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하늘땅사람이야기21: 희망에 대해 말하는 방법 2005년 10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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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에 대해 말하는 방법 ● 강변에서 안 목사님, 비 온 후 맑게 개인 산하가 깨끗합니다. 하늘은 아끼는 이에게 한가로움을 선물한다는데 아무래도 내게는 그런 홍복洪福이 주어지지 않으려나 봅니다. 다음 주의 빡빡한 스케줄을 검토하자니 갑자기 마음이 답답해졌습니다. 그래서 충동적으로 자전거를 끌고 강변으로 나갔습니다. 잔잔한 물결에 일렁이는 햇살은 싱그럽고, 이마에 닿는 바람은 부드러웠습니다. 반짝이는 억새들의 춤사위도 아름답고, 강변을 달리는 아마추어 건각들의 땀에 젖은 모습도 보기 좋았습니다. 오랜만에 쓰는 근육이 뻐근해질 때까지 페달을 밟고 또 밟았습니다. 낚싯대를 드리우고 한 소식을 기다리는 강태공들의 어망을 들여다보기도 했습니다. 거의 팔뚝만한 웅어를 건져 올리고는 무심한 표정으로 강물에 손을 닦는 조사의 뒷모습에서 우련히 피어나는 흐뭇함을 읽기도 했습니다. 벤치에 앉아 카메라 렌즈를 닦던 노인이 자전거에서 내리는 나를 보더니 "너무 무리해서 타지 마세요" 하고 말을 건네시더군요. 마치 내 존재의 모습이 속절없이 발가벗겨진 것 같아 민망했습니다. 종종걸음으로 보행연습을 하시던 노인은 마치 무거운 짐을 부리듯 벤치에 앉으시더니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봅디다. 그 노인의 모습을 할금거리는데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전쟁과 신부>>에 나오는 한 대목이 떠올랐습니다. 전쟁통에 정든 땅을 떠나 떠돌던 야나로스 신부는 어느 개울가에서 깊은 생각에 잠겨 몸을 구부리고 흐르는 물을 지켜보는 노인을 발견합니다. 개울에는 그의 시선을 끌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노인에게 말을 건넵니다. "무엇을 보고 계신가요, 영감님?" 호기심이 생긴 그가 물었다. 노인은 머리를 들고 구슬픈 미소를 지었다. "흘러가고 사라지는 내 인생을, 내 삶이 흘러가 사라지는 것을 보고 있다오." "걱정 마세요, 영감님, 당신의 인생은 어디로 흘러가는지를 알고 있으니. 바다를 향해서, 모든 사람의 삶은 바다를 향해서 흘러가고 있답니다." 노인이 한숨을 지었다. "그래요, 젊은이, 그렇기 때문에 바닷물이 짜다오. 수많은 사람의 눈물이 모였기 때문에." 강변에서 보았던 그 노인, 뇌졸중의 흔적이 너무도 선명하게 새겨진 육체를 끌며 남은 세월을 살아갈 그 노인도 어쩌면 흘러가고 사라지는 무심한 인생을 바라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의 한 생이 행복했는지 불행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그를 위해 화살 기도를 바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마음의 중심으로부터 기쁨과 감사의 샘이 솟구치게 해달라고요. 열자列子에 나오는 영계기榮啓期라는 사람은 죽음에 대해 이렇게 말했더군요. 죽음이란 사람의 마침 死者人之終也 늘 그러함에 처해 마침을 얻게 됐으니 處常得終 근심할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 當何憂哉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떳떳한 마음만 있다면 죽음을 애닯아 할 이유가 없다는 말이겠지요? 삶과 죽음은 지호지간指呼之間입니다. 어쩌면 그것은 태어나는 순간 헤어진 쌍둥이 형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두 형제가 만나는 날이 곧 그들의 마지막 날이라는 게 안타까울 뿐입니다. ● 슬픔의 영토 왜 이런 이야기를 하나 싶지요? 사실 나는 지난 열흘 사이에 세 분의 장례식을 집전했고, 한 젊은 커플의 결혼을 주례했고,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두 차례나 맞이했습니다. 병상에 누우신 분을 몇 차례 찾아가기도 했지요. 죽음의 현실 앞에서 겸허해진 사람들, 설렘이 가득한 표정으로 결혼을 축하하는 사람들, 그리고 생명의 신비 앞에서 한없이 착해진 사람들,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처지 때문에 미안해하는 사람들…. 그들을 바라보며 나는 삶이란 근원적으로 슬픈 거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어요. 지천명知天命의 나이에 이게 웬 감상인가 싶기도 하지만, 갈수록 이런 느낌이 강해지는 것은 세상에 가득 찬 고통이 너무 아프게 자각되기 때문일 거예요. 자칫하면 슬픔 나라의 망명객 신세가 되지 않을까 염려가 됩니다. 하늘 높음은 큰 숨쉬고 희망 보라는 뜻이라고 말씀하셨지요. 하지만 오늘 가없이 펼쳐진 저 푸른 하늘은 이상하게도 누군가의 눈물인 것 같습니다. 천상병 시인의 시 한 편이 가슴 아리게 다가오네요. 외롭게 살다 외롭게 죽을 내 靈魂의 빈 터에 새날이 와, 새가 울고 꽃잎 필 때는, 내가 죽는 날 그 다음 날. 산다는 것과 아름다운 것과 사랑한다는 것과의 노래가 한창인 때에 나는 도랑과 나뭇가지에 앉은 한 마리 새. 情感에 그득찬 季節 슬픔과 기쁨의 週日, 알고 모르고 잊고 하는 사이에 새여 너는 낡은 목청을 뽑아라. 살아서 좋은 일도 있었다고 나쁜 일도 있었다고 그렇게 우는 한 마리 새. (천상병, <새>) 이런 시가 떠오를 때면 새들의 지저귐조차 무심하게 들을 수가 없어요. 벽 사이에서 들려오는 귀뚜라미 소리도 마찬가지지요. "산다는 게 다 그런 거지 뭐", 하고 무심하게 살 수도 없습니다. 우리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전개되는 세상사를 보면서 체념하기에는 아직 피가 뜨겁고, 다 그분의 뜻이라고 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고, 달관을 가장할 수도 없어서 늘 얼굴에 내 천川자를 그리고 삽니다. 물론 세상이 거친 바다라도 그 위에 비치는 별이 있고, 역사가 썩어진 흙탕이라도 그 밑에 기름진 맛이 들었고, 인생이 가시밭이라도 그 속에 으늑한 구석이 있다(함석헌)는 말씀을 모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이런 말로도 제 슬픔의 영토가 줄어들지 않습니다. ● 두터운 현실의 벽을 뚫는 것 허리케인이 휩쓸고 지나간 중남미 여러 나라 사람들의 비탄에 잠긴 모습과 절규를 보고 들으면서, 강력한 지진으로 초토화된 파키스탄의 여러 마을들을 보면서 삶과 죽음을 자각하는 인간 존재로 몸 받아 살아간다는 것이 복인지 화인지 구별할 수가 없었습니다. 천지불인天地不仁이라는 말이 실감이 납니다. 자연세계의 급격한 변화를 신들의 노여움으로 밖에는 설명할 수 없었던 고대인들의 난감함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난감한 것은 욥의 고난만이 아닙니다. 영화 <<포세이돈 어드벤쳐>>에 나오는 그 신부처럼 하나님께 항의라도 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밸브에서 쏟아져 나오는 뜨거운 수증기 때문에 탈출로가 막히자, 몸을 던져 그 밸브를 잠그고는 자기들의 길을 방해하지 말아달라고 외치고는 떨어져 죽는 그 신부의 모습은 젊은 시절 제 가슴에 새긴 하나님의 일꾼의 인장이었습니다. 물론 나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지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다는 전도자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아픔과 슬픔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자연재해의 피해자가 가난한 사람들과 어린이들이라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정의가 사라진 세상에서 구조적으로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 어떤 조치도 취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여러 나라가 구호의 손길을 뻗치고 있다지만, 그것은 근원적인 해결책일 수 없습니다. 가난한 나라의 빚이 탕감되고, 한쪽으로 편중된 부가 재편되는 일이 없이는 평화의 꿈은 신기루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자본주의 질서의 단맛에 취해 사는 동안 우리 고황膏 에 깃든 탐욕이라는 병이 해결되지 않는 한 우리는 끊임없이 애가를 불러야 할지도 모릅니다. 얼마 전에 테드 창의 소설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읽으셨다고 했지요? 그 중에 나오는 단편 <바빌론의 탑>이 기억납니다. 몇 대에 걸쳐 하늘에 이르는 탑을 쌓는 사람들의 이야기이지요. 그들은 자기들의 행위에 대해 양가감정을 느낍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더할 나위 없이 순수한 목적을 위해 일해 왔다고 생각하지만 현명하게 판단했는지에 대해서는 확신하지 못합니다. 제관들은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의 신비를 볼 수 있도록 허락하신 신에게 감사했고, 또 그 이상을 보고 싶어하는 자신들의 욕망을 용서해달라고 빌었습니다. 테드 창이 들려주는 바빌론의 탑 이야기의 결말은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바가 많습니다. 하늘의 천장을 뚫고 들어간 그들은 세찬 물줄기에 휩쓸리어 정신을 잃었다가 어느 황량한 광야에서 깨어나게 되지요. 테드 창은 "인간은 아무리 오랫동안 여행을 해도 결국은 출발점으로 되돌아오도록 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다만 인간은 자신들의 노력을 통해 상상을 초월한 신의 예술성을 흘낏 보고는 세계가 얼마나 정교하게 만들어졌는지를 깨닫게 되는 게 고작이라는 것이지요. 어쩌면 이게 인간의 한계인 듯싶습니다. 지혜로운 삶이란 그 한계를 지키며 사는 것일 터입니다. 어느 소설에 나오는 작중 인물은 인생을 간결하게 요약합니다. 그는 늑대라면 먹고 양이라면 먹히는 것, 바로 그게 인생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양도 잡아먹고 늑대도 잡아먹는 무지무지하게 큰 늑대라는 거지요. 불경스러운 말이기는 하지만, 체험의 적실함이 온전히 담긴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 게 인생이라 해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있겠지요? 그것은 하늘의 천장을 뚫는 것이 아니라 두터운 현실의 벽을 뚫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희망조차 사치가 되어버린 사람들, 울 기운조차 없어 초점 없는 눈빛으로 세상을 대하는 사람들, 삶에 대한 의욕을 잃어버린 채 무표정한 얼굴로 세상을 대하는 사람들, 삶의 막장에 선 사람들에게 빛을 돌려주기 위해 땀흘리지 않는 한 하늘을 향한 우리의 발돋움은 허망한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아마 이런 의미가 아닐까 싶습니다. ● 밝은 도는 어두운 것 같다 아, 하지만 삶의 가장자리에서 느끼는 그 으스스한 어지러움, 그 심연의 인력引力을 어떻게 견뎌내야 할까요? 위대한 혼이란 심연을 본 사람들일 것입니다. 어둠을 모르는 밝음이 어디 있겠으며, 절망을 경험하지 않은 희망이 어디에 있겠으며, 무시무시한 사탄과 겨루지 않고야 어찌 은총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문제는 우리가 설명할 수 없는 삶의 여변을 자꾸 외면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꼬임에 빠져 삶이 이렇게 힘겹게 되었다고 항의했던 예레미야는 결코 불경한 사람일 수 없습니다. 거룩하신 분의 현존 앞에서 신발을 벗었던 모세나, 입술이 부정한 자가 하나님을 보았다고 두려워했던 이사야나 다 심연을 본 사람들입니다. 그랬기에 그들은 희망을 말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슬픔에 찬 사람들에게 희망에 대해 말하는 방법을 잊었습니다. 아니지요, 사실 희망은 말이 아닐 것입니다. 곁에 다가섬이지요. 유한한 인간은 슬픔의 종신형을 선고받은 존재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나만의 슬픔이 아니라 모두의 슬픔이라면 그 슬픔을 받아들이는 힘으로 우리는 서로를 품어주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이게 인간의 몸을 입고 태어난 우리의 소명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영문도 모른 채 겪는 누군가의 불행을 해석하는 사람이 아니라 얼싸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종교인들도 정치인들도 생명을 얼싸안는 방법을 잊은 듯 싶습니다. 큰 정신이 사라졌습니다. 정치인들은 특권의식의 노예가 된 듯하고, 종교인들은 '다른 신'을 섬기기에 여념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들의 목소리는 높지만, 담고 있는 뜻은 빈약합니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하지만 정작 알아야 할 것은 알지 못합니다. 옛 글에 "밝은 도는 어두운 것 같다"(明道若昧)는 말이 있습니다. 정말로 아는 사람은 어리석어 보이게 마련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당하는 이들에게는 어리석어 보인다는 말도 아마 이런 뜻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주 큰 모서리는 구석이 없는 것 같고 大方無偶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지고 大器晩成 큰 소리는 소리가 없고 大音希聲 큰 형상은 형상이 없다 大象無形(老子, 41장) ● 부디 큰 정신이 되십시오 우리는 그 동안 알지 못하는 것을 가르치고, 보지 못한 것을 보았다고 말하며 산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큰 것을 볼 눈이 없으면 작은 것에 집착하게 마련이지요. 자리를 두고 다투는 사람들을 보면 안타깝습니다. 그게 결국은 '자아'의 팽창욕일 테니 말입니다. 나 '아我' 자를 파자하면 '손(手)'에 '창(戈)을 든 모양이라지요? 자아를 살리려면 결국 남과 겨뤄야 하고, 겨룸을 통해서는 누구든 상처를 입게 마련이고, 상처는 또 다른 원한감정을 낳게 마련입니다. 다툼을 통해서는 누구도 승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아를 버려야 한다고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를 따른다는 이들이 버려도 시원찮은 자아를 들이대면서 내로라 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한숨이 나옵니다. 성직자들이 자리다툼이나 하라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맑게 개인 산하에서 출발한 편지가 우중충한 속내 토로가 되고 말았네요. 하지만 티없이 맑은 하늘을 기뻐하기에는 슬픔의 무게가 너무 큰 가을입니다. 물론 그런 가운데서도 삶은 계속되겠지요. 태어나고, 먹고 마시고, 만나고, 사랑하고, 병들고 죽는, 생명의 순환 과정을 어떻게 하면 제대로 살 수 있을까요? 그분의 일을 위해 부름을 받았지만, 어느 결에 존재로서의 목표를 잃은 채 표류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안 목사님, 부디 큰 정신이 되십시오. 나는 안 목사님에게서 그런 가능성을 봅니다. 안 목사님은 희망에 대해서 말하는 법을 나보다는 잘 아는 것 같습니다. 나는 40대 중반의 나이에 우리 시대의 땅 끝을 찾아가 평화 복무를 하는 분을 알고 있습니다. 그의 선택은 느른한 영혼의 잠을 자고 있던 내게 하늘의 초대장으로 다가옵니다. 이제부터라도 희망에 대해 말하는 법을 배워야 할 때입니다. 이 가을에 부디 많이 깊어지시고, 이 땅의 슬픔을 크게 아파하시기를 기도합니다.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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