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하늘땅사람이야기19: 몸 노동과 성찰의 조화 2005년 08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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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노동과 성찰의 조화 방범 창에 매달린 채 울어대는 매미소리에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니, 선득한 아침이 선물처럼 찾아왔구나. "늦더위 있다한들 절서야 속일쏘냐. 비 밑도 가비업고 바람 끝도 다르도다. 가지 위의 저 매아미 무엇으로 배를 불려, 공중에 맑은 소리 다투어 자랑는고." 농가월령가의 7월령의 한 대목을 읊조리며 하루를 시작한다. 우리 집에 찾아온 진귀한 손님을 찍으려고 카메라를 들고 오니, 기미를 알아차린 매미가 손사래를 치듯 날아가버리는구나. 우화등선을 꿈꾸며 탈피탈각을 거듭하다가 마침내 하늘로 날아오른 저 매미는 이 도심 어디에서 한 생을 마치려는지…. 이제 여름이 지나가고 있구나. 언제부터인가 여름은 내게 무더위의 계절이나 피서의 계절이 아니라, 신경을 곤두세우는 계절이 되었단다. 교회학교 각 부서의 수련회가 무사히 끝날 때까지는 긴장을 늦추기가 어렵기 때문이야. 뭘 그리 마음 조리느냐고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한 공동체의 책임을 맡는 자리에 있어보면 그렇게 쉽게 말할 수는 없을 거다. 아직 아무도 출근하지 않은 이른 시간, 장한나 씨가 연주하는 요제프 하이든의 첼로 협주곡을 오디오에 걸어놓고 느긋하게 선율에 몸을 맡길 수 있는 것은 여름이 무사히 지나갔다는 안도감 때문이겠지? '믿음'은 '맡김'이라고 말하곤 하지만, 온전히 맡기고 평안하지 못한 것은 믿음이 부족한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 여럿이 함께 그리고 홀로 청년 수련회의 마지막 날 전날의 강행군으로 피로했음에도 내가 너희를 찾아간 것은 건강한 땀을 흘리는 너희의 모습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야. 비를 맞으며 일 하고 있던 너희는 흠뻑 젖은 작업복을 입은 채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지. 득의에 찬 너희의 얼굴은 몸으로 일한 자의 자부심이 가득 했어. 물론 처음부터 그렇지는 않았겠지. 정 목사님도 그러시더라. 추레한 작업복을 걸치고, 옷에 땀이 차면서까지 일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너희는 영 마뜩찮은 표정이었다고. 하지만 노동을 통해 몸이 풀어지고, 마음의 경계가 허물어지자 너희 표정에 변화가 일어났다지? 내가 갔을 때 너희는 제법 한몫 하는 일꾼들의 모습이었어. 대패로 나무를 다듬고, 그것을 지붕 위로 나르고, 서까래를 얹고, 거대한 통나무를 옮기고, 여러 해 켜켜이 쌓였던 톱밥과 대팻밥을 긁어내 한곳에 모아놓는 너희의 모습은 아름다웠어. 목도꾼이 된 양 거센 빗줄기를 아랑곳하지 않고 줄을 걸어 통나무를 옮겨 놓고는 그 위에 앉아 기념촬영을 부탁하는 너희를 보면서 "인도네시아에 간 벌목노동자" 같다고 웃었다만 내 마음도 절로 흥겨웠단다. 너희가 "여럿이 함께"라는 두레의 원리, 생명의 원리를 원초적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이야. 그런 노동의 경험이 일회적인 경험에 그치지 않고 우리의 삶의 태도로 착근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노동처럼 사람을 경건하게 만드는 게 또 있을까? 물론 그 노동이 소외된 노동이어서는 안 되겠지만. 너희가 이번에 만났던 정 목사님은 언젠가 홀로 호미를 잡고 밭을 맬 때보다 더 깊이 기도하는 때가 없는 것 같다고 웃으며 말하더라. 일하기를 싫어하는 이들이 들으면 외계인의 말처럼 낯설 테지만, 나는 즉시 그 말의 진정을 느낄 수 있었어. 그 순간이야말로 외부 세계와 자아로부터 해방되는 시간일 테니 말이야. 트라피스트 수도회에 속한 토마스 머턴 신부는 홀로 있기의 유익함을 이렇게 말하더라. "깊은 홀로 있기에서 나는 형제자매들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게 하는 온유함을 발견한다. 홀로 있으면 있을수록 나는 더 많은 사랑을 그들에게 줄 수 있다. 고독과 침묵은 형제와 자매들을, 그들이 하는 말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존재 자체를 사랑하라고 나를 가르친다."(존 디어, <<살아 있는 평화>> 중에서) ● 몸의 한계에 직면할 때 노동은 우리에게 '여럿이 함께' 하는 존재의 유대감을 안겨줄 때도 있지만, 오직 자신의 몸과 더불어 홀로 있는 시간을 선물로 안겨주기도 하는구나. 몇 해 전 로마 근교의 수비아꼬에 있는 베네딕드 수도원에 갔던 때가 생각나는구나. 긴 오름길이 시작되는 수도원 입구에서 나는 아치형 문 위에 새겨진 라틴어 글귀에서 한동안 눈을 뗄 수가 없었단다. "Ora et Labora". 기도하고 일하라는 뜻이야. '기도'와 '일'이라는 단어처럼 수도원 생활을 가장 잘 요약해주는 말이 없을 거야. 토마스 아퀴나스는 "노동의 기쁨이 없이는 삶의 기쁨도 없다"고 했어. 도시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은 이 노동의 기쁨으로부터 소외된 채 살고 있는 셈이지. 노동으로부터 멀어지면서 진실한 삶의 기쁨도 잃어버린 것이 우리의 일상이 아닐까 싶구나. 우리들의 실존적인 침체와 무기력은 건강한 육체 노동을 등한시한 데 따른 결과일 거야. 노동만이 아니라 자기 몸을 한계에까지 밀어붙이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나는 외경심을 느끼곤 한단다. 이런 외경심의 이면에는 몸을 쓰는 삶으로부터 너무 멀어진 나의 파리한 실존에 대한 부끄러움이 있을 거야. 언젠가 나는 스위스와 이탈리아의 관문인 2,800미터가 넘는 준령을 배낭 하나 짊어지고 자전거 페달을 힘차게 밟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 고개를 자전거를 타고 넘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세상을 보는 방식이 다를 거"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단다. 근육이 다 빠져나간 내 두 다리가 얼마나 부끄럽던지. 조오련씨와 두 아들이 울릉도에서 독도까지 90여 킬로미터가 넘는 바닷길을 헤엄쳐 건너는 모습을 보도를 통해 보면서 나는 마치 그 대장정에 동참이라도 한 듯 뿌듯했단다. 그들은 독도의 상징성에 주목해달라고 하지만, 내게는 목표를 정해놓고 그것에 접근하기 위해 눈물나는 노력을 하는 그들의 모습이 더 크게 다가오더라. 휴먼 원정대를 꾸려 에베레스트에 두고 올 수밖에 없었던 동료 산악인들의 시신을 수습하던 엄홍길 대장과 그의 동료들을 보면서도 나는 인간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를 새삼스럽게 절감했단다. 자기 육체를 극한에까지 밀어붙이고, 그것을 넘어서기 위해 함께 분투한 사람들 사이에 형성되는 소박하지만 검질긴 우정이야말로 평화의 단초가 되는 것 아닐까 생각한다. ● 존재로서의 목표를 잃으면 여름이 지나고 초가을이 다가오는구나. 이제 차분히 앉아 자기를 성찰하고 덜어내야 할 것은 덜어내고, 붙잡아야 할 것은 굳게 잡아야 할 때다. 해가 중천에 떠오를 때까지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너를 볼 때마다 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풀썩 한숨을 토해놓곤 한다. 일을 위해 주어진 낮 시간 동안은 비몽사몽간에 보내고, 명상을 위해 주어진 밤 시간에는 정보의 거미줄을 타고 노느라 정신이 없는 이 세대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현대인들은 외부의 자극에 대해 끊임없이 반응해야 하기에 자유의 여지가 별로 없는 것 같아. 삶이 외부를 향해 있기에 중심을 유지하기가 어렵고, 그러니 늘 뭔가에 쫓기듯 분주한 거지. 삶의 주체로 서지 못하는 이들의 특색이 분망함이 아니겠니? 문제는 다양한 관계를 맺으며 살고, 여러 가지 일들을 감당하기는 하지만 정작 자기 인격을 투입해야 할 일은 많지 않다는 거다. 존재로서의 목표를 잃는 순간 우리는 사소에 빠지게 되고, 통속의 덫에 걸려들 확률이 높아지게 마련이야. 나는 네가 가슴에 떳떳함을 지닌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가끔 뭔가를 물어보면 내 진의와는 관계없이 뜸베질하는 소처럼 과잉 반응하는 너의 모습을 볼 때마다, 네가 자신의 삶에 대해 긍정할 힘을 잃은 것이 아닌가 하여 안타까운 생각이 든단다. 자기를 잘 제어할 줄 알고, 자기 행위의 입법자로 살아가는 사람은 그렇게 성마르게 반응하지는 않기 때문이야. 하지만 너의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스스로 반성하지 않을 수 없더라. 나의 말과 눈길이 너로 하여금 그렇게 방어적이 되도록 했다면, 나 또한 네게 정신적인 폭력을 가한 셈이니 말이야. 그렇다면 참 미안하다. 평화와 생명을 내 삶의 두 중심으로 삼겠다고 다짐하면서도 여전히 평화롭지 못한 나의 속 좁음을 어찌해야 할까? 사실 평화란 상대가 나의 뜻대로 변화되기를 기대하는 마음조차 내려놓아야 가능한 건데, 아직 나는 그 자리에까지 가지 못했구나. 하지만 살라는(生) 명령(命)을 받고 태어난 생명일진대 잘 살아야 하지 않겠니? 잘 산다는 것은 가슴에 떳떳함을 지니는 것이고, 그것은 지금 이 순간을 충실하게 살 때 주어지는 선물일 거다. 그러기 위해서는 본능과 외적 자극에 반응하기에 익숙하던 삶의 자리에 사고와 결단의 물줄기를 끌어들여야 해. 반성과 결단이 없는 삶은 마치 신기루를 붙잡으려는 것과 같이 허망할 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살아야 제대로 사는 걸까? 여러 해 전 김흥호 선생님의 글을 읽다가 '아, 이거구나' 하고 무릎을 친 대목이 있는데 한번 들어보겠니? ● 소걸음으로 천리를 <무엇이든 기초를 닦기 위해서는 자신만이 지킬 수 있는 계율을 정해놓고 그것을 끊임없이 지켜가야 한다(持戒). 남이 무엇이라고 하든 그까짓 것은 문제가 안 된다(忍辱). 일 년이고 십 년이고 꾸준히 파들어가야 한다(精進). 그러노라면 결국 바위 같은 어려움이 나올 것이다. 그때 바위를 뚫는 기계처럼 모기가 되어 소 뿔을 뚫는 것이다(禪定). 이때 기적이 일어난다. 바위가 터지고 샘물이 솟아나기 시작한다(般若). 어둠을 깨뜨리고 아침 햇살이 비쳐 들어온다. 마음이 다시 열린 것이다. 이 물을 퍼서 모든 생명을 살려내는 것이 사랑(布施)이다. 사랑은 쉬운 것이 아니다. 사랑하기 위해서는 기초적인 훈련부터 시작해야 한다.> 불교의 수행법을 설명한 것이지만, 인생을 마음 공부로 여기며 살아가려는 이들에게는 아주 소중한 지침이 되는 말씀이다. 그 첫 단계인 '지계持戒'를 제대로 해내야 우리 내면에 힘이 고이게 되겠지? 자기 나름의 원칙을 정해놓고 그것을 꼭 지켜가려고 노력하는 과정을 소홀히 하고는 아무런 결과도 얻지 못할 거야. 당장은 눈에 띄는 결과가 없어도 꾸준히 자기 약속에 충실하다보면 어느 결에 정신의 근육이 든든하게 자란 것을 알게 될 거야. 그 다음에 요구되는 것이 '인욕忍辱'이야. 하늘이 높고 푸른 때에 거대한 방주를 짓는 노아를 보고 사람들은 비웃었겠지.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어. 그의 눈에는 다가올 홍수가 확연히 보였기 때문일 거야. 꿰뚫어보는 사람과 겉만 보는 사람의 차이가 여기에 있단다. 그 다음은 '정진精進'이야. 언젠가도 말했다만 '지속에의 열정'이야말로 가장 큰 재능이 아니겠니? 시작하는 사람은 많지만 마치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게 현실이다. 출애굽 1세대가 광야에서 뼈를 묻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의 비전을 잃어버렸기 때문일 거야. 산을 오르다보면 숨은 턱에 차오르고, 땀이 비오듯 쏟아지고, 목표지점은 아득해 보일 때가 있어. 그럴 때 가야 할 먼 거리에 자꾸 마음을 쓰다보면 맥이 빠지게 마련이야. 그럴 때면 한 걸음만 더 내딛는다는 심정으로 걸어가야겠지. 우보천리牛步千里, 소걸음으로 천 리를 가야 하는 게 인생인지도 몰라. 자기 한계를 돌파하는 데서 찾아오는 것은 곱게 갈아진 마음, 즉 마음의 고요('禪定')야. 겟세마네 동산에서 눈물로 기도하시던 예수님이 십자가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실 수 있었던 것은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고요를 얻으셨기 때문일 거야. 죽음조차도 뒤흔들어놓을 수 없는 마음의 고요 속에 머무셨기에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도 평화로웠지. 십자가 아래에 있던 백부장과 그의 부하들이 주님의 마지막 모습을 본 후에 "참으로, 이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셨다"(마27:54)고 고백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라. '반야'와 '보시'는 '선정'에 이른 사람에게 일어나는 존재의 기적이 아니겠니? ● 평정을 위한 기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남이 가진 것을 부러워하느라 자기 속에 감춰진 보화를 보지 못한 채 한 평생을 다 보내는 것 같더라. 보화를 찾으러, 반야의 샘물을 찾으러 바깥으로 달려나갈 필요는 없지 않겠니? 아우구스티누스가 진리를 찾기 위해 밖으로 달려나가지 말고 자기 속으로 들어가라고 한 말도 같은 뜻일 거야. 예수님은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지. 이 말은 사람은 자기를 아끼고 사랑할 줄 알아야 이웃도 사랑할 수 있다는 말로 이해해도 상관이 없을 거야. 자기 자신과 평화롭게 지낼 줄 아는 사람이라야 이웃과도 평화롭게 지낼 수 있는 거 아니겠니? 나는 최선을 다해 마음 공부를 하겠지만, 일상의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때가 있다 해도 결코 실망하지 않기로 했다. 인생길에서 무엇에도 걸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도 대단하지만, 넘어질 때마다 다시금 일어나는 사람은 더욱 위대하다. 잘못도 부끄럼도 취약함도 나의 삶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 수 있으니 말이다.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의 기도가 새삼스럽게 떠오르는구나. <하나님, 제가 변화시키지 못할 것은 그대로 받아드리는 평정(平靜)을 저에게 주십시오 제가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변화시킬 용기(勇氣)를 저에게 주십시오 서로간의 차이(差異)를 알 수 있는 지혜(智慧)를 저에게 주십시오 하루를 살아도 한껏 살게 하여주십시오 한 순간을 즐겨도 한껏 즐기게 하여주십시오 고난은 평화에 이르는 길임을 받아들이게 하여주십시오 죄로 가득 찬 이 세상, 주님께서 그대로 끌어 안으셨듯이 저도 이 세상을 제 뜻대로 변화시키려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끌어안게 하여 주십시오 제가 하나님의 뜻에 항복하기만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만사를 다 올바로 이룩하실 것을 믿게 하여 주십시오 그리하여, 제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소박(素朴)한 행복(幸福)을 누리고, 지극(至極)한 행복은 영원한 나라에서 주님과 함께 누리게 하여 주십시오> (번역/민영진 박사) 설명이 필요 없겠지? 우리는 변화시킬 수 없는 일을 현실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평정심이 필요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인다는 사실 자체가 용기가 아니겠니? 비겁한 사람은 '만일'이라는 말을 앞세우면서, 지금을 충만하게 살지 않는단다. 요즘 텔레비전에서 <불멸의 이순신>이라는 드라마를 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그 가운데 나오는 대사에 열광하더구나. "신臣에게는 아직 열 두 척의 전함이 남아 있습니다." 그렇지. 예수님은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산이 들려 바다에 빠지라 해도 그대로 된다고 하셨지. 당위當爲는 항상 가능성을 동반하고 우리에게 다가오게 마련이야. 이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맥빠진 삶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야. 옛사람은 아침에 진리를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했는데, 바로 그게 정신 차린 사람의 말이 아니겠니? 하루를 살아도 한껏 살 수만 있다면 우린 이미 행복한 사람이야. 9월초부터 시행하는 두 번째 <평화교육>에 동참할 것을 권했을 때 네가 선뜻 그러겠다고 해서 참 고마웠단다. 이 가을이 네게 삶의 균형감각을 되찾는 계절이 되기를 기도한다. 삶의 방향을 진지하게 모색하고 있는 네게 레바논의 시인 칼릴 지브란의 글이 하나의 이정표가 되었으면 좋겠다. <이성과 열정은 그대가 탄 배의 키이고 돛이다. 둘 중 하나가 망가지면 폭풍 속에 춤을 추거나 망망대해 한가운데서 꼼짝도 못하고 있으리라. 이성은 홀로 움직이면 족쇄가 되고, 열정이 혼자 나서면 모든 것을 태워 버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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