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하늘땅사람이야기18: 의붓아버지에게서 벗어나라 2005년 07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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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붓아버지에게서 벗어나라 정 선생님, 보내주신 편지를 감사한 마음으로 받았습니다. 쎄느 강변을 걸어 문화원과 집을 오가는 정 선생님의 동선을 그려보다가, 몇 해 전 <에디뜨 피아프>호를 타고 쎄느 강을 유람하면서 보았던 여러 다리들과 주변 풍경들이 아련한 기억으로 떠올랐습니다. 영화로 유명해진 '퐁네프의 다리'를 보려고 다리품을 팔았는데, 무척 허름하고 초라한 다리여서 놀랐던 기억도 나는군요. 그 다리 중간쯤에 서서 저는 지나는 사람들과 배들을 보면서 "도시는 사람들의 기억과 과거의 창고이며 문화적 전통과 가치의 저장소"라는 벤야민의 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고색창연해 보이는 파리 도심과 건물들에서 느낀 세월의 무게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도시 어디를 둘러보아도 고층 건물과 아파트가 즐비한 서울이 자랑스럽기는커녕 슬퍼 보이는 까닭은 이 도시가 기억의 창고도 문화적 전통과 가치의 저장소도 아니라는 자각 때문일 겁니다. 광화문과 덕수궁에서 왕궁 수문장 교대식이 열려도 그게 왠지 생경해 보이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전시 기획 행정의 결과물처럼 보이기 때문일 겁니다. 청계천에 물이 다시 흐르게 되었다 해도 박태원이 묘사했던 <<천변풍경>>은 더 이상 기대할 수 없습니다. 서로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너무 가파르거나 무심하기 때문입니다. 공동 경험과 기억의 온축이 문화일진대 우리는 지속적으로 문화를 파괴하면서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연스러워야 할 우리네 삶은 인위로 덧칠해지고, 그 속에서 우리는 잠수함 속의 토끼처럼 숨을 헐떡이고 있습니다. 어디를 가든 파헤쳐진 길이 막아서고, 새로 짓고 있는 건물이 눈에 띕니다. 소음은 견딜 수 없을 정도입니다. 어떤 이는 서울이 역동적이라고 말하지만, 내게는 서울이 가학적인 도시인 것만 같습니다. 시간이란 자기 부정의 형식이라지만 부정해야 할 자기 모습조차 없는 게 우리네 몰골이 아닌가 싶습니다. "세상은 권력(power)과 이윤(profit)과 쾌락(pleasure)이라는 세속적 가치를 획득하기 위한 전쟁터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는 그것을 규제하고 통제하고 새로운 방향을 부여하는 초월적 가치의 영역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정 선생님의 이런 말씀이 참 통렬하게 다가옵니다. 요즘은 내가 너무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과 동떨어진 생각을 하며 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아파트 값 오름세에 온통 정신을 팔고 있는 사람들에게 나눔·돌봄·섬김·생명·평화·느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얼마나 적실성이 있나 회의적인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저는 언젠가 읽은 적이 있는 이야기를 떠올립니다. 개구리 울음소리가 낭자한 어느 저녁 꾀꼬리는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노래가 개구리 울음소리에 파묻혀 버리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꾀꼬리는 하나님께 하소연을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노래를 부르지 않으니 개구리 울음 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것 아니니?" ● 거룩한 분노 불의한 현실에 대한 분노를 잃어버리는 일처럼 참담한 일은 없을 겁니다. 그것은 어쩌면 모든 것을 잃는 것일 테니까요. 저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신학자인 앨런 뵈삭(Allan Boesak)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그는 오늘의 교회가 잃어버린 것은 심리학이나 문학이 아니라 '거룩한 분노'라고 말했습니다. 거리에서 불의가 자행되고, 거짓이 횡행하는 세상에 살면서 분노할 줄 모른다면 그는 하나님도 세상도 알지 못하는 것일 겁니다. 순교자인 카즈 뭉크(Kaj Munk)는 오랜 역사를 통해 교회의 상징은 사자·어린 양·비둘기·물고기였지 카멜레온이 아니었다고 말했습니다. 정의와 평화가 유린되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가 대규모로 파괴되는 현실을 목도하면서도 분노하지 않는 교회는 이미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일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그런 거룩한 분노는 믿음에 바탕을 둔 근본적 낙관주의와 결합되어야 할 겁니다. 그렇지 않다면 파괴적인 결과를 낳게 될 테니까요. 부드럽게 웃을 줄 모르는 사람, 세상의 작은 것들 앞에 멈춰 설 줄 모르는 사람들, 생의 신비에 눈을 감은 사람은 세상을 치유할 수 없습니다. 자세히 보면 세상은 여전히 하나님의 은총이 그치지 않는 곳입니다. "땅이 있는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창8:22). 하나님은 적대적인 사람들에게 눈길을 고정한 채 절망의 심연으로 떨어지고 있는 엘리야에게 세상에는 아직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선지자 7천 명이 남아있다고 하셨습니다. '다 잘 되겠지' 하는 근거 없는 낙관주의가 아니라,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근원적인 확신에 근거한 근본적 낙관주의야말로 불의한 세상을 이길 힘입니다. 그렇기에 신앙인들에게 있어 투쟁의 뿌리는 기도여야 하고, 그 무기는 사랑이어야 하고, 투쟁의 전리품은 생명과 평화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 내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생각은 고발과 위로라는 예언자적 선포의 두 핵심이 버성기지 않으면서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길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답은 이미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이 그 답입니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 이 둘은 별거상태에 들어간지 오래입니다. 이게 바로 한국 교회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당신들의 천국'이라는 비아냥을 듣게 된 까닭일 겁니다. 얼마 전에 나온 교계 신문의 기사는 한국 개신교회가 처한 위기를 통계수치를 통해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비종교인들을 대상으로 한 각 종교에 대한 호감도 조사에서 개신교회를 선택한 사람은 12% 남짓에 불과했습니다. 종교를 바꾼 적이 있는 사람들에게 개종 전의 종교를 물었더니 56% 가량의 사람들이 개신교도였노라고 대답했습니다. 이게 바로 우리의 적나라한 모습입니다.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나 생각해봅니다. 다양한 분석이 가능하겠습니다만 한마디로 예수정신을 버렸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교회 성장이라는 '말末'에 사로잡혀 예수정신이라는 '본本'을 버린 것이 오늘의 한국 교회가 세상의 추문거리가 된 까닭이 아닌가 싶습니다. 민심이 곧 천심이라는 말이 있습니다만 시대 정신은 천박해도 역사의 선택은 엄정하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닫습니다. 물질적 풍요가 정신적 성숙에 의해 뒷받침되지 못한 결과 오늘 우리 사회가 노정하고 있는 천민자본주의의 모습을 교회도 그대로 답습하고 있으니 답답한 노릇입니다. 꿩 잡는 게 매라는 식으로 능력 있는 목사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큰 교회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 교역자들의 강박관념이 된지 오래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머리 둘 곳을 찾지 못해 이 세상을 고단하게 떠돌고 계신 것 같아 죄스럽습니다. ● 사유의 결핍 저는 한국교회를 지배하고 있는 감성 과잉의 신앙양태가 결국에는 반지성주의의 나락으로 빠져들고 말 거라는 불길한 예감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신앙은 지성의 희생이 아니라 배웠습니다. 믿음은 회의의 용광로를 거쳐야 단단해지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지성이 없는 믿음, 회의가 용납되지 않는 믿음이 많은 이들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근본적인 도전 앞에 서려하려 하지 않습니다. 결국 한국 교회의 문제는 '사유하지 않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범 재판에 회부되었던 악명 높은 나찌 전범 아이히만의 재판을 참관했던 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악의 평범성'에 대해 말했습니다. 아렌트가 아이히만에게서 본 것은 이데올로기적인 확신도 특이한 악의적 동기도 아니었습니다. 천박함이었습니다. 아이히만은 자기의 행위에 대해 전혀 반성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은 다만 지시받은 것을 수행했을 뿐이기 때문에 아무 잘못도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습니다. '사유하지 않음'처럼 위험한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홀로코스트의 배후에는 주체성을 포기 혹은 방기한 개인과 집단이 있었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한국교회의 감성 과잉도 뒤집어보면 사유의 결핍과 맞닿아 있는 것 같습니다. 얼마 전 런던의 킹스 크로스에서 벌어진 폭탄 테러에 대처하는 영국인들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저는 복잡한 심회를 가눌 길이 없었습니다 "평화에 이르는 길은 없다. 평화가 곧 길이다"는 말이 우선 떠올랐습니다. 사르트르의 <더러운 사람들>에 나오는 혁명가들은 어린아이가 함께 타고 있는 대공의 마차에 폭탄을 던질 수 있는가를 놓고 갈등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세상이 비교적 낭만적이던 옛날 이야기가 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서운 세상입니다. 제가 놀란 것은 사고를 당한 당사자들을 포함한 사람들의 차분한 대응이었습니다. 매스컴도 선정적인 보도를 자제했고, 수사 당국도 그렇게 서두르는 기색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차분하게 재난에 대처하는 것은 재난상황을 예기하면서 살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민족적 기질이나 문화적 습속과 관련된 것일까요? 똑같은 상황이 우리에게 벌어진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응할까를 생각해보니 답답해졌습니다. 조심스러운 이야기이기는 합니다만, 우리는 어떤 일을 만나든지 매우 직정적으로 반응하는 것 같습니다. 어떤 사태를 정신의 거울에 비추어 반성한 후에 반응하는 습성이 우리에게는 약하다는 말입니다. 어떤 외국인이 한국인과 한국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분'이라는 말을 알아야 한다고 말하더군요. 그 말을 들었을 때 옆구리를 찔린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기분만 내키면 우리는 정말 못할 일이 없는 민족이 됩니다. 1998년 초의 금 모으기가 그렇고 2002년 월드컵 때 보여준 응원 열기가 그렇습니다. 신바람을 타고 우리는 기적을 만들곤 했습니다. 문제는 그 신바람이 늘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신바람을 타고 놀면서 한껏 부풀은 자아 혹은 민족주의는 냉혹한 현실의 벽에 부딪치는 순간 풀썩 꺼져버리게 마련입니다. 그 자리에 남는 것은 잿빛 허무이겠지요. 그 허무를 견딜 힘이 없어서일까요? 국적을 포기하는 이들이 속출하고, 이민 행렬이 줄을 잇습니다. 그 허무의 자리를 파고드는 것은 불구화된 감성, 즉 감상(感傷)입니다. 우리는 이성적이기보다는 감상적일 때가 많습니다. 조그마한 상처에도 비명을 크게 질러댑니다. 감정을 통제하기보다는 풀어놓는 데 익숙합니다. 언제부터 우리가 이 지경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 어리석음의 회복 유동식 선생님은 '풍류'라는 단어를 한국인의 영성의 본질로 제시합니다. 물론 그것은 최치원의 다음과 같은 말에 근거한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는 깊고 오묘한 영성이 있는데, 이것을 불러 풍류도(風流徒)라고 한다 … 이것은 儒, 佛, 仙 三敎를 포함한 것이며, 뭇 인생에 접해서는 그들을 사람되게 교화(敎化)하는 것이다." 유동식 선생님은 풍류라는 단어는 "자연과 인생과 예술이 혼연일체가 된 삼매경에 대한 심미적 표현"이라고 하셨습니다. 달리 말해 풍류도의 본질은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그의 뜻을 따라 뭇 사람들과 사랑의 관계를 맺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자칫하면 아전인수격 민족주의라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저는 우리의 유전인자 속에 이런 요소가 분명히 있다고 믿고 싶습니다. 문제는 이런 요소가 언제부터인지 왜곡되기 시작했다는 것이지요. 정 선생님은 박정희에 대해 "그는 나에게 낯설고 억압적인 '타자'인 의붓아버지 같은 이미지로 짙게 남아있다"는 시인 황지우의 말을 받아, 자신의 학문도 그 의붓아버지와의 대면에서 시작된 것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박정희는 다만 상징일 뿐이고 나의 생물학적 아버지, 나의 스승들을 포함하여 우리 사회의 요직을 차지했던 내로라 하는 원로들이 다 '아버지들'"이라는 말에 저는 크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처벌 혹은 불이익을 감수할 용기가 없는 이들은 그분들이 만들어 놓은 틀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갈 수 없었습니다. 개인의 욕구와 자유는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타율적인 존재로 길들여지고 만 것이지요. 안타깝게도 저는 정 선생님이 언급한 목록에 '종교' 아니, 더 정확히는 '기독교'를 추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을 자유롭게 해야 할 기독교가 오히려 그들을 더 좁은 틀 속에 가둬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이들이 예수님께서 아바 아버지라 불렀던 하나님이 아닌 '의붓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것 같습니다. 결국 문제는 '타자 체험'이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경우 타자 체험이 주체성의 확립으로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의붓아버지를 자처하는 압도적인 타자 앞에서 주눅이 들어 타자화된 자아가 있을 뿐입니다. 의붓아버지 밑에서 자란 자식은 약삭빠르게 마련입니다. 억눌려 왔기에, 속아 살아왔기에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약삭빠르다는 말은 상황에 대처하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말일 수도 있겠지만, 자기 이익에 발빠르다는 부정적인 함의가 더 큰 것 같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인정하고 칭찬하고 존경하지 못하고, 시선에 날을 세우고 살아가는 까닭은 눈칫밥을 먹고 살아온 삶의 이력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우직함이 아닐까요? 우직야(愚直也)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리석음이 곧 곧음이라는 말일 겁니다. 윤똑똑이들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어리석은 듯 보이지만 사실은 곧은 사람들을 보고 싶습니다. 기독교인이 그런 사람들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어리석어 보이는 십자가가 생명의 길이라고 고백하면서도 우리는 십자가의 길을 한사코 외면하고 있습니다. 이야기가 너무 자학적인 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실상을 바로 보는 것이 변화의 시작이 아니겠습니까? 허점 많은 생각을 두서없이 피력한 까닭은 배움에 대한 열망 때문입니다. 질정해주시기 바랍니다. ● 천진함이 깃든 눈길 어제는 주일 예배를 마친 후 가까운 이웃에 사시는 어느 할머니 댁을 방문했습니다. 병상세례를 베풀기 위해서였습니다. 팔순이 넘으신 늦으신 나이에 신앙에 입문하신 분인데, 그만 증손자를 업어주다가 넘어지셔서 기동을 못하고 계십니다. 몇 해 전 댁으로 찾아갔을 때 할머니는 마음의 짐을 부려놓듯이 당신이 교회에 다니기로 작정한 까닭을 설명하셨습니다. 교회와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두고 수 십 년을 살았는데, 어느 날부터인지 주일마다 들려오는 찬송소리가 당신을 부르는 소리로 들리더랍니다. 그래도 선뜻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망설였는데, 그만 이 지경이 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후에 저는 가끔 할머니 댁에 들러 살아오신 이야기도 듣고, 기독교에 대한 이야기도 들려드리곤 했습니다. 일주일에도 몇 번씩 할머니를 방문하는 전도사님이 어느 날 할머니에게 병상 세례를 드릴 수 있겠느냐고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당사자가 원하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약식으로나마 세례 교육을 하고 마침내 세례식을 거행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신앙의 배경이 전혀 없던 집안인지라 신앙공동체의 일원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를 알려드리고 싶어 교역자들과 장로님 그리고 권사님 몇 분이 함께 동행했습니다. 저는 일부러 가운으로 갈아입고는 찬송가를 몇 장 불렀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할머니의 눈가에 눈물 한 방울이 맺히는 것을 저는 보았습니다. 기도와 간단한 문답을 마친 후 할머니의 머리에 손을 얹어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기력이 소진되어 수척해진 그의 몸과 마음에 그리스도의 평화가 깃들기를 간구했습니다. 축하의 인사를 드리라며 곁에 있던 전도사님을 바라보니 황망히 눈물을 닦고 계셨습니다. 평소에는 감정을 잘 통제하시던 분인데, 아마 감동의 눈물이었을 것입니다. 언젠가 할머니의 병상에 다녀온 전도사님이 환히 웃으며 내게 말했습니다. "할머니가요, 당신이 앞서 하나님께 가게 되면 ○○○ 전도사님을 잘 돌봐달라고 특별히 부탁을 하겠대요". 할머니는 외로운 당신의 병상을 자주 찾아오시는 전도사님이 그렇게 고마웠던 것이지요. 그보다 더 큰 축복은 없겠다고 말하자 전도사님은 행복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동행한 이들이 축하의 인사와 함께 준비해 간 꽃다발을 품에 안겨 드리자 할머니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떠올랐습니다. 기력이 다해 세상에 대한 애착도 미련도 다 버린 때문일까요? 할머니의 눈빛은 맑고 고왔습니다. 그리고 선했습니다. 아이에게서 볼 수 있는 천진함이 깃든 그 눈길은 구원의 빛으로 고요했습니다. 그 할머니는 돈과 명예와 삶에 대한 과도한 애착이라는 의붓아버지를 떠나 참 아버지의 품에 안긴 것 같습니다. 언제쯤이면 의붓아버지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누가복음에 나오는 탕자는 가진 것을 다 탕진했을 때 비로소 제 정신이 들었습니다. 햇빛이 스러지기 전에 의붓아버지로부터 돌아설 용기를 내야겠습니다. 밤 시간의 일부를 명상과 기도와 수련에 바치고 있다지요? 우리가 다시 만날 때쯤이면 서로를 괄목상대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이곳은 삼복 더위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가까이 계시면 수박이라도 한 통 나누면서 정담을 나눌 텐데, 마음으로나마 건강을 기원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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