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하늘땅사람이야기17: 생명은 죽음이 있어 아름답다 2005년 06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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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은 죽음이 있어 아름답다 정 선생님, 모처럼의 고국 나들이가 즐거우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분주한 일정 가운데서도 잊지 않고 찾아주셔서 고마웠습니다. “有朋自遠方來면 不亦樂乎아!” 지적 배움에도 열심이지만 인간적 배움에도 열심인 정 선생님과의 만남은 늘 제가 선 자리를 다시 한번 확인해보는 기회가 되니 고마울 따름입니다.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들을 남김없이 기록하려고 애쓰시는 그 열정이 참 부럽습니다. 그것이 개인적인 비망록을 넘어 사회적인 자산이 되는 순간을 나는 기다리고 있습니다. 최근에 일본에 대해 다시 공부하신다고 하셨지요? “일본을 보니 아버지의 삶을 알 것 같고, 심지어는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나 자신의 모습까지도 보인다”는 말씀을 들으면서, 내 속에 어렴풋이 새겨진 타자의 얼굴을 생각했습니다. 세월이 지나면 나를 더 밝게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갈수록 오리무중입니다. 어느 거울에 비춰야 내 모습이 제대로 보일는지요? • 탈주에 대한 욕망 다녀가신 후에 교회 마당가에는 접시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철모르는 코스모스도 몇 송이 피어나 뜨거운 폭양을 견디다가 그만 꽃잎을 떨구곤 합니다. 요즘도 파리의 골목 골목을 천천히 거닐고 계시겠지요? 언젠가는 그 느긋하고 창조적인 배회에 나도 동참해보고 싶습니다. “걷기란 소유로 조각난 땅을 깁는 행위”라는 말과 만났을 때, 저는 걷기가 단순히 건강증진을 위한 운동이 아니라 문화적 실천이 될 수도 있음을 알았습니다. 두 달 전에 이사한 집에서 교회까지 걷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빠른 걸음으로 20분 정도 걸리는 가까운 거리입니다만, 그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삶의 풍경은 다양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아파트촌도 지나고, 철로 변에서 살고 있는 가난한 이웃들의 삶에도 눈길을 던지게 됩니다. 자동차에 과일을 진열해놓고 손님이야 오든 말든 장기판만 골똘히 들여다보고 있는 아저씨에게 오늘은 돈 많이 벌었냐고 핀잔 섞인 질문을 던지기도 합니다. 구멍가게 앞에 내놓은 파라솔에 둘러앉아 주거니받거니 하다가 불콰한 낯빛으로 지나가는 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이들을 보면 빙그레 웃으며 인사를 건네기도 합니다. 어느 집 담벼락 위로 화려하게 피었다가 허망하게 꽃잎을 떨군 노랑넝쿨을 바라보며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 동안 너무 바쁘게 살았습니다. ‘느린 삶’에 대해 강연해달라는 방송국의 부탁을 거절한 어느 철학자는 느림에 대해서 말하기 위해 바빠지기 싫었다고 말하더군요. 그의 말이 참 신선했습니다. 어찌 보면 삶의 클라이맥스라 할 수 있는 때에 세상일에 길들여지기를 거절하고 자발적 소외를 선택한 정선생님의 결정도 그런 것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사실 길들여진다는 것보다 무서운 것은 없습니다. 대접받는 일에 익숙해지고, 침묵과 절제된 행동보다는 달변과 과장된 표정으로 사람들을 대하는 내 모습이 싫어질 때가 많습니다. 길들여짐은 평안과 안락을 약속하지만, 실은 그것이 영혼의 감옥임을 모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에게서 느껴지는 낯섦, 되고 싶은 나와 현실의 나 사이의 거리…. 시인 이상의 <거울>이라는 시가 관념이 아니라 현실로 다가오는 요즘입니다. “거울속의나는왼손잡이오/내악수를받을줄모르는-악수를모르는왼손잡이요”. 이 기막힌 뒤집힘이 때로 힘겨울 때가 있습니다. 탈주에 대한 욕망이 슬그머니 제 옷깃을 잡아당깁니다. 시간을 내서 파리에 한번 다녀가라는 말씀에 솔깃했던 것도 그런 답답함 때문일 겁니다. •산책을 잃으면 마음을 잃은 것 언젠가 댁으로 찾아갔을 때, 정 선생님은 내게 함께 산책을 하지 않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좋지요” 하고 따라나선 산책길에서 나는 오랫동안 정 선생님의 눈길을 받고 있던 나무들과 텅 빈 운동장, 그리고 한적한 길과 만났습니다. 저는 그런 느릿느릿한 산책이 정 선생님의 삶과 사유의 원천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물녘 집 옆에 놓인 나무 의자에 앉아 칸트의 저녁산책과 하이데거의 ‘홀쯔베게’(Holzwege), 그리고 정 선생님의 산책을 생각했습니다. 그때 이문재 시인의 <저녁산책>이라는 시가 떠올랐습니다. [마음은 저만치 흘러나가 돌아다닌다 또 저녁을 놓치고 멍하니 앉아 있다 텅 빈 몸 속으로 밤이 들어찬다 이 항아리 안은 춥다 결국 내가 견뎌내질 못하는 것이다] 이 시구는 거울이 되어 고요함 없이 떠돌고 있는 내 마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곳에 있으면서도 저기를 서성이는 마음이 가련했습니다. 내 마음의 떠돎은 일상으로부터의, 습관으로부터의 탈주를 향한 유목적 배회가 아니기에 떠돌면 떠돌수록 마음은 파리해져갑니다. ‘또 저녁을 놓치고 멍하니 앉아 있다’. 시인의 심정이 이해가 됩니다. 그래서인가요? 마음이 참 춥습니다. 진동한동 지내다보니 마음이 너무 작아졌습니다. 언제부터 이 지경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헤로도토스가 <<역사>>에서 들려주는 이야기는 활달한 정신의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스파르타인 디에네케스는 페르시아 군이 쏜 화살이 어찌나 많은지 태양이 가려질 정도라는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말합니다. “트라키스에서 온 객이여, 그대는 우리에게 즐거운 소식을 전해주었소. 메디아 군이 태양을 가려 준다면 우리는 그늘에서 싸울 수 있지 않겠소.” 무모하다고 해야 하나요, 아니면 용감하다고 해야 하나요? “산책을 잃으면 마음을 잃은 것/저녁을 빼앗기면 몸까지 빼앗긴 것”이라는 시인의 말에 자극 받아, 잠시 바깥에 나가 얼바람맞은 사람처럼 집 주변을 어슬렁거렸습니다. 하지만 ‘나’로부터 해방될 수 없었습니다. 가끔 이럴 때가 있습니다. 몸이 아니라 정신으로만 살아가는 이에게 혹사당한 마음이 가하는 징계가 아닌가 싶어 피식 웃었습니다. 부유하는 마음을 가만히 지켜봄으로써 그것을 고운 재처럼 가라앉히고, 몸을 꼿꼿이 세우는 것이 산란한 마음에서 벗어나는 길임을 모르지는 않지만 그 일조차 귀찮은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마음이 괴롭다며 찾아온 제자에게 ‘그 마음’을 가져오라고 했다던 어느 스님의 말을 떠올리고 있는데, 허리가 잔뜩 굽은 할머니 한 분이 힘겹게 언덕을 올라오고 계셨습니다. •자연스런 생명의 과정 세월의 무게가 내려앉은 듯한 그 할머니의 굽은 허리를 안쓰럽게 바라보다가 엘리어트의 <황무지> 헌사에 나오는 쿠마의 무녀가 생각났습니다. “쿠마의 한 무녀(巫女)가 조롱 속에 매달려 있는 것을 내 눈으로 보았다. 그 때 아이들이 ‘무녀, 당신은 무엇이 소원이오?’ 라고 묻자, 그녀는 ‘난 죽고 싶다’라고 대답했다.” 아폴로 신의 사랑을 받던 무녀는 소원을 들어주겠다는 신에게 손안에 든 먼지만큼 많은 햇수를 살게 해달라고 빌었습니다. 신은 무녀가 더 좋은 것을 구하지 않은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했지만 무녀의 소원을 들어주었습니다. 그러나 무녀는 젊음을 유지하게 해달라는 청을 잊고 말았습니다. 무녀는 늙어 꼬부라져 조롱 속에 갇힌 채 아이들의 구경거리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사람의 과도한 욕망이 빚어낼 수밖에 없는 슬픈 이미지입니다. 태어나고, 자라고, 성장이 멈추고, 늙고, 죽는 것은 자연스런 생명의 과정입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 인위적인 간섭이 가해지면서 생명의 리듬이 파괴되고 있는 것 같아 심히 안타깝습니다. 언젠가 잡지에서 본 판화가 생각납니다. 대부분의 땅콩 꼬투리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는데, 꼬투리 몇 개는 줄기를 끈덕지게 붙들고 있는 그림이었습니다. 그 아래 작가가 붙인 제목이 걸작입니다. <덜 떨어진 놈>. 그 제목을 보는 순간 저는 크게 웃었습니다. 우리가 가끔 사용하는 덜 떨어진 놈이라는 말의 의미가 그보다 명확하게 드러날 수는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이형기 선생님의 시 <낙화>에 나오는 한 대목을 들어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지를/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연세가 드실수록 영혼이 가벼워지는 분들이 더러 계십니다. 그런 분들을 볼 때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참 좋은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잘 아시겠지만 지금 이 나라는 황우석이라는 이름의 주술에 빠져있습니다. 배아줄기세포 연구에서 놀라운 결과를 얻고 있는 그에게 열광하는 것은 언론계나 불치병을 앓고 있는 환자들과 그 가족들 뿐만이 아닙니다. 정치인들도 그와 사진을 찍느라 야단입니다. 비유를 즐겨 쓰는 그의 화법을 두고 언론은 그에게 ‘언어의 연금술사’라는 새로운 이름을 부여했습니다. 지금 그의 인기는 욘사마를 능가합니다. 그런데 환하게 웃는 그의 얼굴이 왜 그리도 낯설게 느껴지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120살은 문제없게 되었다며 희희낙락입니다. 정말 이렇게 아무런 유보없이 즐거워해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의 연구에 대해 우려섞인 반응을 내놓는 것은 역시 종교인들입니다. 한국 가톨릭의 수장인 정진석 대주교는 생명윤리의 관점에서 그의 연구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과학기술 시대의 생명 논점은 여러 가지입니다. 하나는 인간의 배아를 하나의 존엄한 생명으로 여길 수 있느냐에 대한 논란입니다. 가톨릭은 배아는 이미 개별적인 존재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종교인들의 관심이 주로 향하는 것은 이 부분입니다. 생명은 본시 하나님께 속한 것인데, 그 생명의 발생과정에 인위적인 조작을 가하는 것은 하나님의 질서에 대한 반역이라는 것이지요. 여기에 대해 인간의 지식과 기술도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논리를 내세우는 이들도 있습니다. 또 다른 논란은 이런 연구의 결과물들이 빚게 될지도 모르는 미래의 혼돈에 집중되고 있습니다. 지식이나 기술은 개뱔되는 순간 자율성을 갖게 됨을 우리는 잘 압니다. 기술의 미래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기술의 개발을 위해서는 막대한 돈이 투입되어야 합니다. 돈이 권력인 것은 다 아는 사실인데, 돈을 투입한 권력은 또 다른 방법으로 사람들을 지배하려 할 것이 분명합니다. 얼마 전에 읽은 테드 창의 소설집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 실린 중편 <일흔두 글자>는 인구의 건전성을 확보한다는 미명하에 생명조작에 나서는 권력자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소설적 허구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조만간 우리의 삶 속에서 벌어질 현실임을 생각할 때 두려운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네요. 그리스어로 기술을 ‘테크네’(techne)라고 하더군요. 철학자 하이데거는 기술이란 모든 존재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고유한 특성을 현출(顯出, hervorbringen)하도록 돕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닭이 알을 잘 낳도록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고, 땅이 소산물을 잘 낼 수 있도록 지심을 북돋워주는 것이 기술이라는 것이지요. 그런 소박한 기술은 존재자들간의 조화를 중시합니다. 그에 비해 근대 이후의 기술은 존재자들을 닦달하는(herausfordern) 과정입니다. 닭에게 성장촉진제를 먹이고, 땅에는 화학비료를 뿌려대는 것이지요. 문제는 생산력의 증대는 생동하는 생명을 위축시킨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도 많고, 논란도 많지만 과학은 제 갈 길을 가겠지요? 저는 이런 논란의 배후에 있는 우리 시대의 두려움을 보고 있습니다. 그것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사람에게 확실한 것은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이고, 불확실한 것은 그것이 언제인지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생물학적 죽음은 인간이 영원히 극복할 수 없는 한계상황입니다. 이것은 외면한다고 극복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과학은 그 죽음의 시간을 할 수 있는 한 연기하는 기술을 터득하려고 안간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처갓집과 뒷간은 멀수록 좋다는 옛말처럼, 사람들은 죽음을 가급적이면 멀리 떼어놓고 싶어합니다. 그래서인가요? 죽음을 처리하는 과정까지도 자본이 관여합니다. 이제 사람들은 가족들의 장례조차 전문가들에게 맡겨버립니다.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고, 시체에서 나는 퀴퀴한 냄새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주검을 깨끗하고 간단하게 처리하고 각자의 삶의 자리로 돌아갑니다. 나는 죽음의 그늘을 말끔하게 걷어낸 후에 다가올 세상이 두렵습니다. 죽음이 있어 삶이 아름답다는 말을 하려면, 눈흘김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어느 정도 살아야 만족할 수 있는 것일까요? 저는 삶이 결국은 미완성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서 오히려 안도감을 느낍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생명의 기회를 선용하면서 열심히 살아야 하지만, 때가 되면 결과에 관계없이 홀가분하게 손을 털고 갈 수 있다는 것, 이게 복이 아닌가요? 죽음이라는 그늘을 제거해버린 문화가 과연 건강한 것인지 저는 확신할 수가 없습니다. •생명은 비상한 명령 옛 선비들은 자제문(自祭文)을 지어놓고 살았다 합니다. 죽음에 대해 의식하면서 거꾸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물은 것이겠지요. 생명은 본래 무상한 존재에게 주어진 비상한 명령일 터입니다. 무상하기에, 더욱 찬란한 것이겠구요. 꽃이 아름다운 건 한철 흐벅지게 피었다가 때가 되면 갈 곳으로 돌아가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이제는 정말 잘 살고 싶습니다. 잔 카를로 메노티의 말이 제게 북소리처럼 들려옵니다. “신이 우리가 어쩌면 이룰 수도 있었을 모든 일과 우리가 허비해버린 모든 재능을 우리에게 보여줄 때, 지옥은 시작된다…내게 지옥의 의미는 ‘너무 늦었어’라는 두 단어에 담겨 있다.” 어제 아침 아무도 없는 교회 사무실에 앉아 오지 않는 글을 기다리며 하염없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뒤꼍으로 열린 문밖에서 까치가 껑충거리고 있었습니다. 고개를 빼고 가만히 내다보니, 조그마한 생쥐 한 마리를 쪼아대고 있었습니다. 그 광경을 카메라에 담아보려고 잠시 한눈을 판 사이에 까치는 생쥐를 물고 재빨리 담장 너머로 날아가고 말았습니다. 그야말로 삶과 죽음이, 유와 무가 지호지간이었습니다. 산책에서 비롯된 넋두리가 황우석 교수를 거쳐 삶에 대한 다짐에까지 이르렀네요. 집으로 올라와 정 선생님의 책을 열었습니다. 그곳에서 만난 젤린스키의 시로 인사를 대신합니다.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생각해 보라. 붉게 물든 석양을 바라볼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쁘게 살고 있지 않는가? 만일 그렇다면 생각을 바꾸어라. 가던 길을 멈추고 노을진 석양을 바라보며 감탄하기에 가장 적당한 순간은, 그럴 시간이 없다고 생각되는 그때이다.] 하지를 향한 태양의 질주가 뜨겁습니다. 건강에 유의하시고, 산책길에서 얻는 일상의 보화를 잘 갈무리하시기를, 그리고 보고 듣는 모든 것들을 영혼의 양식으로 삼으시길 빌겠습니다.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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