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하늘땅사람이야기23: 삶터를 도량 삼아 2005년 12월 13일
작성자
삶터를 도량 삼아 ● 새해 첫 기적 날이 무척 차갑습니다. 정 선생님이 이 편지를 받으실 때쯤이면 새해가 기적처럼 우리 앞에 당도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해가 바뀔 때마다 나누었던 인사를 드립니다. “새해에는 복되게 사십시오.” 때로는 이 말이 너무 강박적인 것이 아닌가싶어 꺼려지기도 했지만, 우리 삶을 곧추세우자는 다짐이 그 속에 담겨있다는 생각에 올해도 이런 인사를 건넵니다. 우리의 속사람이 달라지지 않는다면, 달력을 바꾸고 수첩의 전화번호부를 정리한다고 하여 시간이 새로워지겠습니까만, 그래도 새해는 설렘으로 다가옵니다. 반칠환의 <새해 첫 기적>이라는 시를 읽다가 혼자 웃었습니다. 황새는 날아서 말은 뛰어서 거북이는 걸어서 달팽이는 기어서 굼벵이는 굴렀는데 한날 한시 새해 첫날에 도착했다 바위는 앉은 채로 도착해 있었다 사람들이 제 아무리 빠름을 자랑하고, 남보다 앞서려고 좌충우돌해보아야 새해 첫날에 도착하기는 마찬가지네요. 새해 첫날은 그래서 기적이군요. 새해 첫날만 그렇겠습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날들이 기적이지요. 앉은 채로 도착한 바위가 부럽지만, 그럴 근기가 없으니 굼벵이처럼 구르기라도 해야 할까봅니다. 새해 교회 달력 하나를 함께 보냅니다. 강원도 서강(西江) 가에 사는 어느 눈 맑은 분이 찍은 이슬 사진이 담겨있는 달력입니다. 저는 그 영롱한 이슬방울에 비친 산과 강 그리고 꽃망울을 보면서 모래 한 알 속에서 우주를 본다는 윌리엄 블레이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한 호흡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그 사진은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나무의 호흡이 없다면 우리의 호흡은 불가능할 겁니다. 내 몸을 통과해 나간 호흡이 ‘너’의 몸으로 흘러 들어가 생명의 기운이 됩니다. 이천식천(以天食天), 곧 생명은 생명을 먹고 사는 것이라지요? 그렇다면 생명은 빚짐이고, 고마움이 그 본질일 겁니다. 너 없는 나 없고, 나 없는 너도 없습니다. 생명은 이처럼 인연의 끈으로 촘촘하게 엮여 있습니다. 이 사실이 망각된 것이 우리 시대의 불행입니다. 하이데거가 말한 ‘존재 망각’이란 결국 생명의 전체성에 대한 자각의 상실이 아니겠습니까? 옛 사람들은 수령이 오래된 나무 한 그루를 베어내기 전에 도끼를 그 나무에 기대놓고 술을 따라 예를 올렸다지요? 그것을 비이성의 마술동산에 살던 이들의 어리석음으로 보는 사람은 정작 볼 눈이 없는 사람입니다. ● 개체를 넘어서기 위한 싸움 정 선생님, 사람들은 삶을 보이지 않는 전선(戰線)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늘 승리와 패배의 경계선에서 긴장한 채 살아갑니다. 비스듬히 기댄 채 살아가야 할 사람들이 무한경쟁의 싸움터에서 대치하고 있습니다. 경쟁에는 승리자와 패배자가 갈리게 마련입니다. 세상은 승리자들에게는 눈길을 보내지만 패배자들에게는 눈길을 보내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다 씁니다. 이런 세상에서 행복은 신기루일 뿐입니다. 바깥세상에서는 전쟁이 벌어졌는데, 배 안에서 농구 경기를 즐기며 “괜찮아, 계속 해. 우리는 타지 않아”라고 말하는 텔레비전 광고가 있습니다. 이런 세상은 있을 수 없습니다. ‘기껏해야 광고에 지나지 않아’ 하고 스스로를 위로해보기도 하지만 그 카피가 세태를 정확히 반영하고 있는 것 같아 씁쓸합니다. 저도 세상은 보이지 않는 전선이라는 말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남과의 싸움이라기보다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터입니다. 사람됨이 도전받고 있는 세상이니 말입니다. 바가바드 기타의 첫 대목을 기억하시지요? 쿠루족과 판두족이 크루크셰트라(Kurukshetra) 들판에서 대치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들판을 ‘올바름의 들’이라고 부릅니다. 그 현장에서 판두족의 장수인 아르주나는 갈등에 빠집니다. 적이라고는 하지만 쿠루족은 가까운 일가붙이들입니다. 그들의 모습을 보는 순간 그는 맥이 풀리고 맙니다. 그들을 죽이고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느냐면서 그는 전장에서 물러서려 합니다. 하지만 크리슈나는 아르주나에게 이상과 정의를 위해서는 고통과 죽음을 받아들이는 힘으로 압박자에 맞서 일어서야 한다고 말합니다. 아르주나는 아직 자기의 개체에 집착하기에 의로운 싸움을 외면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원수가 자기 가족 가운데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도 바로 이런 실존의 궁지를 가리키기 위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새해에는 치열한 싸움꾼이 되고 싶습니다. 다른 이들과 싸우는 싸움꾼 말고 개체적 이익에 집착하고 안락을 구하는 나 자신에 맞서 싸우는 싸움꾼 말입니다. 제가 이 길로 접어든 것은 그 싸움을 치열하게 하자는 것이었는데, 로터스를 먹은 오뒷세우스의 부하들처럼 가야 할 길을 잊은 채 안락에 잠겨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대로 괜찮은 사람’이라는 사람들의 헛된 평판에 안주한 제가 부끄럽습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지혜의 여신 아테나는 제우스의 머리에서 뛰쳐나왔습니다. 아테나의 최초의 행동은 전투였습니다. 지혜는 자기 속에 서 솟아나는 오류와 거짓에 맞서 저항할 때 자랍니다. 맹렬하게 저항하지 않는 순간 우리는 이미 그들의 손아귀에 투항한 셈입니다. 물론 이 싸움의 무기는 부드러움이어야 합니다. 야스퍼스가 말한 ‘사랑하면서의 싸움(liebende Kampf)’이 뜻하는 바도 이런 게 아닐까 싶습니다. 치열하게 싸우면서도 스스로 경직되지 않기 위해서는 자꾸 원점으로 돌이키는 수밖에 없겠지요? ● 온 마음을 다해 현실을 보라 어제는 이미 지나간 것이고 내일은 아직 오지 않은 것이니 우리의 삶이란 지금 여기에서의 삶 밖에는 없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현재의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밥을 먹을 땐 맛있게 먹고, 잠을 잘 때는 달게 자고, 일을 할 때는 신명나게 하고, 쉴 때는 마음 편히 쉬는 사람 말입니다. 내 삶이 지지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을 때마다 떠올리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시디즘의 한 신비가가 제자들과 함께 여행을 하고 있었답니다. 어느 여인숙에 도착한 그들은 그곳에서 하룻밤을 쉬고 아침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여인숙 주인이 와서 아침식사와 함께 차를 대접했습니다. 그들이 차를 마시고 있을 때 갑자기 여인숙 주인이 황홀경에 빠져 그 신비가의 발 아래 엎드려 울기도 하고 웃기도 했습니다. 제자들은 당황했습니다. 어떻게 이 사람이 스승을 알아볼 수 있을까 저마다 의아해 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비밀로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걱정이 되어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지만 아무도 그 사실을 발설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때 스승이 말했습니다. “당황해 하지 말아라. 이 사람에게 직접 물어보아라. 아무도 그에게 비밀을 말해주지 않았지만 그는 나를 알아보았다.” 그래서 그들은 여인숙 주인에게 물었습니다. “우리들 자신도 스승 밑에서 여러 해를 살아왔지만 그가 진정한 스승인가를 늘 의심해왔답니다. 그런데 당신은 한낱 여인숙 주인에 불과하면서 어떻게 그를 알아보셨습니까?” 그러자 여인숙 주인이 말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에게 아침식사와 차를 대접했습니다. 지금까지 나는 수 백명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러나 이 분처럼 깊은 사랑을 가지고 찻잔을 바라보는 이를 나는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그를 알아볼 수밖에요. 그동안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이곳을 거쳐갔지만 마치 연인을 바라보는 것처럼 깊은 사랑을 가지고 찻잔을 바라보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답니다.” 마르틴 부버가 들려주는 이 아름다운 이야기는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엊그제 저는 교인들에게 예수에게는 ‘다음에’란 말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상황의 좋고 나쁨을 떠나서 당신 앞에 있는 사람의 가슴에 생명의 싹을 틔워주기 위해 애썼습니다. 당신 앞에 있는 사람이 예수에게는 가장 소중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랑은 계산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지요? 그렇지요. 계산이 개입되는 순간 사랑은 변질되게 마련입니다. 예수는 계산 없이 사랑하는 분입니다. 예수는 우리를 그런 자리에 부르고 계십니다. 한마디로 혁명을 하자는 것이지요. 돌아가신 장일순 선생님은 “혁명이란 따뜻하게 보듬어 안는 것”이라고 하셨는데, 이 말처럼 예수의 삶을 잘 요약한 것을 저는 보지 못했습니다. 찻잔조차도 연인을 바라보는 것처럼 깊은 사랑을 가지고 바라보는 하시디즘의 신비가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면 세상은 신비 그 자체일 것입니다. 해야 할 중요한 일이 따로 있고, 소홀히 해도 좋은 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겠지요? 저는 새해에는 사소해 보이고 일상적인 일들에 더욱 공을 들여야겠다고 다짐합니다. 그것이야말로 나를 영원의 문턱으로 데려가는 뱃사공일 터이니 말입니다. ● 삶터가 곧 도량 오늘 저는 아내와 가까운 산에 올랐다가 집 가까이에 있는 한 자장면 집에 들어가 저녁을 먹었습니다. 얼마 전 신문에 소개된 곳이어서 꼭 한번 들러보고 싶었던 곳입니다. 미식가가 못되는 사람이 웬일인가 싶으시지요? 사실 저는 맛있는 음식을 탐하여 그곳에 갔던 것은 아닙니다. 고집스럽게 자기 원칙을 지키며 살아가는 한 소박한 시민을 보고 싶었을 따름입니다. 그는 투자를 할 테니 가게를 확장하자는 돈 많은 이들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고 합니다. 손님이 많아지면 기계로 뽑은 면을 슬쩍 섞게 된다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모자가 벗겨질 정도로 세찬 바람이 부는 추운 겨울날, 이게 무슨 청승인가 하면서도 그 가게를 찾은 이유를 아시겠지요? 가게 문에는 이런 글귀가 붙어 있었습니다. “지구촌에 살고 있는 어떤 사람이라도 단 한 그릇 먹어보고 눈물을 흘려줄 음식을 내 혼신의 힘을 다하여 만들고 싶다. 21세기가 기다리고 있기에…. 1988년 10월. 이문길”. 빙그레 웃으며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서니 내 나이 또래의 중늙은이 한 사람이 식탁에 앉아 뭔가를 쓰고 있다가 반겨주더군요. 초면이었지만 대뜸 물었습니다. “뭘 하고 계세요?” “예, 초등학생들이 보내온 편지에 답장을 쓰고 있어요.” “학생들이 편지도 보내나 보네요.” “글쎄 저도 27년 전 군대에서 받아본 위문편지 말고는 이런 편지를 처음 받아봐요.” “아이들이 뭐라고 썼어요?” “한번 보세요.” 저는 그분이 내미는 편지 몇 장을 받아들고 눈으로 살폈습니다. 초등학교 저학년 학생임이 분명한 한 아이는 기계로 뽑아도 자장면은 맛있는데 왜 아저씨가 수고스럽게 손으로 면을 뽑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게 좋으면 그렇게 하시라면서, 술과 안주를 팔지 않는 것은 참 잘하는 일이라고 점잖게 말했습니다. 다른 아이는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가끔 다투기도 하신다지요? 두 분이 싸운다는 사실이 신문에까지 나오면 조금 창피한 거니까 앞으로는 싸우지 마세요” 하고 충고한 후에 한 가지 훈계까지 하더군요. “싸울 땐 싸우더라도 먼저 양보하는 사람이 사실은 이기는 사람임을 잊지 마세요.” 내가 그 맹랑한 충고에 감탄하며 편지를 돌려드리자 아저씨는 혼잣소리처럼 말하시더군요. “아이들이 어른의 스승이에요.” 우리가 자장면을 먹는 동안 아저씨는 옆 테이블에 앉아 진지한 표정으로 답장을 쓰고 있었습니다. 음식을 다 먹고 나서도 그의 글쓰기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저는 조용히 앉아 있었습니다. 그는 성사를 집례하는 사제처럼 엄숙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마침내 편지쓰기를 마쳤을 때 나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물었습니다. “싸우지 말라는 아이에게 뭐라고 쓰셨어요?” 그는 또 다시 편지를 내게 내밀었습니다. 내용은 간단했습니다. 고마운 충고를 잘 받겠다는 대답과, 자장면 아저씨는 자장면을 잘 만들기 위해 노력할 테니 학생은 열심히 공부해서 나라를 빛내자는 내용이었습니다. 소박하지만 가슴 뭉클한 내용 아닌가요? 아저씨의 답장에는 유교가 말하는 정명(定名) 사상이 반영되어 있는 것 같았습니다. 공동체의 각 구성원이 자기에게 주어진 명칭에 따라 고유한 권한과 책무를 제대로 이행해야 바른 세상이 열릴 것입니다. ● 일래버레이션 공자는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자식은 자식답고,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운 사회를 꿈꾸었습니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답다’는 접미사는 “일부 체언 밑에 붙어서, 그 체언이 지니는 성질이나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뜻의 형용사를 만드는 말”이라고 설명하고 있더군요. 사실 세상의 혼란은 ‘이름’이 바로 서지 않은 데서 오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물론 ‘이름’에 대한 이해는 저마다 다른 것이 현실입니다. 사람들은 어떤 직책을 특권으로 받아들이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공항의 귀빈실로 안내하지 않는다고 호통을 치는 국회의원이나, 어떤 모임에서 자기에게 축사도 시키지 않는다고 하여 선배의 얼굴에 맥주를 끼얹은 국회의원에 대한 보도를 본 적이 있습니다. 자기는 특별하다는 생각이야말로 어쩌면 사탄의 올무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겸손해 보이던 어느 성직자가 보라색 셔츠를 입은 감독이 되자 거드름을 피우듯 말하는 모습을 보면서 저는 높은 자리가 자칫하면 영혼의 무덤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눅12:48)이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자리를 탐하는 이들은 이 말씀을 미간에 붙이고 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새해가 된다고 세상이 새로워질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맥을 놓은 채 살 수는 없습니다. 어떤 희망을 향해 ‘예’라고 말하지 않는다면 우리 마음이 한결 어두워질 테니 말입니다.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을 밤이면 밤마다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고 노래했던 윤동주처럼 우리 영혼에 끼어든 허영심을 닦아야지요.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인 오에 겐자부로는 자기의 글쓰기를 ‘일래버레이션elaboration'이라는 한 단어로 요약했습니다. ‘정교화’라고 번역될 수 있는 이 단어는 ‘밖을 향해’라는 뜻의 ‘e-’와 ‘활동한다, 만들어낸다’는 뜻의 ‘labor’가 결합된 것입니다. 오에 겐자부로는 그것을 ‘노작勞作’이라고 옮기기를 원합니다. 그는 글 뿐만 아니라 인격도 일래버레이션을 통해 최고에 이르러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삶의 태도와 방식을 돌아보며 그것을 공들여 가다듬는 수고를 하지 않고는 새 사람이 될 수 없을 터입니다. 삶의 핵심은 미시적인 현실에 있는 것이라지요? 가까이에 있는 이들을 소홀히 대하면서 큰 일을 꿈꾸는 이가 있다면 그는 몽상가이거나 매우 위험한 사람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미성년>>에서 기독교인들은 온 세상 사람들은 사랑하지만 정작 가장 가까이 있는 이들은 사랑하지 못한다고 썼습니다. 가까이 있는 이들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불편을 감내해야 하고, 마주침에서 비롯되는 감정적 일렁임을 다스릴 수 있는 역량이 필요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사랑을 회피합니다. 하지만 사랑을 회피하고는 사람이라 할 수 없지요. 사랑은 사람됨의 핵심이고, 사람됨(being human)을 포기하고는 사람(human being)이 될 수 없으니 말입니다. 새해에는 정 선생님도 관찰자와 성찰자의 자리에서 조금쯤 벗어나와 이웃들의 삶의 자리에 다가서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땀내음이 배어있고, 욕망의 숨결이 거친 그곳에서 생의 보화를 건질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저도 이름값을 하며 살기 위해 애쓰겠습니다. 부득이하게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던 이름에 걸맞게 삶려고 애쓰다보면 비애가 깊어질까요, 아니면 기쁨이 찾아올까요? 둘 다일 가능성이 많지만 이제는 어느 것도 회피하지 않으렵니다. 먼 곳에 계시지만 늘 든든합니다. 마음을 나눌 벗이 있다는 사실이 참 행복합니다. 다시 한번 ‘복된 삶’을 기원합니다. 평화!!
목록편집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