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하늘땅사람이야기20: 누가 용서할 수 있는가? 2005년 09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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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용서할 수 있는가? ● 전도된 현실 속에서 선생님, 평안하신지요? 선생님께서 먼 길 떠나신지 벌써 10년이 지났지만 세상은 여전히 그 모양입니다. 오히려 사람들의 발걸음은 더 빨라졌고, 표정은 한결 어두워졌습니다. 큰 정신은 만나기 어렵고, 바른 소리는 희귀해졌습니다. 마음이 답답할 때면 여름날 천둥소리처럼 울리던 선생님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듣고 싶어집니다. 그 웃음소리를 듣고 나면 마음이 후련해질 것 같아서입니다. 가끔 지인들과 종묘를 걸을 때면 모든 차별과 분열이 사라진 화엄의 세상을 꿈꾸시던 선생님의 그 깊은 눈길이 떠오르곤 합니다. 선생님께는 모든 것이 신학적 사유의 대상이었습니다. 종묘의 정전(正殿)은 '사도적 정통성'과 연결되었고, 창경궁의 정원은 '화엄의 세상'이 되었습니다. 창경궁 연못가에 앉으면 벌써 십 수년 전 선생님과 함께 앉아 있었던 어느 날이 떠오릅니다. 선생님은 고요한 데가 있다면서 연못가로 데려가시더니, 늘 메고 다니시던 하얀색 천가방에서 노란 팜플렛을 꺼내 우리에게 건네면서 지금 당장 읽어보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인도의 사상가 비베카난다(Vivekananda, 1863-1902)가 1893년에 시카고에서 열린 제1회 세계종교회의에서 발표한 논문이었습니다. 우리가 그 글을 다 읽을 때까지 선생님은 가만히 연못만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논문을 다 읽자 선생님은 종교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세상의 꿈을 열정적으로 설파하셨습니다. 그때만 해도 저는 선생님이 느끼시는 절망의 깊이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조금쯤 느낄 수 있습니다. 작년 성탄절 무렵 서남아시아를 휩쓴 쓰나미를 두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말하던 자들이, 미국의 미시시피와 뉴올리언스를 휩쓴 허리케인을 두고 동성애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정말 그런 괴물로 변해버린 정신에 대해 절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가 부정되는 이 전도된 현실을 바라보며 선생님도 마음 아프시지요? '성스러움'이 '폭력'과 결합하기 쉽다는 것은 굳이 조르쥬 바타이유(Georges Bataille)나 르네 지라르(Rene Girard)의 이론을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현실이기도 합니다. 근본주의적인 신앙을 가진 이들 가운데는 광기에 사로잡힌 듯이 보이는 이들이 많습니다. 빈정거림과 공격성, 타자에 대한 부정…그 어디에서도 저는 예수의 향기를 맡을 수 없습니다. 인류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조차 없는 이들이 지도자연하는 오늘의 현실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 매달리는 것을 운명으로 알지만 선생님이 좋아하시던 엔도 슈사꾸의 작품 가운데서 <<死海의 호반>>에 그려진 예수의 모습에서 저는 가슴 저린 감동을 맛보곤 했습니다. "예수가 하는 말은 사두가이파나 바리사이파의 라삐[교사]나 짐승 가죽을 입은 예언자의 그것과는 달랐다. 라삐나 예언자들은 언제나 인간의 나약함을 탓하고, 신의 노여움, 신의 무서운 형벌을 가차없이 위협하듯 말하곤 했는데, 예수는 한 마디도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그는 신도 외롭다고 했다. 신은 여성이 남성의 사랑을 구하듯이 인간을 사랑한다고 말했다. 신은 예언자들이 말하듯이 험한 산이나 황야에 숨어있지 않으며, 고통받는 자가 흘리는 눈물과 버림받은 여인의 괴로움에 함께 계시다고 가르쳤다."(엔도 슈사꾸, <<死海의 호반>>, 청노루, 1988년, 36쪽) 엔도 슈사꾸의 예수님은 기적을 원하는 이들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당신들과 함께 괴로워하는 일일 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죽어가는 노인의 머리맡에서 하룻밤을 밝히고, 자식을 잃은 어미 곁에 조용히 앉아 지켜보고, 해질녘에 앞 못보는 노파의 손을 잡아주시는 예수에게서 저는 참 사람과 참 하나님을 봅니다. 세상은 사랑과 다정다감함과 친절함을 구하는 이들의 숨죽인 신음소리로 가득합니다. 그 외침은 날로 커가지만, 그 외침에 응답하는 이들은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사실 이렇게 객관적으로 관찰자의 시선으로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저 자신이 사는 꼴만 정직하게 바라보아도 충분합니다. 관념 속에서는 사랑의 집을 하루에도 여러 채 짓곤 하지만, 실제로 고통받는 이들 곁에 다가서려는 노력은 게을리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지천명의 나이에 이른 제가 아직도 유년의 숲을 헤매듯 때로 정신적인 공허감에 몸부림치는 것은 머리로만 살아온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시대와의 불화라기보다는 나 자신과의 불화로 인해 저는 파리해져가고 있습니다.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하면서도 여전히 쳇바퀴를 굴리는 다람쥐 꼴이 되어 살고 있습니다. 리차드 바크의 <<환상>>이라는 책의 서문에 나오는 글 기억하시지요?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대략 이런 내용이었던 것 같습니다. 강물 바닥에 생물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각각 자기 나름의 방식대로 강 밑바닥의 나뭇가지와 바위에 꽉 매달려 있었습니다. 매달리는 것은 그들의 생활 방식이었고 흐름에 저항하는 것은 그들 각자가 태어날 때부터 배운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느 날 한 생물이 "나는 매달리는 것에 싫증이 났다"며 강물의 흐름에 자기 몸을 맡기겠다고 말합니다. 다른 생물들은 그를 비웃었지만 그는 숨을 들이쉬고는 손을 놓았습니다. 당장 강물은 그를 넘어뜨려 바위 위에 내던졌습니다. 그러나 이 생물이 다시 매달리기를 거부하자 흐름은 그를 밑바닥으로부터 들어올려 자유롭게 했고 다시 멍들거나 다치지 않았습니다. 하류에 살고 있던 생물들은 어느 날 흐름 위를 자유롭게 떠내려오는 자기들과 같은 모습의 생물을 보면서 '메시아가 왔다'며 자기들을 구해달라고 외칩니다. 흐름 위를 유영하던 생물은 바위를 잡은 손을 놓아버리라고 하지만 그들은 그럴 수 없습니다. 두려웠기 때문이겠지요. 벌써 읽은지 수십 년이 지난 이 소설이 생생하게 떠오르는 것은 어쩌면 제가 바위를 붙잡고 있는 생물의 신세를 못 면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일 겁니다. 한 밤중에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시며, 성령으로 난 사람은 자유롭게 부는 바람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소나무에 부딪히면 솔바람 소리가 되고, 대숲에 불어가면 맑은 물소리가 되고, 갈대와 만나면 숨죽인 흐느낌이 되는 바람, 그 바람에 일렁이며 살고 싶지만 일상은 그 바람을 틈 없이 차단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정말 오랜만에 홍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잠시 동안의 만남이었지만, 학교와 교단에서 쫓겨난 채 외국에서 나그네처럼 살아가면서 그분이 감내했을 시간의 고통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려왔습니다. 모처럼 만나는 제자를 보고 웃고는 있었지만 표정 속에 깃든 쓸쓸함까지 지울 수는 없었습니다. 바쁜 일정 때문에 먼저 떠나야한다고 인사를 드리자 홍목사님은 마치 비밀스런 공모를 하는 것처럼 내 귀에 대고 말씀하셨습니다. "잘 견뎌." 그 말의 의미를 알 듯도 하고 모를 듯도 합니다. 견딤만으로 채워간다면 인생이 너무 가엾지 않겠습니까? 그 견딤을 저는 싸움의 포기나 체념이 아니라, 우리 속에서 약하게나마 깜박이는 불꽃을 잘 간직하라는 충고로 갈무리하기로 했습니다. ● 과연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얼마 전 서점에 들렀는데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시몬 비젠탈의 <<해바라기>>라는 작품이었습니다. '아, 이 책이 번역되었네' 신음하듯 제가 뱉은 말입니다. 벌써 오래 전에 선생님은 이 책을 넘겨주시면서 꼭 번역이 되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 책을 읽고 나서 깊은 감동을 받았고 곧 번역을 시작했습니다만 분주한 일상에 부딪혀 그만 번역을 중동무이하고 말았습니다. 그 책은 해묵은 체증처럼 제 마음을 짓누르고 있었는데 이번에 좋은 번역자를 만나 독자들 앞에 선을 보이게 된 것입니다. 번역본으로 다시 한번 보면서 저는 용서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고, 당시 깊은 상처를 받고 계셨던 선생님께서 이 책을 보시면서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궁금해졌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나치의 집단 수용소에 갇혀 있던 시몬 비젠탈은 배고픔과 피로, 그리고 굴욕감을 느끼며 살고 있었습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간단하게 죽임을 당하고, 인간에 대한 예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 시대는 작품에 등장하는 어느 할머니의 탄식처럼 하느님조차 자리를 비운 시대인지 모르겠습니다. 어느 날 시몬 비젠탈은 수용소 동료들과 함께 임시 병원으로 사용되고 있는 학교 건물로 사역을 나갑니다. 그런데 적십자 소속의 간호사가 나타나 그가 유대인인지를 확인한 후에 자기를 따라오라고 합니다. 간호사는 그를 어느 방으로 데려갑니다. 그곳은 임종실이었습니다. 그곳에서 비젠탈은 온통 흰색으로 감싸인 채 미동도 않고 침대에 누워 있는 한 독일군 병사를 보게 됩니다. 그는 비젠탈에게 자기가 이제 얼마 못 살 거라고 말하면서, 죽기 전에 자기를 괴롭히고 있는 일을 누군가에게 고백하고 싶어서 그를 불렀다고 말합니다. 그는 카를이라는 SS대원이었는데 비젠탈에게 자기가 저질렀던 끔찍한 일을 고백합니다. 명령에 따른 것이기는 하지만 그는 동료들과 함께 유대인들 수 백 명을 한 집에 몰아놓고는 문을 바깥에서 잠근 후 그 반대쪽에는 기관총을 설치했습니다. 그리고는 수류탄을 그 집 창문으로 던져 넣었습니다. 카를은 그 아비규환의 상황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는데, 2층 창문에 어린아이를 안은 어떤 남자의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의 옷에는 이미 불이 붙어 있었는데, 그는 한 손으로 아이의 눈을 덮어 가리고는 거리로 뛰어내렸습니다. 카를의 동료들은 기관총을 발사했구요. 카를은 자신의 죽음에 직면해서야 양심의 괴로움이 육체의 고통보다 더 크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의 죄를 유대인 중 누구에게라도 고하고 용서를 받고 싶다는 것입니다. 비젠탈은 살인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살인적인 이데올로기의 포로가 되어 살인자로 거듭났던 그의 말투에서 그리고 유대인인 자기에게 그런 아픈 고백을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카를이 참회하고 있음을 알아차립니다. 하지만 비젠탈은 그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의 고백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를 용서할 자격이 자기에게는 없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마음 편히 죽고 싶다며 자기를 용서해달라는 카를을 남겨두고 비젠탈은 아무 말 없이 방을 나섭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비젠탈은 과연 자기가 한 처신이 옳은 일이었는지 거듭 되묻게 됩니다. 그것은 그의 양심과 정신에 심각한 윤리적 질문으로 다가옵니다. 어떤 이들은 비젠탈의 행위가 정당했다고 말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이미 참회를 했는데도 죽음의 순간까지도 그를 편하게 해 주지 않았다고 하여 비젠탈을 비난하기도 합니다. 비젠탈은 독자들에게 자신과 입장을 바꾸어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보라고 권합니다. "과연 나라면 어떻게 했을 것인가?" ● 심지어는 하나님조차 이 책의 제2부인 심포지엄은 이 질문에 대한 다양한 응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사람은 오로지 자신이 당한 일에 대해서만 누군가를 용서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매튜 폭스는 비젠탈이 카를에게 "도덕적으로 책임감 있고 성숙한 답변을 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의 침묵은 "침묵하라. 너의 양심을 생각하라. 너의 희생자를 생각하라. 너의 하느님을 생각하라"는 발언이었다는 것이지요. 레베카 골드스타인은 카를이 만일 "자기의 죄를 올바로 자각했다면 그는 자기가 더 이상 아무 용서도 받지 못할 상황에 놓여 있음을 알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은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에게 저질러진 범죄를 대신 용서해 줄 수는 없다"고 말하면서 "심지어 하느님조차 인간이 당신을 향해 지은 죄만을 용서할 수 있을 뿐, 인간이 다른 인간을 향해 지은 죄까지는 어쩔 수 없다"는 유대인의 전통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해럴드 커슈너는 용서란 "슬픔을 벗어던지는 것인 동시에, 더 중요하게는 희생자로서의 역할을 벗어던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죄 지은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스스로를 더 괴롭히는 일이고 자신을 분노하는 사람으로 만드는 일이기에, 그가 나를 희생자로 규정하도록 내버려두진 않겠다는 것입니다. 허버트 마르쿠제는 "가해자가 희생자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이야말로 비인간적이며, 정의에 대한 모욕"이라며, "그러한 범죄를 쉽사리 용서해 주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본질적인 악의 문제를 희석할 뿐"이라고 말합니다. 홍세화는 자기가 비젠탈의 자리에 있었더라도 그 SS대원을 용서한다는 말을 하지 못했을 거라면서 "진정성이 의심스런 용서를 통하여 마음의 부담을 없애고 잊는 것보다 용서하지 못한 마음의 부담으로 비젠탈처럼 끊임없이 성찰하는 편을 택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조금 다른 목소리도 있습니다. 달라이 라마는 비극적인 사건과 범죄에 대해 화를 내는 것은 당연하지만, 우리 마음에서 동정심을 잃어버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데스몬드 투투 주교는 백인 정권들에 의해 저질러진 만행과 악행을 규명한 진실과화해위원회의 활동을 소개하면서, "이 깊이 분열되고, 상처받고, 충격받은 나라에 치유와 화해를 가져오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나는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는 "용서가 없다면 미래도 없다"는 말로 자신의 입장을 밝힙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가 너무 쉽게 용서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깊은 반성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홍세화의 말처럼 마음의 부담을 지워버리기 위한 감상적인 용서는 현실을 외면하고싶은 약자의 비겁이라 생각합니다. 형제가 죄를 지으면 몇 번을 용서해야 하냐고, 일곱 번이면 족하냐고 묻는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일흔번씩 일곱 번이라도 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마18:22). 이 말씀은 형제가 내게 지은 죄에 대해서 그렇게 하라는 말씀일 겁니다. 하지만 그가 다른 이에게 저지른 죄까지 용서할 권한은 내게 없습니다. 상대의 허물이나 잘못, 혹은 악의적인 행동으로 인해 입은 마음의 상처나 손해는 마음을 넓힘으로 용서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 받아들임과 용서를 통해 그의 존재가 바뀔 수 있다면 고마운 일이겠지요. 하지만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이에게 피해자가 먼저 용서를 선언하는 것이 꼭 잘하는 일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일본군의 위안부로 끌려갔던 할머니들의 한, 민가협 어머니들의 아픔, 광주민주화항쟁 희생자들과 그 가족들의 삶에 불인두로 지진 것처럼 가해진 그 폭력의 기억을 누가 함부로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 웃으면서 싸우려면 선생님께서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가끔 울울함을 떨쳐버리기 위해 한강 둔치를 걸으시면서 말없이 흘러가는 한강을 향해 고함을 지르시기도 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겉으로는 웃고 계셨지만 속으로는 피눈물을 흘리고 계셨구나 생각하니 목이 멥니다. 선생님이 떠나신 후에도 한국 교회의 현실은 여전히 암담합니다. 교회는 자본주의의 공세 앞에 속절없이 무릎을 꿇습니다. 예수 정신은 온데간데없고, 33살 젊은이의 핏자국이 아로새겨진 십자가 위에는 화려한 장미꽃이 뒤덮여있습니다. 저는 부드럽고 온화한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화 잘내는 사람이 되지 않으려 애썼고,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으려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때로는 무기력함의 온상이었음을 이제는 알겠습니다. 참으로 온화한 사람이란 "노여워할 일에 대해서, 또 당연히 노여워할 사람들에 대해서, 그리고 또 적당한 정도로, 적합한 때에, 그리고 적당한 시간 동안 노여워하는 사람"(<<니코마코스 윤리학>>, 4권 5장)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에 공감합니다. 슬픔의 역사를 넘어가는 것은 같은 종류의 힘으로 다른 힘을 제압하는 것이 아님을 압니다. 하지만 아직은 제 속에 있는 사랑의 힘이 부족합니다. 죄는 용서함으로써만 없어진다지요? 그래서 고난받는 종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입을 열지 않고,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침묵했던 것인가요? 하지만 이제는 너무 쉽게 용서를 말하지 않겠습니다. 너무 쉽게 눈을 감지 않겠습니다. 그리스도의 뜻을 마음대로 왜곡하는 이들에 대한 거룩한 분노가 없다면 결국 저는 무기력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겁니다. 물론 미움이 제 마음을 지배하도록 허락해서는 안 되겠지요. 거짓과 위선과 비겁과 맞서 싸우되 미워하지 않고, 웃으면서 싸울 수 있으려면 더 치열한 내적 준비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선생님과 눈물로 작별한지 강산도 변한다는 십 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 어리석은 제자는 조금은 더 때묻고, 편안함에 길들여진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댑싸리라도 꺾어 선생님 앞에 내려놓고 종아리라도 걷고 싶은 심정입니다. 울 밑의 황국화가 추광秋光을 자랑한다는 가을이 성큼 다가왔습니다. 꽃이 진 자리에 열매가 맺힌다는데, 수분受粉을 하지 못한 것처럼 알이 들지 못한 채 인생의 겨울을 맞을까 제 마음이 초조합니다. 선생님, 부릅뜬 두 눈으로 제자를 지켜주십시오. 선생님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여전히 우리를 가르치고 계십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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