설날을 욤 하지카론(Yom Hazikaron)이라고도 부른대요. ‘기억의 날’이라는 뜻이랍니다. 뭘 기억하라는 것일까요? 자기들의 살아온 지난날을 돌아보며 참회하라는 뜻일 겁니다. 동시에 뿌리를 잊지 말라는 말일 테고요. 하나를 더 보탠다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고통을 결코 잊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신하라는 것이겠지요. 기억은 그런 의미에서 자기 동일성의 뿌리입니다. 시간 속에서 살아가면서 우리는 늘 시대와 자신과 가까운 이들 그리고 시대와 불화를 겪게 마련이지만, 그런 과정이 만들어낸 기억의 온축을 통해 자아를 형성하는 것일 테니 말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시간에는 과거의 현재, 현재의 현재, 미래의 현재, 이렇게 세 가지 때가 있다면서 그것은 오로지 영혼 안에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과거는 현재의 기억이요, 현재의 현재는 목격함이요, 미래의 현재는 기다림”이라는 것이지요. 기억을 잃는다는 것은 그러니까 자신이 경험해온 세계와 자기 자신을 연결할 능력을 상실한다는 뜻인 동시에 현재를 꿰뚫어 알 수도 미래에 대한 전망조차 가지기 어렵다는 말이 아니겠어요? 현실은 우리에게 과거는 잊으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누구인지, 어디를 향해 가는지. ‘실존’이란 자기 밖에 서는 일일진대 현대인들에게 이 일처럼 힘겨운 일은 없는 듯 싶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이데거의 말대로 ‘잡담’과 ‘호기심’ 그리고 애매성 속에서 부유합니다. 자기와의 대면을 한사코 연기하는 것이지요. 일종의 전락입니다. 미국에 노예로 팔려간 서부 아프리카인들 가운데는 자신들의 고유한 문화를 보유하고, 심지어는 남부에서 노예로 붙잡혀 있는 동안 아랍어로 문서를 기록한 이도 있답니다. 오마르 이븐 사이드(Omar Ibn Sayyid, 1772-1864)가 바로 그 사람인데, 그는 노스 캐롤라이나 농장에서 아랍어로 자서전을 썼다는군요(칼 W. 언스트, <<무함마드를 따라서>>, 최형묵 옮김, 심산, 2005년, 48쪽). 그의 기록 행위는 자기가 누구인지를 잊지 않으려는 몸부림이었을 겁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작은 아들이 아버지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기억이 회복되었기 때문입니다. 기억을 뜻하는 영어 단어 ‘remember'는 '다시 멤버가 된다’는 뜻이 아닐까요? 기억이야말로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끈일 테니 말입니다. 엘리 비젤은 아우슈비츠의 생존자들은 앞서 죽어간 이들에 대해 증언할 책임이 있다고 말합니다. 희생자들의 고독과 슬픔, 거의 미쳐가던 어머니들의 눈물, 불붙는 하늘 아래서 드리는 불운한 이들의 기도 등을 말입니다. “그들은 엄마 뒤에 숨어서 아주 부드럽게 ‘지금 울어도 돼요?’라고 물었던 소녀에 대해 말해야 했다. 그들은 굳게 잠긴 짐칸에서 동료들에게 바치는 선물인양 노래를 시작한 병든 걸인에 대해 말해야 했다. 그리고 할머니를 껴안으며 ‘두려워하지 마세요, 죽는 것을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나는 두렵지 않아요’라고 속삭였던 어린 소녀에 대해서도. 두려움 없이, 후회도 없이 자신의 죽음을 향해 나아갔던 그 어린 소녀는 겨우 일곱 살이었다.” 기억을 기록하는 행위는 어쩌면 우리가 인간다움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인지도 모릅니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내가 무엇을 위해 사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엄펑스럽게 우리를 끌고다니는 시간, 때로는 가혹하게 내 시린 등을 밀어젖히는 시간 속에서 그래도 내가 길을 잃지 않는 것은 기억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일 겁니다. 혼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이 바알 셈 토브에게는 하나님의 배려였던 셈입니다. 한 목사님, 참을 찾아가는 길이 쉽지는 않더군요. 하지만 어디에서라도 그 길을 걷는 이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인지요. 그 길 위에서 내 이름을 다시 호명해주어서 참 고맙고 기쁩니다. 함석헌 선생님의 시 <참>으로 인사를 대신합니다. 참 찾아 예는 길에 한 참 두 참 쉬지 마라 참참이 참아가서 영원한 참 갈 것이니 참든 맘 참 참을 보면 가득 참을 얻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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