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몸을 통해 신성의 불꽃을 보다 2005년 12월 0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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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을 통해 신성의 불꽃을 보다 ―<목사 고진하의 몸 이야기> 서평 고진하는 욕심이 많다. 목사이면서 잘 알려진 시인이고, 대학에서는 문예창작과 학생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치는 교수이다. 그는 느릿느릿 걷고 느릿느릿 말한다. 개량 한복을 입고 화가들이 주로 쓰는 모자를 쓴 채 천으로 만든 배낭을 짊어지고 세상에 급할 게 하나도 없다는 태도로 걷는 그의 모습은 영락없는 거사(居士)이다. 그는 오솔길을 좋아하고, 소나무를 좋아한다. 그래서 그는 명상가이고 신비가이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세상을 보며 싱글벙글 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의 내면은 고요하면서도 치열하다. 그는 듣는 사람이고, 보는 사람이다. 그에게 세상의 모든 사물과 사건들은 초월자의 암호이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그는 암호해독에 몰두하고 있다. 그는 가난하다. 그래서 부자다. 필요한 만큼만 벌고, 있는 만큼 즐겁게 산다. 없으면 허허 웃으면 그만이다. 그는 뭔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인다. 누구를 대하든 방어적인 태도가 없다. 아집에 따라 사람을 가르려 하지 않는다. 허물을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사귐을 가로막는 장애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수행자이다. 그의 마음 공부는 그래서 철저하다. 책읽기에도 공을 들이지만 자기 응시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 경전 공부에 남다른 공력을 들이는 까닭은 경전 속에 길이 있음을 믿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경전 공부는 성경에 머물지 않는다. 힌두교와 불교의 경전도 그의 손이 닿는 곳에 놓여 있다. 그의 마음 공부가 마침내 몸 공부에 도달한 모양이다. <<목사 고진하의 몸 이야기>>는 그 공부의 결과물이다. 그가 새삼스럽게 몸 공부를 시작한 것은 몸의 비명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는 나이 탓이겠지만, 삶과 유리된 생각의 허구성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때문이리라. 그가 몸 공부에 돌입한 계기는 춘천에서 만난 마임 배우 유진규 선생과의 문답이 아니었을까? 그는 이렇게 물었다. "선생께서는 다면(多面)의 얼굴을 연출할 수 있는 마임 배우인데, 개인적으로 감정이 상해 있는 상태에서도 원하는 얼굴 표정을 연출할 수 있어요?" 이 느닷없는 질문에 유진규는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대답했다. "할 수는 있지요. 하지만 마음을 비우지 않은 상태에서 어떤 얼굴 표정을 연출하면, 몸의 어떤 부분인가가 거짓 표정을 드러내지요…바디 랭귀지(body language)는 못 속여요. 몸은 우리 마음보다 현명하거든요"(209쪽). 그는 몸이 내는 나직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소홀히 해왔던 몸의 각 지체들에게 견성(見性)의 눈길을 보낸다. 몸은 한 사람이 살아온 삶의 무늬가 다채롭게 아로새겨진 기억의 저장소이다. 몸에 나있는 상처마다 저마다의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고, 깊게 패인 주름살 하나마다 신산스런 삶의 이력이 묻어난다. 하지만 고진하에게 있어서 몸은 '신의 지문'이 묻어 있는 장소이다. 그렇기에 그의 몸 탐구는 생물학적인 것에 머물 수 없다. 그는 몸의 상징성에 주목한다. 현상의 갈피를 헤아려 '뜻'을 찾는 선비들처럼 그는 몸이 보내오는 신호를 들으며 신의 세계와 내통하기를 꿈꾼다. 우리의 개별적 몸은 기껏해야 백 년 안팎의 역사를 갖고 있을 뿐이지만, 몸 그 자체는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시인 김수우는 "나는 오랫동안 내 몸에서/억만 년 전의 붉은 꽃씨와/발자국화석과 퇴적지층을 보았습니다"라고 노래했다. 소라껍질을 귀에 대고 대양의 소리를 듣는 것처럼 몸의 말에 귀를 기울임으로 고진하는 시원의 소리를 듣고 싶어한다. 그가 몸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자 세계 여러 나라의 신화와 설화 그리고 각 종교의 경전에 등장하는 이야기들이 앞다투어 그의 길잡이를 자처하고 나섰다. 스승의 발치에 앉아 귀를 기울이는 제자처럼 그는 몸을 스승으로 삼아 몸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인간의 손은 타인과 만나는 중요한 매개이며, 숱한 만물과 접촉하는 수단이며, 나아가 인간의 삶을 삶답게 만들어 가는 신성한 도구이기도 한 것이다."(16쪽) 그에게 손은 "영혼과 영혼을 이어주는 가교"이다. 욕심의 비늘에 덮여 마땅히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는 눈의 열림을 소망하면서 그는 "마음눈이 열리면, 나와 타자 사이의 견고한 울타리가 허물어져 서로 사랑의 숨결을 나눌 수 있으며, '나'라는 존재가 홀로 독립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우주 만물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볼 수 있는 것"(40쪽)이라고 말한다. 입에 대한 명상을 하면서 그는 아귀병 든 에뤼식톤의 후예인 우리의 자화상을 본다. 그리고 '먹는 존재'에서 '먹히는 존재'로 화한 예수의 지고한 사랑을 떠올린다(96쪽). 두 번의 박동 사이에 아주 짧은 순간 동안의 휴식을 즐긴다는 심장에 대한 명상을 통해서 노동과 휴식 사이를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121쪽). 신이 우리에게 조금 남겨주신 어머니인 배꼽은 "우리가 우주의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나게 하신 생명과 사랑의 모태에 닿아 있음을"(150쪽) 거듭 상기시킨다. 피에 대해 묵상하면서 그는 '創' 자에는 '상처'란 뜻과 '창조'란 뜻이 동거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예수의 혈관 속에 흐르는 창조주의 젊음인 피가 왜 이 척박한 대지에 흐를 수밖에 없었는지를 자각한다(158쪽). 뼈에 대한 묵상 끝에 그는 "뼈가 무너지면 생명의 존엄과 광휘도 무너진다. 뼈가 무너지면 마음과 이성도, 상호 소통의 수단인 언어도 무너진다. 뼈가 무너지면 자기를 있게 한 생명의 주재(主宰)도 알아보지 못한다"(200쪽)고 말한다. 그는 사제가 되어 등골이 무너진 세상, 에스겔의 마른 뼈의 골짜기에 불어왔던 생기가 이 땅에도 불어오기를 갈망한다. 현대 세계에서 몸은 철저히 육체로 전락했다. 인간과 몸의 관계를 결정하는 것은 선험적인 형태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에 따라 변화하게 마련이다. 자본주의는 사람들을 육체를 매개로 한 사회적 활동에 따라 서열화했으며, 소비주의라는 미시적 권력은 노동을 도구화함으로써 몸의 소외를 재촉했다. 그 결과 몸은 그 본래적 위상을 박탈당한 채 성적 쾌락의 거점으로 대상화되고 관리되고 상품화되었다.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육체교 신자가 되고 있다. 신성함을 잃어버린 채 균질화된 몸은 타자의 시선 앞에서 물화(物化)되고, 타자의 폭력이 행사되는 장으로 추락하기도 한다. 고진하의 몸 공부가 우리에게 소중한 것은 그가 신의 지문이 새겨진 몸의 복권을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성한 불꽃을 간직한 몸의 본래성에 눈뜨는 것이야말로 신의 현존 앞에 다가설 수 있는 첩경임을 그는 확신하고 있다. 고진하에게 있어서 몸은 우주의 중심으로 통하는 비의의 문이고, 이웃들의 세계로 나아가는 길이다. 몸은 신성의 불꽃을 간직한 성전이고, 자비의 샘터이다. 그가 이 책의 각 장 앞에 그린 그림들은 무의식 속에서 들려오는 몸의 소리에 색채와 형태를 부여한 것이다. 남에게 내보이기 부끄러울 수도 있겠으나 그는 있는 그대로의 자기를 드러내 보이고 싶어한다. 자신의 '열등한 부분'을 고쳐나가는 일을 남은 생의 과제로 삼았기에 가능한 일이다. 고진하의 글은 어렵지 않다. 가끔은 무릎을 치게 만들고, 가끔은 숙연하게 몸을 응시하게 만든다. 일상의 이야기와 깊은 통찰이 버무려진 사유의 성찬을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만끽했다. 아쉬움도 있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가 몸을 얼마나 치밀하게 통제하고 조작하고 있는지에 대해 정치하게 분석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은 그의 몫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가 차린 성찬을 대하는 사람들은 몸에 대해 저질러온 불경에 대해 반성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우리를 다음과 같은 선택 앞에 세우고 있다. "우리가 창기의 몸이 되느냐 신의 영을 모신 존귀한 몸이 되느냐는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다. 귀천(貴賤)이 우리의 몫이고, 생멸(生滅)이 우리의 몫이다. 이것을 제 몸으로 사무지체 깨달은 자는 그 몸이 '하늘임금'을 모신 궁전이 될 것이고, 이것을 깨닫지 못한 자는 그 몸이 부패할 '가죽부대'에 다름 아닐 것이다"(1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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