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하늘땅사람이야기16: 페르조나와 그림자 2005년 05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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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조나와 그림자 ● 사랑에 대한 역설적 희구 남 선생님, 다소 홀가분한 표정으로 제 방을 떠나는 남 선생의 뒷모습을 보면서 저는 화살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의 마음에 깃들었던 사랑이 미움으로 바뀌지 않게 해주십시오. 그가 겪어야 할 번민의 시간을 영적인 성숙의 기회로 만들어 주십시오." 처음 남선생이 쓸쓸한 목소리로 상담을 청했을 때 솔직히 마음이 내키지 않았습니다. 낯모르는 사람의 삶의 내력을 듣는 일도 고통이려니와, 그의 상황에 맞는 충언을 해줄 수 있을지 확신할 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전화를 끊고 나서 제 마음에 얼른 떠오른 것이 사르트르였습니다. 어느 날 한 젊은이가 번민을 안고 그를 찾아왔습니다. 젊은이의 마음은 조국을 위해 레지스탕스 운동에 가담하고 싶다는 욕구와 어머니를 돌보아 드려야 한다는 현실적인 책임감 사이에서 찢기고 있었습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사르트르의 대답은 "당신 뜻대로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너무 냉담한 반응인 듯 싶어 당혹스러워 하는 독자들에게 사르트르는 말합니다. 충고를 구하는 사람은 길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결정을 추인해주는 어떤 권위를 찾고 있다고 말입니다. 다시 말해 그는 내심으로는 이미 결정을 하고 왔다는 것이지요. 근 30년쯤 전에 그 글을 읽었고, 목사로 살아온 지도 20년이 넘었으니까 저는 그 동안 꽤 많은 사람들의 상담자 역할을 해온 것 같습니다. 때때로 사르트르의 말이 떠오를 때도 있었지만 나는 한번도 "당신 뜻대로 하라"고 하지 못했습니다. 그 상황에서 가장 좋은 선택이 뭘까를 고민했고, 나름대로의 관점을 가지고 길을 가리킬 때도 있었습니다. 사르트르가 보면 어리석다고 웃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내 의견을 구하러 온 사람에게 내 나름의 답은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입장의 동일함이 전제되지 않은 이해는 불가능합니다. 삶의 자리에 따라서 생각하는 방식이 확연히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상대방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소통을 지레 포기하는 일이기에 더욱 나쁜 것이 아닐까요? 남 선생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가슴이 아팠습니다. 홀연히 찾아온 사랑 때문에 속앓이를 하는 사람이 어디 남 선생뿐이겠습니까만, 지성으로 다가서서 이제는 좀 거리가 좁혀졌겠지 하는 순간 상대가 꼭 그만큼 뒷걸음질치는 모습을 볼 때의 심정이야 오죽하겠습니까? 참 알다가도 모를 것이 사람 마음입니다. 한편의 이야기만 듣고 그 관계를 판단할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저는 잠자코 남 선생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는 남 선생의 파트너가 참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린 시절에 받았던 학대의 기억은 결코 과거지사일 수 없습니다. 그것은 지금의 삶을 불구로 만드는 악마적 힘이 되기도 합니다. 남 선생 곁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곤 하는 그 반복적 행위의 이면에는 안정적 사랑에 대한 역설적인 희구가 숨어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사랑하고 싶지만, 사랑에 빠질 수 없는 그 기막힌 현실을 그분은 견딜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나는 한번도 본 적이 없는 그분이 현실에 대한 공포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혹은 자신을 통제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닐까 싶었어요. ● 지속을 본질로 하는 사랑 이제는 좀 화가 난다고 하셨습니다. 지쳤다고도 하셨습니다. 내적인 아름다움보다 외적인 꾸밈에 더 마음을 쓰는 그분이 딱하다고도 하셨습니다. "부싯돌도 두 개가 있어야 불꽃을 만들 수 있지요. 한 개의 돌만으로 어찌…". 말끝을 흐리는 남 선생의 눈망울에 고였더랬습니다. 그래서 저는 남 선생의 속상한 마음에 새겨진 사랑을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 사랑은 한쪽으로 기울어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사랑은 어느 쪽에서 보더라도 항상 똑같아야 한다는데, 그렇지 못하니까요. 그래도 그 사랑을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이 남 선생의 속마음이었습니다. 내가 남 선생께 '긍휼히 여기면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던 것도 그 마음을 읽었기 때문입니다. 자비慈悲라는 말을 생각해 보세요. '사랑할 자慈'는 상대의 마음이 되는 것, 그래서 그의 유익을 구하는 마음입니다. '슬플 비悲'는 그를 위해 애태우는 마음이겠지요. 어느 분이 "초는 자기 몸을 태워 빛을 발하지만, 사람은 이웃을 위한 애태움을 통해 빛을 발한다"고 하셨어요. 그렇다면 빛이란 결국 자비의 마음 그 자체인지도 모르지요. 하나님의 사랑을 뜻하는 'compassion'이라는 단어 속에는 사랑하기에 함께(com) 아파하는(passion) 그분의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아픈 사랑이 물적으로 드러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이외수 선생은 "사랑을 달콤하다고 표현하는 사람은 아직 사랑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다소 길지만 그의 글을 인용하겠습니다. [그대가 만약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자신을 백미터 선수에 비유하지 말고 마라톤 선수에 비유하라. 마라톤의 골인지점은 아주 멀리에 위치해 있다. 그러므로 초반부터 사력을 다해 달리는 어리석음을 삼가라. 그건 백미터 선수에 해당하는 제비족들이나 즐겨 쓰는 수법이다. 그러나 그대가 아무리 적절한 힘의 안배를 유지하면서 달려도 골인지점을 통과하기 전까지는 계속적으로 고통이 증대된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따라서 계속적으로 증대되는 고통을 감내하지 못한다면 아직은 선수로서의 기본정신이 결여되어 있는 수준임을 명심하라. 진정한 마라톤 선수는 달리는 도중에 절망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의 절교선언이나 배신행위에 개의치 말라. 사랑은 그대 자신이 하는 것이다. 진정한 마라톤 선수는 발부리에 음료수 컵 따위가 채이거나 눈앞에 오르막 따위가 보인다고 기권을 선언하지 않는다. 그대도 완주하라. 그러나 마라톤에서의 골인지점은 정해져 있지만 사랑에서의 골인지점은 정해져 있지 않다. 경우에 따라서는 한평생을 달려도 골인지점에 도달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다. 사랑은 그대의 한평생을 아무 조건 없이 희생하는 것이다. 그러기에는 자신의 인생이 너무 아깝고 억울하다면 역시 진정한 사랑을 탐내기에는 자격미달이다.](<<내가 너를 향해 흔들리는 순간>> 중에서) 사랑은 참 어려운 것이네요. 작가의 말대로라면 저도 선수로서의 기본정신이 결여되어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어요. 최초의 사랑은 감성적인 이끌림으로 시작되는 것이지만, 의지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사랑은 그을음만 남기고 사위는 불꽃과 같은 것이겠지요. 남 선생은 그러니까 지난한 과정에 발을 들여놓으신 셈입니다. 지아비를 버리고 외간 남자를 따라가곤 하는 여인 고멜을 사랑하라는 말씀 앞에서 호세아의 느꼈을 아득함이 떠오릅니다. 사랑의 집은 사랑하는 이들이 함께 겪어낸 시간이 덧쌓여 이뤄낸 구축물이 아닐까 싶습니다.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 따뜻함과 차가움, 사랑과 미움, 감사와 원망이 뒤섞이며 이뤄낸 아늑한 공간, 그곳이야말로 창조적 생명의 뿌리일 겁니다. 분 초를 다투는 가속의 시간에서 살아가면서 시퍼렇게 멍든 사람들의 가슴은, 지속을 본질로 하는 사랑이 아니고는 회복될 길이 없을 겁니다. 아, 하지만 사랑조차 일회용품처럼 소비되고 마는 오늘의 현실은 얼마나 참혹한 것입니까? 그런 의미에서 남 선생의 순애보적인 사랑은 아름답습니다. ● 상처를 받아들이려는 열린 마음 하지만 한가지 염려되는 것이 있습니다. 상대를 위해 바친 자신의 노력과 정성을 저울에 올려놓는 순간 사랑은 그 황홀한 빛을 잃고 잿빛으로 변하고 맙니다. 어떤 일이든 마찬가지일 겁니다. 부모들도 가끔 철없는 자식들이 원망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그런 때면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하는 말이 절로 터져 나옵니다. 가끔 교회에서 시험에 드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대개 교회 일에 헌신적으로 동참하던 이들입니다. 마음을 담아 일을 해보지 않은 이들은 시험에 들 일도 별로 없습니다.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쌍방적인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아' 하면 그가 '어' 하고 반응하기를 바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내 마음에 기쁨이 있어 사랑의 수고를 했다면 그것으로 됐지, 보상을 기대하는 것은 삶의 군더더기가 아닐까요? 산음山陰에 살던 왕휘지가 잠에서 깨어나 창문을 열어보니 온통 흰 빛이었습니다. 밤 사이에 큰 눈이 내렸기 때문입니다. 그는 술을 따르라 명하고는 일어나며 거닐면서 좌사左思의 <초은시招隱詩>를 외다가 갑자기 벗인 대규戴逵 생각이 났습니다. 이때 대규는 섬계剡溪에 있었습니다. 그는 작은 배를 타고 밤새 가서 대규 집 문 앞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그는 들어가지 않고 돌아섰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 까닭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내가 흥이 일어 왔다가 흥이 다하여 돌아가니, 어찌 꼭 대규를 보아야 하는가?" <<세설신어>>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처음 이 글을 대했을 때 왕휘지의 태도가 '쿨'하다고 느꼈습니다. 우리가 이런 마음으로 살면 원망할 일도 없을 것 같습니다. 자기를 열어 누군가와 관계를 맺으며 살다보면 상처받기 쉽습니다. 상처가 두려워 마음의 빗장을 지르고 사는 사람들도 있어요. 하지만 어차피 살아간다는 것은 상처를 주고받는 것이고, 또 그것을 치유해 가는 과정일 텐데 상처를 받아들이겠다는 열린 마음으로 살아가야 속이 편안해질 것 같아요. 선택의 여지도 더 많이 생길 거구요. 그런데 저는 남 선생에게서 위기의 징후를 보았습니다. 그것을 뭐라 해야 할지…굳이 말하자면 '큰아들 콤플렉스'라고 할까요.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 아시지요? 대개 사람들은 집을 나가서 방탕한 세월을 보내다 돌아온 '작은아들'과 그를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받아들인 '아버지'에게 눈길을 주지만, 나는 큰아들에게서 나의 모습을 봅니다. 그는 아버지의 마음 아픔을 헤아릴 줄 아는 철든 아들입니다. 아버지의 명을 어기지 않습니다. 언행도 가지런하고, 낯빛도 공손했을 겁니다. 누가 보아도 그는 맏아들다웠겠지요. 하지만 동생이 돌아오자 모든 것이 일순간에 변하고 맙니다. 한마디로 폭발하는 거지요. 그는 동생과 자기를 비교합니다. 도덕적 우월성이 자기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아버지의 태도를 납득할 수 없습니다. 자기를 위해서는 염소 새끼 한 마리 내준 일이 없던 아버지가 가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동생을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다니 이건 말이 안 된다는 겁니다. 이런 항변을 가만히 듣고 있던 아버지의 말씀은 큰아들의 삶이 어디에서 어긋났는지를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으니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다 네 것이다. 그런데 너의 이 아우는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으니, 즐기며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눅15:31-32) 그는 아버지 집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어떻게 된 일일까요? ● 자기 분열을 넘어 칼 구스타프 융은 사람은 '나'(자아)를 가지고 있고 그것을 통하여 바깥 세상과 어울릴 뿐 아니라, '나'를 통해 자기 마음 깊은 곳을 살핀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자아의식 속에는 '우리'라는 집단적 견해, 집단적 가치관 또는 행동규범이 들어와 있대요. 사람들은 집단이 개인에게 강요하는 가치관이나 행동 규범을 마치 자기 것인 양 착각하는 경우가 생긴다는 거지요. 이렇게 집단 속에서 살아가는 가운데 집단이 요구하는 태도, 생각, 행동규범, 역할을 분석심리학은 페르조나(Persona, 가면)라고 불러요. 사람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여러 가지 페르조나를 썼다 벗었다 하면서 집단에 적응해나가는 것이지요. 제가 말하는 '큰아들 콤플렉스'는 그러니까 자기의 페르조나를 자기와 동일시하는 데서 생기는 자기 분열의 징후입니다. 착한 아들, 철든 아들이라는 페르조나의 밑에서 내적 인격은 곪아가고 있던 것이지요. 내적 인격과 외적 인격의 틈이 벌어지면서 그는 병든 사람이 되었습니다. 동생을 보고 그가 그렇게 화를 내는 것은 동생의 모습이야말로 자기의 '그림자'이기 때문입니다. 자아의 어두운 면인 그림자는 자아로부터 배척되어 무의식에 억압된 성격입니다. 자아의식이 한쪽 면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그림자는 그만큼 반대편 극단을 나타낸다지요? 지나치게 도덕적인 사람의 내면에는 일탈에의 욕망이 들끓고 있을 가능성이 많다고 봐야 할 겁니다. 예수님은 형제나 자매에게 성내는 사람은 누구나 심판을 받는다고 말했습니다(마5:22). 우리가 형제나 자매에게 성을 내는 것은 어쩌면 그들에게서 자신의 그림자를 보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어요. 그러니까 성을 내는 행위 자체가 자기에 대한 심판인 셈이지요. 걸핏하면 화를 내는 사람, 남에 대해서 이러니 저러니 말이 많은 사람, 오만한 태도로 사람을 주눅들게 하는 사람일수록 자기 속에 상처가 많다고 봐야 할 거예요. 사람의 성숙이란 자기 속에 있는 그림자를 의식에 동화시키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마음공부를 하는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마음을 지켜보는 일이에요. 희노애락애오욕의 온갖 감정이 자기 속에서 일어났다가 스러지는 것을 지켜보다 보면, 그 감정의 노예살이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지요. 화가 불쑥 치밀어 오를 때 화를 내고 있는 자기를 가만히 지켜보다 보면 저절로 화가 삭게 되지 않던가요? 어쩌면 이것이 그림자를 의식에 통합하는 과정이 아닐까요? 남 선생님, 너무 착한 사람이 되려고 하지 마세요. 말이 좀 이상하지요. 그렇다고 이 말이 화 잘 내는 사람이 되라는 말이 아닌 것은 아시지요? 자기의 이미지에 집착하며 살다보면 겉으로는 그럴싸하게 보여도 내면은 황폐하게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에요. 내적인 여백이 적어질수록 작은 상처에도 큰 신음소리를 내게 되는 거지요. 두 분이 함께 지내온 세월이 벌써 여러 해이지만, 미루어 짐작하기를 바랐을 뿐 서로의 내면을 응시하는 노력은 게을리 했다고 하셨지요? 사랑은 상처받기를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자기의 취약함을 드러내는 용기가 아닐까요? 그분에게 남 선생은 언제라도 돌아가 쉴 수 있는 언덕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언덕이 그리 든든한 것이 못된다는 사실을 이제는 알려야 합니다. 취약함을 나눌 수 있을 때 진정한 관계가 시작되는 것이니까요. 허수경의 시 하나 들려드릴께요. 가지에 깃드는 이 저녁 고요한 색시 같은 잎새는 바람이 몸이 됩니다 살금살금, 바람이 짚어내는 저 잎맥도 시간을 견뎌내느라 한 잎새에 여러 그늘을 만드는데 그러나 여러 그늘이 다시 한 잎새 되어 저녁의 그물 위로 순하게 몸을 주네요 나무 아래 멈춰서서 바라보면 어느새 제 속의 그대는 청년이 되어 늙은 마음의 애달픈 물음 속으로 들어와 황혼의 손으로 악수를 청하는데요 한 사람이 한 사랑을 스칠 때 한 사랑이 또, 한 사람을 흔들고 갈 때 터진 곳 꿰맨 자리가 아무리 순해도 속으로 상처는 해마다 겉잎과 속잎을 번갈아내며 울울한 나무 그늘이 될 만큼 깊이 아팠는데요 (<청년과 함께 이 저녁> 부분) 시인은 계속해서 산다는 것은 어쩌면 서로에게 기대면서 견디어내고 버티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겠냐고 말합니다. 그렇지요. 미우니 고우니 해도 사랑할 사람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사랑은 아프지만, 그 아픈 사랑을 통해 더 튼실한 삶의 집을 짓게 되니 그 또한 고마운 일이지요. 그분이 돌아올 수 있도록 품이 더 넉넉해지면 좋겠다고 하자, 남 선생은 눈물을 글썽이며 내 손을 덥석 잡고는 고맙다고 말했습니다. 어쩌면 남 선생이 듣고 싶었던 것은 흔들리는 마음을 붙잡아 줄 한 마디 말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요. 그 마음이면 됩니다. 또 다시 눈물을 흘려야 할지도 모르지만, 아프고 서러운 그분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송두리째 부둥켜안을 푼푼한 마음이 있다면 두려울 게 무엇이겠습니까. 모내기하는 손길들이 분주한 때입니다. 논에 심긴 여린 모를 보면 안쓰럽지만 곧 든든하게 뿌리내려 무성하게 자랄 것을 생각하면 흐뭇합니다. 아무쪼록 남 선생의 수고와 땀흘림이 아름다운 사랑의 열매로 맺히기를 기도합니다. 언젠가 활짝 웃는 낯으로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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