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하늘을 나누지 말라 2005년 09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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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나누지 말라 긴 여름이 지나고 접시꽃, 나리꽃, 양달개비가 비워놓은 자리를 분꽃과 나팔꽃과 해바라기가 채우고 있습니다. 철들긴 그른 세상인 듯 싶어도 계절은 어김이 없습니다. 권태응 님의 동시 <꽃시계>가 떠오릅니다. "나팔꽃 피면 언니 학교 갈 시간/해바라기 고개 들면 소죽 퍼서 줄 시간/분꽃이 웃으면 엄마 저녁 할 시간". 꽃들은 똑딱똑딱 소리는 못내도 시간은 척척 맞춥니다. 늦은 오후 일상에 지친 머리를 식힐 겸 화단에 나서면 하얀 분꽃이 환한 웃음으로 맞아줍니다. 아침에 교회 문에 들어서면 나팔꽃이 활짝 피어 소리 없는 소리로 세상을 깨우고 있습니다. 나팔꽃을 볼 때마다 "나팔꽃도 어울리게 피었습니다" 하는 노랫말이 떠오릅니다. '어울리게'라는 단어가 사무치게 좋아 하염없이 바라봅니다. 분주한 일상, 폭력에 가까운 불협화음을 견디며 살고 있는 우리에게 '어울림'이라는 단어는 얼마나 낯선 것이 되었는지요? 며칠 전에 10년 전 세상을 떠나신 일아一雅 변선환 선생님을 기리는 모임에 다녀왔습니다. 이웃한 종교들 사이에 막혀 있던 대화의 통로를 트고, 각 종교인들은 함께 협력하며 살아야 할 소중한 도반임을 깨우치기 위해 고분분투하시다가 힘이 부쳐 쓰러지신 선생님을 추모하는 모임이었습니다. 그래서였나요? 회중석에는 스님들과 수녀님 그리고 원불교의 교무님들이 많이 눈에 띄었습니다. 특히 비구니 스님, 가톨릭과 성공회의 수녀님, 교무님 등 여성 수도자들이 함께 모여 조직한 중창단인 '삼소회'(三笑會)는 축가를 불러 그 자리를 더 뜻깊게 만들었습니다. 먼저 십자가를 향해 두 손을 모은 후에 회중을 향해 돌아선 그분들은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을 불렀습니다. 익숙하지 않은 노래를 부르느라 애쓰는 모습이 회중들의 마음을 움직였나 봅니다. 그분들이 다음 곡인 "사랑으로"를 부르기 시작하자 회중들의 마음도 하나가 되어 중창은 이내 합창으로 바뀌었습니다. 아련히 신학교 신입생 시절이 떠올랐습니다. 일아 선생님은 신학의 여정을 시작하려는 우리에게 두 가지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는 지금까지 우리가 안다고 생각했던 것, 믿었던 것들을 의문에 붙일 용기를 가지라는 것이었습니다. 둘째는 우리가 지향해야 할 세상은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는 세상이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이 세상을 아름다운 정원에 빗대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한 종류, 한 빛깔의 꽃으로만 가득 찬 정원을 상상해보라시면서, 선생님은 다양한 꽃들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꽃동산의 아름다움을 열정적으로 그려 보였습니다. 일사불란一絲不亂의 세계는 아름답지도 건강하지도 않다는 말씀은 당연한 듯하면서도 매우 충격적으로 다가왔습니다. 바벨탑의 언어가 지배하고 있던 그 시기, 지배자가 뚫어준 바늘구멍을 통해서만 세상을 보도록 강요받고 있던 그 시기에, 선생님은 다양한 가치가 평화롭게 공존하고 다양한 시선이 조화롭게 어울리는 세상의 꿈을 우리에게 심어주셨습니다. 생명의 본질은 비스듬히 기댐입니다. 세상에 있는 어떤 것도 홀로는 설 수 없습니다. 바람에 쓰러진 나무도 비스듬히 자신을 받쳐주는 다른 나무 덕분에 생명을 이어갑니다. 무인도에서 28년을 보낸 로빈슨 크루소도 함께 살아왔던 이들에 대한 빛나는 기억이 없었다면 살 수 없었을 겁니다. '소 훔 So Hum'은 '그대가 있어 내가 있다'는 뜻의 산스크리트어입니다. 이 말은 단순하지만 강력하게 생명의 실상을 꿰뚫고 있습니다. 이것을 알고 사느냐, 부정하고 사느냐가 삶의 질을 결정합니다. 정직히 우리 자신을 돌아봅니다. 우리는 어울림의 기쁨과 신비를 잃은 채 무정한 시간 속에서 멀미를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높은 산에 올라가거나 드넓은 바닷가에 서면 왜 깊은 침묵 속에 잠기는 것일까요? 그것은 일상의 경험과는 비교할수록 없이 넓은 지평이 그의 앞에 있기 때문일 겁니다. 가장 소중한 것으로 여겼던 것들이 사실은 사소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자각이 사람들로 하여금 침묵하게 만듭니다. 영성이란 '전체의 뜻으로 수정된 마음'입니다. 그 마음을 잃고 살기에 우리는 비틀거립니다. 차의 속도가 높아갈수록 전망은 협소해지는 것처럼, 분주함이 우리에게서 전체에 대한 매혹과 어울림의 감성을 빼앗아갔습니다. 타락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느 인디언 가정에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부부도 기뻐했지만, 누구보다도 아기를 반기는 것은 다섯 살 짜리 누나였습니다. 누나는 동생과 홀로 있는 시간을 원했습니다. 염려가 되긴 했지만 부모는 딸의 청이 하도 간곡한지라 아기 곁에 홀로 머물도록 해주고는, 문설주 뒤에 숨어 아이가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아기의 침대 곁에 다가간 누나는 아이의 귀에 대고 말했습니다. "나에게 하늘에 대해 말해주지 않을래? 나는 너무나 오랫동안 하늘을 잊고 살아왔어." 종교란 사람들이 까맣게 잊고 살고있는 하늘에 대해 말해주고, 지금 울고 있는 이의 눈물을 닦아주고, 배고픈 이를 위해 밥상을 차리고, 일상의 시간 속에 영원의 숨결을 불어넣는 데 그 본령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소중하고 시급한 일을 위해 다양한 종교들이 사랑의 광장에 나와 서로의 경험으로부터 배우고, 함께 협력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 우리는 모두/위기에 처해 있는 본질이다./만일 세계의 저 먼 끝에서 어떤 영혼이/타락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영혼을/그 자신의 퇴락 속으로 끌어내린다./만일 세계의 저 먼 끝에서 한 사람이/백치가 되고 있다면, 우리 자신의 관자놀이도/암흑으로 넘치게 된다." 얼마 전 월정사 스님들과 신부님들의 족구시합이 있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아름다운 공존의 한 상징이 될 듯싶은 그 소식을 듣고 마음이 쓰렸습니다. 개신교 목사님들이 그 초청을 거부했다는 소식이 들려왔기 때문입니다. 편협함은 하늘을 나누는 행위입니다. 사탄은 나누고 하나님은 하나되게 합니다. 희망은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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