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하늘땅사람이야기25: 시린 마음을 잊지 말라 2006년 02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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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린 마음을 잊지 말라 • 겨울 기도 이 전도사님, 겨우내 고생 많았지요? 추운 집에 적응하느라 아기들이 고뿔을 달고 살지나 않았는지 모르겠네요. 난방을 잘 한다고 해도 외풍이 심한 집에서는 어쩔 수가 없지요. 부모야 사서 하는 고생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아이들의 고생이 마음 아픈 거지요. 언젠가 자식을 감옥에 보낸 어머니가 고생하는 아들 생각에 혹독한 겨울 추위를 불기 없는 방에서 난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가슴이 뭉클해지더군요. 배 아파 낳은 자식의 고통을 어머니는 당신의 고통으로 고스란히 경험하는 것이지요. 나는 그 기사를 본 후에 가급적이면 서늘하게 지내려고 애를 쓰는 편이에요. 겨울철 내 사무실의 온도를 약16도에 맞춰놓고 지내는 것도 그런 일종의 채무감 때문이지요. 작년에 아파트로 이사한 후에는 그런 나의 바람과 상관없이 겨울에도 얇은 이불을 덮고 지내는 불편한 호사를 누리고 있어요. 그래서 마종기 님의 <겨울 기도>가 더욱 절실하게 다가오네요. 하느님 나를 항상 추워하며 살게 하소서 이불이 얇은 자의 시린 마음을 잊지 않게 하시고 돌아갈 수 있는 몇 평의 방을 고마워하게 하소서. 겨울에 살게 하소서 여름의 열기 속에서 낙엽으로 날리는 한정없는 방황과 미련을 잠재우고 쌓인 눈 속에서 같이 삭을 수 있는 당신의 긴 뜻을 알게 하소서. 이불이 얇은 자의 시린 마음을 잊지 않게 해달라는 시인의 염원이 참 절실합니다. 그렇지요, 그 마음을 잃어버리는 순간 우리는 자신이 지은 감옥에서 살게 되지요. 예언자들의 정념에 대해 말하면서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은 “악의 뿌리는 열정 속에, 고동치는 가슴 속에 있지 않고 오히려 굳어진 가슴에, 그 냉담과 무감각 속에 박혀 있다”고 말하더군요. 살아보니 그런 것 같아요. 열정이 많으면 실수도 많고,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히기도 하지요. 하지만 우리 가슴에 깊은 상흔을 남기는 것은 누군가의 열정이기보다는 냉담인 경우가 많아요. 대놓고 비난하는 사람보다 냉소적 미소를 띠고 얼굴을 돌려버리는 사람에게서 우리는 더 큰 모욕감을 느낍니다.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라는 말도 있습니다만, 헤셀은 냉담과 무감각을 악의 뿌리라고까지 말하네요. 소위 말하는 무한경쟁시대를 살아가면서 우리는 점점 갑각류(甲殼類)를 닮아가는 것 같아요. 자아의 성벽에 갇힌 채 괴물이 되어가는 것은 동화속의 인물만이 아닐 겁니다. 우리는 어쩌면 ‘다리 놓는 자’로 부름 받은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 피조물과 피조물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고, 막힌 것은 뚫어 소통할 수 있게 해주는 것, 바로 그게 주님이 우리에게 위임해주신 일이 아닌가 싶어요. 예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 여자와 남자, 죄인과 의인, 거룩과 속됨의 경계선을 가로질러 길을 내는 일에 당신 목숨을 바치셨지요. 이사야의 비전도 그런 게 아닐까요? “그 날이 오면, 이집트에서 앗시리아로 통하는 큰길이 생겨, 앗시리아 사람은 이집트로 가고 이집트 사람은 앗시리아로 갈 것이며, 이집트 사람이 앗시리아 사람과 함께 주님을 경배할 것이다.”(사19:23) 종교는 나누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경계선을 없앰으로써 궁극적인 ‘하나’에 도달하도록 하는 데 그 존재 이유가 있는 것 아닐까 싶어요. 서로를 비스듬하게 기댄 채 살아가는 게 생명 아니겠어요? ‘지중유산(地中有山)’이란 말이 있어요. 하늘을 찌를 듯 솟아있는 산도 그 뿌리는 땅과 이어져 있다는 말이지요. • 성의(誠意) 공부 이제 다음 달이면 목사 안수를 받게 되지요? 이런저런 생각이 많겠어요. 22년 전의 이맘때 쯤 나도 목사 안수식을 앞두고 어딘가로 달아나고 싶었던 기억이 나네요. 소명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기도 했지만, 일단 그 경계선을 넘게 되면 다시는 돌아 나올 수 없으리라는 예감 때문이었을 거예요. 무릎을 꿇고 앉아 안수를 받는 순간 내가 이제는 하나님의 차꼬에 채워진 사람이 되었다는 생각에 감격인지 회한인지 모를 눈물을 안으로 삼켰더랬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선택한 길만 걸을 수는 없는 것 같아요. 때로는 길이 나를 선택할 때도 있는 법이지요. 역사변혁을 위해 고난의 가시밭길을 걸었던 이들도 자기의 지난날을 돌아보며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더군요. 내게 안수 보좌를 해달라고 했지요? 기꺼운 마음으로 하겠습니다. 이 참에 나도 안수 받을 때의 다짐을 회복해야겠어요. 그때 나는 다산 정약용 선생이 유배지에서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권한 성의(誠意) 공부를 내 공부의 단초로 삼고 싶었습니다. “성의 공부는 모름지기 먼저 거짓말하지 않는 일부터 노력해야 한다. 한마디 거짓말하는 것을 마치 세상에서 가장 악하고 큰 죄가 되는 것으로 보고 이것이 성의 공부로 들어가는 최초의 길목임을 명심하거라.” 나는 이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하는 사람은 마땅히 거짓을 멀리해야 합니다. 그래서 알면 아는 만큼만 말하고 모르면 모른다고 말할 줄 아는 사람, 말의 액면가와 마음이 일치하는 사람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지 못했습니다. 허울 좋은 말로 나와 남을 기만한 때가 많았고, 하지 말아야 할 말로 세상을 어지럽히기도 했습니다. ‘목사’라는 허울좋은 성의(聖衣)는 걸치고 있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을 성의로 대하고 있지도 못합니다. 예배 시간에 차에다 키를 꽂아두고 온 것이 아닌가 염려되어 연신 시계를 들여다보며 안절부절 못하는 사람처럼 파도처럼 밀려오는 일들을 바라보며 마음의 고요함을 잃어버리기 일쑤입니다. 광고용 풍선이 바람 부는 대로 허청거리는 모습을 보면서 쓴웃음을 지은 적이 있습니다. 그게 내 모습인 듯 보여서 말입니다. 기왕 정약용 선생 이야기를 했으니까 그의 말을 한 대목 더 인용하겠습니다. “천하에는 두 가지 큰 기준이 있는데 하나는 시비의 기준이요, 또 하나는 이해의 기준이다. 이 두 가지 큰 기준에서 네 종류의 큰 등급이 생기는 것이다. 옳은 것을 지켜서 이익을 얻는 것이 가장 높은 등급이요, 그 다음은 옳은 것을 지켜서 해를 받는 것이며, 그 다음은 나쁜 것을 쫓아 이익을 얻는 것이며, 가장 낮은 등급은 나쁜 것을 쫓아서 해를 받는 것이다.”[<<다산문선>>, (솔, 1997). 127-8쪽] 당대의 세도가에게 조금만 몸을 낮추면 유배에서 풀려날 수도 있지 않겠냐고 말하는 아들에게 정색을 하고 들려준 말입니다. 다산은 세상을 바라보는 두 가지 큰 관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시(是)와 비(非)의 기준에 따라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이익(利)과 손해(害)의 기준에 따라 세상을 파악하는 것입니다. 다산은 이 두 가지 관점을 연결시키고 있지만, 물론 그가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것은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입니다. 그가 말한 대로 옳은 것을 지킴으로써 이익을 얻을 수 있다면 더할 수 없이 좋겠지요. 하지만 옳은 것을 지키려다가 해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불의한 세상일수록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런 것 아니겠어요? 옳고 그름의 기준보다 이익과 손해의 잣대로 인생을 대할 때 우리는 병든 삶을 살게 됩니다. 불의와 공모해 이익을 얻을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다산도 말하다시피 불의와 공모해 얻는 이익은 곧 해로 변할 수밖에 없어요. 주님은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평안을 빌어주셨지만 안락한 삶을 약속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안락한 삶을 지향하는 순간 우리 영혼은 잠들기 시작합니다. 명예나 돈이 내 삶의 지배권을 행사하도록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없는 한 우리의 사역은 밥벌이의 수단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김달진 선생님의 <<山居日記))를 읽다가 가슴 서늘한 구절과 만났습니다. 마음공부를 하려는 학인들을 보며 쓴 글입니다. 이 전도사님도 명심하면 좋을 듯합니다. “학인은 먼저 기개가 있어야 할 것이다. 명리를 바라고 영달을 꿈꾸는 정신에는 기백을 바랄 수 없다. 청빈을 도리어 영광으로 알아야 하고 곤고(困苦)에 대한 인내가 있어야 하고 지향에 대한 열정이 있어야 할 것이다. 신명을 아끼지 않을 각오가 없는 생활에 무슨 학구의 깊이가 있고 대성이 있겠는가? 학인으로서 가장 경계할 것은 무엇보다 먼저 상인(商人) 근성일 것이다.” • 추종자를 만들지 말라 나는 목사 안수를 받을 때 어떤 경우에도 나의 추종자를 만들지 않겠다고 다짐했어요. 일종의 거리두기라고 할 수 있겠지요. 칼릴 지브란은 결혼하는 이들에게도 너희 사이에 출렁이는 바다를 두라고 했어요. 참 중요한 것이 ‘사이’입니다. 그것은 서로가 자유롭게 숨쉴 수 있는 틈이고, 서로를 더 잘 바라볼 수 있도록 하는 거리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영적 지도자들을 추종하려는 경향을 보입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세상에 살면서 경험하는 불안을 이기기 위한 발버둥일 겁니다. 하지만 추종자는 독립적인 인격이 되기 어렵습니다. 마태복음 23장에서 예수님은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고 하셨어요. 우리는 사람들이 독립적인 존재로 살아가도록 도우라고 부름을 받았지, 그들을 지배하고 간섭하고 예속시키기 위해 부름 받은 것은 아닐 거예요. 예수님은 당신이 행하는 기적에 열광하는 사람들 곁을 벗어나곤 하셨는데, 그것은 그들의 허망한 집착에 찬 물을 끼얹어 미망에서 깨어나게 하려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열광은 미성숙한 영혼의 특색입니다. 사람은 진리는 한사코 외면하면서 허망한 것에 대해서는 생래적인 기호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정겹고 부드러운 말 뒤에 숨어있는 뱀의 혀를 보지 못하는 것이지요. 남이 나를 지배하도록 허용하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남을 지배하지 않겠다는 결단도 역시 중요해요. 남을 지배하려는 경향을 지닌 사람들은 잡아온 곤충의 몸에 독을 주입하여 마취시키는 독거미와 같습니다. 곤충들은 혼미함 속에서 살을 파먹히지요. 어쩌면 달콤한 꿈을 꾸는지도 모르겠네요. 나는 한국 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암담함을 느껴요. 기우이기를 바라지만 무뎌진 영혼을 갈아엎고 그 속에 진리에의 열정을 파종해야 할 교회가 오히려 사람들의 영혼을 잠재우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차라리 나의 이런 염려가 근거 없는 것으로 판명될 수 있다면 춤이라도 추겠습니다. 지배에 맛들이다보면 우리는 스스로 괴물로 변하고 있음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됩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권력의 위험에 대해 이렇게 말하더군요. “채찍으로 때리는 권세에 한번 맛들인 사람, 하느님에 의해 자신과 같이 인간으로 창조된 형제들의 육체와 피, 영혼을 지배하고, 더할 수 없는 모욕으로 그들을 멸시할 수 있는 권력을 경험해 본 사람은 그 자체에 도취하게 된다. 포악함은 습관이 된다. 이것은 차차 발전하여 마침내는 병이 된다. 나는 아무리 훌륭한 인간이라 해도 이러한 타성 때문에 짐승처럼 우매해지고 광폭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모름지기 피와 권세는 인간을 눈멀게 하는 법이다. 거만과 방종이 심해지고 급기야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비정상적인 현상도 달콤하게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타인을 때릴 수 있는 권력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사회적 비리의 하나이며, 사회에 내재하는 모든 문명적인 싹과 모든 시도들을 제거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며, 사회 붕괴의 필연적이며 돌이킬 수 없는 완전한 근거인 것이다. [<<죽음의 집의 기록>>, (열린책들, 2000), 377-8쪽] 물론 우리는 사람들을 물리적인 수단을 가지고 때리지는 않아요. 그렇지만 정신적인 지배가 어쩌면 채찍질보다 더 위험한 것일 수 있지요. ‘포악함은 습관이 된다’는 말은 얼마나 적확합니까? 권력은 도취이고, 도취는 이성의 소리를 잠재우게 마련입니다. 일단 권력에 맛들인 사람들은 자기가 미망 속에 있음을 결코 깨닫지 못해요. 그들은 고통을 당하는 이들의 아픔에 공감하는 능력을 상실하게 되지요. 공감할 수 없으니 다가서 섬길 수도 없겠구요. 바울 사도는 “비천한 사람들과 함께 사귀라”(롬12:16)고 했는데, 어쩌면 그것이 우리 영혼의 타락을 막을 수 있는 길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 사랑의 레가토 이 전도사님,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특권에 익숙해지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대접받는 일에 익숙해지고, 존대받는 일이 일상이 되다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를 망각하게 되지요. 자그마한 모욕이나 무시에도 깊은 상처를 입고요. 조금 겸손해지기 위해서는 많이 모욕을 받을 필요가 있다는데, 우리는 어쩌면 겸손해지기 어려운 구조 속에서 살아가는 건지도 몰라요. 너무 도드라져도 곤란하지만 어떤 자리에서든 자기 몸을 낮출 줄 알아야 영혼의 질병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우리 사회가 스스로를 낮추는 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경향이 있는 것은 사실이에요. 어느 한적한 섬에서 목회를 하는 후배가 들려준 이야기가 기억납니다. 교우들의 오랜 염원이었던 교회 건축을 하게 되었대요. 현장 노동자들의 수고를 나 몰라라 할 수가 없어서 현장에 나가서 이런저런 허드렛일을 도왔다네요. 그랬더니 처음 며칠 동안은 아주 고마워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자기를 일꾼 부리듯 하더라는 겁니다. 안 되겠다 싶어서 현장에서 물러나 감독관의 자리로 돌아갔더니 그때서야 어려워하더래요. 그 이야기를 하면서 대체 목사가 서야 할 자리가 어딘지 모르겠다고 탄식하더군요. 도스토예프스키는 <<지하로부터의 수기>>에서 인간을 “두 다리를 가진 감사할 줄 모르는 존재”라고 정의했어요. 설명하지 않아도 즉각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말입니다. 바로 나 자신이 그러니까요. 하지만 그는 인간의 더 근본적인 결함은 “끝이 없는 무례함”이라고 말하더군요. 힘 앞에서는 머리를 조아리고 다정함과 선의 앞에서는 무례한 것이 타락한 실존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힘과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요. 우리는 내적인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힘을 타자를 억압하고 조롱하는 일에 사용하지 않고 섬기는 일에 사용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게 예수의 길이 아니겠어요? 얼마 전 덴마크 일간지 율란츠 포스텐에 실린 이슬람의 예언자 마호메트에 대한 풍자 만평 때문에 유럽과 이슬람권이 큰 갈등을 빚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이슬람은 종교적인 형상을 만들거나 그리는 것을 금지하고 있지요. 그런데 그 만평은 심지에 불이 붙은 다이나마이트를 마호메트의 터번 속에 그려 넣었습니다. 그 그림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누가 보더라도 뻔합니다. 이슬람은 테러집단이라는 것이겠지요. 이슬람권이 들고 일어서자 유럽인들은 언론의 자유를 내세우며 갈등을 증폭시켰습니다. 말하기 좋아하는 학자들은 문명의 충돌을 말합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번 사태의 본질은 언론 자유의 수호도 아니요 문명의 충돌도 아닙니다. 그것은 유럽인들이 가지고 있는 오만한 우월의식의 현시일 뿐입니다. 그들은 자신을 중심에 놓고 다른 이들을 타자화합니다. 서양 문화는 어떤 의미에서 ‘타자 만들기’ 문화라 할 수 있을 겁니다. 타자를 만든다는 것은 그들을 조종하고 지배하겠다는 의지의 반영입니다. 나와 생각이 다르고 삶의 방식이 다르고 신념 체계가 다른 이들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마음이 없다면 평화로운 세상의 꿈은 남가일몽에 지나지 않을 거예요. 우리는 가르고 나누는 세상에서 품어 안으라고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레가토(legato)’란 말 아시지요? 음악 용어인데 두 개 이상의 음을 끊지 않고 부드럽게 이어서 연주하라는 표입니다. 신앙인의 손에는 ‘사랑의 레가토’가 들려 있어야 합니다. 사람과 사람, 문화와 문화, 나라와 나라, 종교와 종교 간의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그 때문에 서로를 차별하지 않는 대동세상을 이루라고 주님은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부디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을 주는 사람이 되세요. 새 봄과 더불어 전도사님의 삶의 지평이 한층 넓어지기를 기도합니다.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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