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하늘땅사람이야기24: 합리와 정리 사이에서 2006년 01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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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리와 정리 사이에서 ■ 애집을 버리고 형, 해가 바뀌었는데도 얼굴 한번 볼 틈 없이 살고 있네요. 시간이 없다기보다는 마음의 여유가 없는 것이겠지요. 마음이 흐르는 대로 충동적으로 길을 떠날 수 있었던 젊은 날이 그립습니다. 이래저래 핀에 꽂혀 박제된 나비 꼴로 살고 있어요. 내게서 사람들이 포르말린 냄새를 맡게 되는 것은 아닌지 염려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새로 나온 시집을 보내주신다더니 감감 무소식이네요. 이제는 내가 시를 읽을 여유조차 없다고 판단하신 것은 아니지요? 시간에 등 떠밀리며 사는 나날이 참 무겁습니다. 젊은 날의 파블로 네루다의 마음이 왜 이렇게 아리게 다가오는지 모르겠어요. “나더러 어디 있었냐고 묻는다면/”어쩌다 보니 그렇게 돼서…“라고 말할밖에 없다./돌들로 어두워진 땅이라든가/살아 흐르느라고 스스로를 망가뜨린 강에 대해 말할밖에”(<망각은 없다> 중에서). 네팔 여행 중에 호수에 비친 설산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형수님이 울음을 터뜨렸다고 하셨지요? 나도 그런 울음 한번 울어봤으면 좋겠어요. 일망무제로 트인 요동벌을 보며 “좋은 울음터로다. 울 만하구나” 하고 말했다던 연암 박지원의 심정도 그런 것이었겠지요? 그는 “내가 오늘에야 비로소, 인간이란 것이 본시 아무 데도 기댈 곳 없이 단지 하늘을 이고 땅을 밟고서야 걸어다닐 수 있음을 알았다”고 말했어요. 가슴에는 대붕이 날 수 있는 하늘을 품고 있지만, 잗다란 일상의 일들과 범절에 묶인 채 살아야 했던 한 조선 선비에게 요동벌은 있음 그 자체로 깨우침이 된 셈이지요. 바다가 보고 싶습니다. 수심을 모르기에 나비는 바다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김기림의 시구처럼, 수심을 모르는 나비가 되어 저 바다로 훨훨 날아보고 싶습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나는 더 이상 떠나지 않는 정착민이 되어 살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한비야 씨가 <<중국 견문록>>에서 한 말은 더욱 아프게 다가옵니다. <완벽한 지도가 있어야 길을 떠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새로 시작하는 길, 이 길을 나는 거친 약도와 나침반만 가지고 떠난다. 길을 모르면 물으면 될 것이고 길을 잃으면 헤매면 그만이다. 이 세상에 완벽한 지도란 없다. 있다 하더라도 남의 것이다. 나는 거친 약도 위에 스스로 얻은 세부사항으로 내 지도를 만들어 갈 작정이다. 중요한 것은 나의 목적지가 어디인지 늘 잊지 않는 마음이다. 한시도 눈을 떼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그곳을 향해 오늘도 한 걸음씩 걸어가려 한다. 끝까지 가려한다. 그래야 이 길로 이어진 다음 길이 보일 테니까.> 그렇지요. 길을 모르면 물으면 될 것이고 길을 잃으면 헤매면 그만이지요. 어차피 길이란 어딘가로 통하게 마련이고, 좀 돌아가더라도 목적지에 이를 수만 있다면 조금 빨리 도착하고 늦게 도착하는 것이 뭐 그리 큰 차이가 있겠어요. 문제는 ‘로터스’ 열매를 먹고 귀향을 잊어버린 오뒷세우스의 부하들처럼 망각의 늪에 빠지는 것이겠지요. 요즘 교인들과 <전도서>를 함께 읽어나가고 있어요. 점점 치열해지는 경쟁의 한복판에서 숨가쁘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전도서는 과연 무엇일까요? 코헬렛은 해 아래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거의 ‘모든 것’에 ‘헛됨’이라는 찌지를 붙입니다. 돈도 권력도 쾌락도 인기도 지혜도 다 헛됨에게 종속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 ‘늘 그러함’이 없다는 것처럼 허망한 일이 있을까요? 그런데 코헬렛은 인생이란 그런 거니까 ‘그까이꺼 뭐 대충’(?) 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생명의 실상을 바로 보고, 애집과 집착을 버리고 오늘을 영원처럼 살라고 권고합니다. 오는 것 막을 것 없고, 가는 것 굳이 잡을 것 없이 순리에 따라 살면 참 편할 것 같아요. 사람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그렇긴 하지요, 그래도 산다는 게 어디 그렇게 단순한 건가요” 하며 웃어넘기데요. 마치 복잡하게 사는 게 거부할 수 없는 소명이라도 되는 것처럼요. 그런 걸 팔자라고 하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볕 바른 곳에 몸 두고자 하는 마음이야 모르는 바 아니지만, 분주함과 경쟁이 낳는 어둠과 그늘은 어찌하려는지…. ■ 합리와 정리 요즘 나는 합리合理와 정리情理의 경계선상에서 서성이고 있어요. 형도 아시다시피 나는 처세에 능하지 못합니다. 종종 융통성이 부족하다는 말을 듣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원리원칙주의자인 것은 아닙니다. 다만 ‘좋은 게 좋은 거지’ 하며 적당히 타협하며 살고 싶지 않을 뿐입니다. 20여 년 전 군목으로 전방에서 근무하고 있을 때의 일이 생각나네요. 어느 날 군단의 군종참모로 있던 학교 선배가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얼굴은 한 두 번 본 적이 있지만 개인적인 친분이 없는 분이었습니다. 이런저런 안부를 묻더니 내게 한 가지 부탁할 게 있다고 말했습니다. 자기가 잘 아는 분의 자제가 우리 부대에 배치를 받게 되었는데, 사회에서 신앙생활을 착실히 하던 친구이니 군종병으로 받아줄 수 없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김목사가 그렇게 해주면 그 은공은 잊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나는 치밀어오르는 화를 삼키면서 절차를 무시한 그런 사적인 부탁은 들어드릴 수 없다고 정중하게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선배는 인생을 그렇게 빡빡하게 살면 안 된다며 긴 훈계를 늘어놓았습니다. 나는 예의상 수화기를 내려놓지는 않았지만, 그 선배에 대해 가졌던 평소의 호감을 접고 말았습니다. 물론 나중에 그 선배와 대면할 때 불편했던 것은 사실이지요. 한번은 교회 사무실에 앉아 있는데, 낯모르는 분이 찾아와서 저와 잠시 만나고 싶다고 했습니다. 나는 내 앞에 단정하게 앉는 젊은 부부가 신앙상담을 하기 위해 찾아온 사람이겠거니 하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그가 자기 명함을 내게 내밀었습니다. 그 명함을 보는 순간 나는 “아, 아무개 씨네요? ○○○○ 책을 쓰신 분 맞지요?” 하고 물었습니다. 그는 전도유망한 국문학자였고, 나는 그분의 책을 두 권이나 읽었던 터였습니다. 형도 이름을 들으면 알만한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를 알아보는 목사가 있어 놀랐고, 나는 유려한 문체와 분명한 자기 입장을 가진 한 국문학자가 내 앞에 있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그런데 그가 나를 찾아온 자초지종을 밝혔을 때 나는 일순 당황했습니다. 기독교 계통의 한 대학 교수 모집 공고가 나서 서류 작업을 하고 있는데, 교인증명서가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지금 교회에 다니고 있지 않지만 청년 시절까지는 교회를 다녔고, 교인 증명서를 만들어 주면 다음 주일부터 아내와 함께 교회에 출석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예의를 갖춘 채 그의 제안을 정중하게 거절하였습니다. 그로써 나는 그와 교제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습니다. 나의 매정한 거부가 그에게 상처가 되지 않기를 기도했습니다. 이런 태도 때문인가요? 나는 어느 집단에 가도 조금은 불편한 사람으로 인식되고 있어요. ‘너만 의롭냐?’ 동료들의 눈빛에서 이런 말을 헤아릴 때마다 나 자신도 편치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처럼 연고주의가 판을 치는 곳에서는 ‘합리’라는 가치를 견지하는 사람도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위안거리로 삼곤 해요. 학연․지연․혈연에 따라 세상 일이 이루어진다면 그런 관계의 그물망 밖에 머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내면에 드리우는 그늘은 어떻게 해야 하나요? 교역자들조차 어느 신학교 출신이냐에 따라 친소 관계가 갈리는 경우를 종종 목격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 사이에 있는 분리의 담을 헐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는데, 주의 이름으로 모이는 이들이 오히려 분리의 장벽을 높이 쌓아가는 것은 부끄럽기 이를 데 없는 일 아니겠어요? 공적인 일에는 ‘정리’보다는 ‘합리’라는 척도가 사용되어야 할 겁니다. ■ 주체적 정신이 설 자리 그리스 사람들은 도심 중앙의 광장을 뜻하는 ‘아고라’(agora)에 모여 공동체의 문제를 논의하였습니다. 그곳은 어떤 견해라도 개진될 수 있는 열린 광장이었습니다. 적어도 그들은 공적인 일을 밀실에서 처리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아고라의 주인은 ‘로고스’였습니다. 조직이나 집단에 대한 충성이나 귀속감이 로고스를 억압하는 곳에서는 주체적인 정신이 발생할 수 없습니다. 서열관계를 중시하는 집단 속에서 합리적 사고를 하는 사람은 버르장머리 없는 사람으로 인식되기 일쑤이고, ‘조직의 쓴 맛’을 볼 때가 많습니다. 우리 사회는 주체적 정신이 설 자리를 허용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주체적인 정신이 보편적인 정신에 동참하지 못한 채 사사로운 ‘우리’ 속에 함몰될 때 영혼의 타락은 불 보듯 뻔한 일입니다. 우리 사회의 혼돈과 미성숙의 뿌리는 주체적 정신을 허용하지 않는 편협함에 있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다양한 견해가 충돌할 때 사람들은 그 충돌이 빚어내는 광휘를 보려 하기보다는 대립되는 요소들을 재빨리 해소하고 지양하는 것을 목표로 삼기 일쑤입니다. 우리가 자아의 한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나와 다른 견해를 가진 이들의 입장으로 건너가려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소수 의견이 묵살되거나 냉소에 부쳐지는 까닭은 그것이 무가치한 것이거나 그릇된 것이어서가 아니라 불편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상처받기 싫은 사람들은 주류에 속한 사람들의 처신을 속으로 비웃으면서 공론의 장에서 입을 다물어 버리고 맙니다. 그러면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은 이견이 해소되었다고 좋아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신뢰의 터전이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음을 보지 못합니다. 물론 복잡한 세상사가 합리의 틀 속에 온전히 녹아들 수 없다는 것쯤은 나도 압니다. 오죽하면 터툴리아누스가 ‘불합리하기에 믿는다’고 말했겠어요. 세상에는 설명될 수 없는 일들이 참 많지요. 욥의 고난은 설명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합리’의 배를 타고 건너기엔 삶의 너울이 너무 압도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리’의 배 한 척을 더 마련하고 살아갑니다. 탕자의 귀환을 반기는 아버지의 태도는 합리가 아니라 정리이겠지요. 상처 입은 사람들을 보듬어 안는 예수의 다정함은 합리적인 태도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 미쉬팟과 쩨다카 사실 그의 백성을 품어 안는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의 다정함은 ‘정리’라는 말에 담아낼 수는 없는 것 같아요. ‘합리’와 ‘정리’라는 말을 종교적으로 확장하면 ‘미쉬팟’(mishpat)과 ‘쩨다카’(tsedakah)라는 개념과 통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어요. 미쉬팟이란 재판관이 내린 판결을 뜻한대요. 그러니까 정의, 규범, 법령, 법적 권리, 법률이라는 뜻을 포함하는 것이지요. 미쉬팟을 굳이 번역하자면 ‘정의’(justice)가 되겠지요. ‘의’(righteousness)로 번역될 수 있는 쩨다카는 박애, 친절, 관용 등 인격의 질을 의미하는 것이래요. 그러니까 정의는 법적인 것이라면, 의는 억압받는 자에 대한 애타는 동정과 연결된 것이라는 거지요(아브라함 요수아 헤셀, <<예언자들>> 참조). 성경에서 이 두 가지는 별개의 것이 아니지요. 정의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에 대한 편들기에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늘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들에 대한 자비로 기울었으니 말입니다. 1998년 추석 무렵으로 기억해요. 신문 사회면에 실린 기사를 보면서 나는 미쉬팟과 쩨다카라는 말이 어떻게 결합되어야 하는지를 실감하게 되었어요. I.M.F 구제금융 시대가 열리면서 많은 가정들이 해체되는 비극이 벌어졌지요. 이야기의 주인공도 그런 이들 가운데 하나였어요. 남편의 실직에 따른 경제고에 시달리던 아내는 아이들 둘을 놔두고 집을 나갔어요. 남편은 당장 취직을 해야 했지만 아이들 때문에 직장을 잡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아이들을 기관에 맡겼지요. 아빠와 떨어지기 싫다고 울부짖는 아이들에게 아빠는 추석 때가 되면 예쁜 인형을 사가지고 돌아오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피눈물을 흘리며 고아원을 빠져나온 그는 백방으로 직장을 얻으려고 애썼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결국 노숙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시련의 시간이었지요. 그런데 아이들과 약속했던 추석이 다가왔어요. 하지만 그는 여전히 빈털터리였습니다. 그는 아이들에게 가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다가 가게에 들어가 인형을 훔치다가 주인에게 적발되어 경찰에 넘겨졌습니다. 경찰관들은 조서를 작성하다가 저간의 사정을 다 듣게 되었습니다. 법을 집행하는 이로써 그의 명백한 잘못에 눈을 감아줄 수는 없었기에 경찰관은 그를 입건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과 아빠의 약속도 소중했기에 그는 자기 돈으로 인형을 사서 그것을 그 불행한 남자의 손에 들려 고아원으로 보냈습니다. 나중에 그는 약식재판을 받고 풀려났다고 해요. 공정한 법의 집행을 위해 그 불행한 남자를 입건한 것이 ‘미쉬팟’이라면 인형을 사서 아빠와 아이들이 만나도록 배려한 행동은 ‘쩨다카’가 아닐까요? 어쩌면 내 멋대로의 해석인지도 모르겠네요. 합리와 정리 사이에서 서성이다가 엔도 슈사쿠의 <<사해의 호반>>을 다시 꺼내 뒤적였어요. 거기서 작가는 예수의 입을 빌어 이렇게 말하더군요. “이웃을 위해 울어주는 일, 죽어가는 자의 손을 하룻밤 잡아주는 일, 나 자신의 슬픔을 참아내는 일, 이것만도…다윗의 성전보다도 과월절보다도 위에 있다.” 작가는 대사제 안나스의 입을 통해 예수의 지향을 인상 깊게 드러냅니다. <목수가 하는 말에 따르면 하나님은 성도 예루살렘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다윗 성전이나 엄숙한 율법 등은 하나도 대수롭게 여기지 않으신다. 하나님이 마음속으로 바라는 것은 인간뿐이지, 황금으로 세워진 성전은 아니다. 하나님은 그런 것보다도 창부의 눈물 한 방울을, 라삐의 말보다도 어린아이의 웃음을 훨씬 더 원하고 계신다라고까지 말했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그는 어제도 실로암 연못 근처에서 순례자들이 던진 돌에 맞아 이마에 피를 흘리면서 사슬문에서 쫓겨났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죄는 무감각이 아닐까요? 이웃의 고통에 대한 무감각 말입니다. 교회를 짓기 전에 먼저 빈민가에 가서 그들의 눈이 무엇을 말하는지 들으라고 했던 간디의 말은 무엇이 중심이고 무엇이 주변인지를 잘 드러내고 있는 것 같아요. 기우이기를 바라지만 나는 오늘의 교회가 ‘말末’을 취하느라고 ‘본本’을 소홀히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예수 정신이 사라진 교회는 ‘신의 무덤’일 뿐이지요. ■ 수졸 나는 언젠가 만난 수졸守拙이란 말을 참 좋아해요. 졸拙한 것은 교묘한 것의 반대이니 수졸이란 조촐함을 지켜가는 것이겠지요. 세상에는 참 영악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때그때 입장을 바꾸고 이익에 따라 남에게 해를 입히고 속이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사람들 말입니다. 졸함을 지킨다는 것은 부끄러움을 간직하는 것이래요. 가지 말아야 할 길은 가지 않는 것이지요. 남은 속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차마 자기를 속일 수는 없어서 불이익을 감수하는 마음, 그게 졸의 길이라면 나는 그 길을 가고 싶어요. 업적주의에 사로잡힌 일부 과학자들이 만들어낸 광풍으로 정신이 산만합니다. 어리석음을지킨다는 뜻의 이름을 가진 김수우 시인의 <저력>이라는 시를 가만히 읊조려봅니다. 태풍이 지나간 숲 풀벌레 울음 가득, 차오른다 숙일대로 숙였던 풀잎들이 낮을대로 낮게 웅크렸던 베짱이며 철써기들이 다시금 나무를, 나무의 어둠을 일으키는 소리 한번 더 숲을, 숲의 뒷벽을 세우는 소리 고요하다 투명하다 앙금 진한 울임이 별을 띄운다 폭풍에 떠밀린 수천 톤 유조선 위로 별이 맵다 흔들어보아야 알게 되는 낮은, 힘. 형이 언제나 그 자리에 있어 늘 마음 든든합니다. 하늘이 사랑하는 이에게만 허락한다는 한가로움을 한껏 맛보시고, 아우에게도 조촐한 기쁨을 나눠주세요.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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