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고도는 오지 않는다 2005년 03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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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Godot)는 오지 않는다 (*이 글은 고 변선환 박사 10주기를 추모하여 변선환 아키브에서 개최한 모임을 위해 쓴 글입니다. 본격적인 비평이나 작품론으로 쓴 것이 아니라, 대화를 위한 실마리를 제공한다는 생각으로 쓴 글입니다) “엘리아드의 아름다운 문장 하나: ‘망명자는 누구나 이타카로 되돌아가고 있는 율리시스이다. 모든 생활은 오디세이, 이타카로 가는 길, 중심으로 가는 길의 모사이다. 망명자는 자기 방황의 감춰진 뜻을 통찰할 수 있어야 하고, 그것이 중심을 향한 입사적 시련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저마다 자신의 다리와 악으로 집으로 가고 있다.’”(김현, <<행복한 책읽기 > 중에서) ● 시간 속의 멀미 바람지기인 아이올로스는 아홉 살바기 황소의 가죽을 벗겨 만든 자루에 ‘울부짖는 바람들의 길들’을 단단히 묶어주며 순한 서풍의 입김으로 오뒤세우스 일행을 배웅했습니다. 오뒤세우스 일행은 밤낮으로 항해하여 열흘째 되는 날에는 벌써 고향 땅의 화톳불이 보일 만큼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지쳐 있던 오뒤세우스에게 달콤한 잠이 엄습한 것은 그때였습니다. 그 사이에 오뒤세우스의 전우들은 오뒤세우스가 아이올로스로부터 받은 가죽 부대 속에 황금과 은이 가득할 것이라고 수근거렸습니다. 궁금증을 이기지 못한 그들이 그 자루를 풀자, 온갖 바람이 터져 나와 그들의 배를 고향 땅에서 멀어지게 했습니다. 그들은 또 다시 아이올로스의 섬까지 떠밀려갔지만 아이올로스는 “내게는 축복받은 신들께 미움받는 인간을 보살펴 주거나 호송해 줄 권한이 없다”며 그들을 매몰차게 내쫓았습니다. 그들은 온갖 시련을 겪으며 항해하다가 마침내 아이아이아 섬에 닿게 되었는데, 그곳에는 머리를 곱게 땋은 키르케가 살고 있었습니다. 섬을 수색하러 갔던 전우들은 키르케가 주는 음식을 먹고 돼지로 변신했습니다. 그들은 돼지의 머리와 목소리와 털과 외모를 가지게 되었으나, 분별력만은 여전하여 전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전우들의 비극을 전해들은 오뒤세우스에게 헤르메스가 다가와 키르케의 마법을 뿌리칠 수 있는 약초 몰뤼를 주었습니다. 물론 오뒤세우스는 전우들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섬에 오랫동안 머물러야 했습니다. 저는 호메로스가 들려주는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인간의 소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돼지의 몸을 가지고 있지만 인간의 분별력과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아니 그보다 더 비극적인 것은 자기 생각을 표현할 언어를 상실했다는 사실입니다. 발화하는 순간 꿀꿀거리는 소리가 되고 마는 현실, 기막힌 전락입니다. 왕자의 사랑을 얻기 위해 언어를 포기하는 인어공주의 비극도 이런 것일 겁니다. 타락 이전의 본래적 존재에 대한 기억과 타락한 현존재 사이의 불일치 혹은 불화, 그리고 동료들에게 가닿을 수 없는 불모의 언어, 이것이야말로 시간 속에서 살아가는 소외된 인간에게 품부된 운명이 아닌가 싶습니다. 오뒤세우스의 부하들은 자신이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돼지로서의 운명을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고통스럽더라도 자기가 인간이었음을 끝끝내 기억할 것인가의 기로에 서 있었습니다. 문학은 기억의 고통을 자발적으로 선택함에서 발생합니다. 그것은 신학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비동일성의 자각에서 오는 고통과 목마름이 없다면 문학도 신학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모래시계처럼 줄어드는 시간의 한계에 갇혀 있지 않다면, 불안의 풍랑도 의혹의 구름도 일지 않는 지복의 세계에 머물러 있다면 유지해야 할 기억 혹은 회복해야 할 자리에 대한 탐색은 애초부터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문학과 신학은 리브가의 태 속에 있던 에서와 야곱처럼 뿌리가 하나입니다. 인간의 삶의 양상과 인식구조가 변함에 따라서 이야기의 구성원리가 점차 변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발생 초기의 문학은 신학적 담론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에서 신들의 이야기는 인간의 이야기와 더불어 조화롭게 등장합니다. 하지만 그리스 비극작가들에 이르면 상황은 조금씩 달라집니다. 신들은 아이스퀼로스의 비극의 전면에 나타나지만, 소포클레스의 비극에서는 조금씩 무대의 중앙에서 슬금슬금 물러서다가 마침내 에우리피데스에 이르면 신들은 단역 배우 신세가 되고 맙니다. 서정시의 등장은 신들의 황혼을 재촉한 것이라 할 수도 있겠습니다. 물론 이때도 세계는 신성한 힘에 의해 지배된다는 세계관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신화 시대에서 전설 시대로, 전설 시대에서 로만스적 고소설의 시대로 이행해가면서 신들의 자리는 점차 인간의 정신이 그리고 지상적 원리가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근대 소설은 사회와 개인의 갈등을 보여주면서 그 분열을 극복하려는 ‘개인’의 내면적 의지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 경향이 가속화되면서 사람들은 이러한 분열이 사회와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실존의 근원적 상황임을 점차 깊이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니체는 이런 경험을 <<비극의 탄생>>에서 현기증으로 표현했고, 사르트르는 ‘구토’라 표현했습니다. ● 카오스 앞에서 “조르바, 우리는 구더기랍니다. 엄청나게 큰 나무의 조그만 잎사귀에 붙은 아주 작은 구더기지요. 이 조그만 잎이 바로 지굽니다. 다른 잎은 밤이면 가슴 설레이며 바라보는 별입니다. 우리는 이 조그만 잎 위에서 우리 길을 조심스럽게 시험해 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잎의 냄새를 맡습니다. 좋은지 나쁜지 알아보려고 우리는 맛을 보고 먹을 만한 것임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이 잎의 위를 두드려 봅니다. 잎은 살아 있는 생물처럼 소리를 냅니다. 어떤 사람은―겁이 없는 사람들이겠지―잎 가장자리까지 이릅니다. 거기에서 고개를 빼고 카오스를 내려다봅니다. 그리고는 부들부들 떱니다. 밑바닥의 나락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알게 되지요. 멀리서 우리는 거대한 나무의 다른 잎들이 서그럭거리는 소리를 듣습니다. 우리는 뿌리에서 우리 잎으로 수액을 빨아올리는 걸 감지합니다. 우리 가슴이 부풀지요. 끔찍한 나락을 내려다보고 있는 우리는 몸도 마음도 공포로 떨고 맙니다. 그 순간에 시작되는 게……”(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중에서) 잎 가장자리까지 이르러 고개를 빼고 카오스를 내려다본 사람들의 공포에서 시작되는 게 뭘까요? 실존에 대한 자각이 아닐까요? 그것이 무엇이든 자기와의 대면을, 삶의 실상과의 대면을 회피하지 않는 영혼이라면 그 자리에 서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저는 변선환 선생님(*앞으로 언급하는 ‘선생님’은 모두 변선환 선생님을 지칭합니다)의 안내를 따라 그 가장자리에 섰던 두 정신, 윌리엄 포크너와 사무엘 베케트가 느꼈던 어지럼증을 따라가면서,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있는지를 찾아보고자 합니다. 윌리엄 포크너가 <<음향과 분노>>(*이것은 세익스피어의 <맥베드> 5막 5장에 나오는 맥베드의 대사에서 따온 제목입니다. “인생은 걸어 다니는 그림자에 불과하고, 자기가 등장하는 시간에는 무대 위에서 거드름피우며 왔다갔다 하지만 그 다음에는 더 이상 말을 누가 들어주지 않는 가련한 배우이다. 그것은 바보가 들려주는 이야기, 요란한 소리와 흥분으로 차 있지만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다.” 사실 ‘음향’이라는 번역어가 적절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에서 만들어낸 소설적 공간인 요크나파토오파군(郡)은 어쩌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축약 혹은 상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급격한 사회적 변화와 그에 따르는 정체성의 위기 혹은 정신적인 위기를 겪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세계, 바로 그곳이 요크나파토오파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요크나파토오파에서 벌어질 수 있는 일은 지금 이곳 서울에서도 벌어질 수 있습니다. 선생님은 이 소설의 주제를 ‘인간의 소외 상황과 그 구원’이라는 말로 압축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작가가 드러내고 있는 지방색은 “사실과 전혀 다른 지대, 곧 인간의 마음을 표현하기 위한 하나의 부대물에 불과”(<<현대신학과 문학>>, 170쪽) 하다고 말합니다. 저는 대체로 이 말에 동의하는 편이지만 ‘부대물’이라는 표현은 좀 과하다고 생각합니다. 차라리 지역적인 소재를 인간의 보편적인 문제에 접목시켰다고 말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요? 작품 속에는 어쩔 수 없이 작가 개인의 경험이 반영될 수밖에 없습니다. 도시든 시골이든 한 장소는 사람들의 기억과 가치가 고스란히 저정돼 있는 곳입니다. 포크너가 ‘요크나파토오파’와 그 주변 환경을 그리는 대목은 매우 사실적이고 또 섬세합니다. 그것을 인간의 마음을 표현하기 위한 배경으로 본다면 작품을 오독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오히려 요크나파토오파는 미국 북부의 산업화 과정과 전통적인 미국 남부의 전통적 공동체가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살아온 포크너의 삶의 이력이 그가 살아온 땅의 이력과 만나서 빚어낸 소설적 공간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그곳은 아름답고 풍요롭습니다. 하지만 그 위에서 영위되는 삶은 조화롭지 못합니다.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가 우리 앞에 제시하고 있는 공간은 황량합니다. 나무 한 그루가 서있는 시골길, 그리고 돌더미 하나, 그것이 전부입니다. 눈길이 머물만한 곳이라곤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 단순한 무대 이미지는 어떤 화려한 무대 이미지보다도 강력하게 사람들의 마음에 각인이 됩니다. 그곳은 일상성이 소거된 자리, 곧 추상성만이 주인노릇을 하는 관념적 공간입니다. 외부로 향한 시선이 가 닿을 데가 없으면 자신에게로 돌아오게 마련입니다. 광야에 나간 사람은 자기를 깊이 들여다볼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군더더기처럼 우리에게 덧붙여진 것들을 벗고, 자신의 알몸을 응시해야 하는 겁니다. 희곡의 첫 장면은 돌 위에 앉은 에스트라공이 구두를 벗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숨을 헐떡이며 애써보지만 번번이 실패합니다. 어쩌면 이것은 관습적인 시선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바라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환기시켜주는 행동이 아닐까요? 그런데 선생님은 베케트가 만든 이 무대공간을 “출구 없는 오늘의 현대판 지옥”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즉 “생의 의미를 상실한 허무주의의 감옥”이라는 것이지요(208쪽). 저는 이런 단정적인 규정이 좀 마음에 걸립니다. 물론 베케트는 시간과 공간의 원근법이 사라진 추상적 공간을 설정하고 그 위에 우리의 삶을 세워놓습니다. 흔히 베케트의 연극을 부조리극이라고 부릅니다. 부조리하다는 것은 삶의 목표가 사라졌다는 것이며, 자기 삶의 뿌리로부터 단절되어 있다는 말일 겁니다. 베케트는 그런 삶의 상황 가운데서 삶을 예술적으로 재현하는 일이 가능한가를 묻고 있습니다. 사실 베케트의 주인공들이 나누는 대화는 우리가 일상 중에 사용하는 언어가 아닙니다. 언어는 우리들의 경험을 누군가에게 전달하는 도구이기도 하지만, 그 자체로 어떤 의미를 구축하기도 합니다. 베케트는 기존의 텍스트가 현실을 재현하는 방식과 이데올로기적 편향에 대해 의문을 제기합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에스트라공에게 성경은 종교적 텍스트가 아닙니다. 성서를 읽어봤냐는 블라디미르의 질문에 에스트라공은 “한번 훑어본 것도 같다”며 이렇게 말합니다. “어쨌든 성지의 지도는 생각난다. 색칠한 지도였는데 아주 예뻤어. 사해는 옥색이어서 그걸 들여다보기만 해도 목이 말라왔지. 난 신혼 여행을 그리로 가야겠다고 생각했지. 헤엄도 치고 행복하게 될 것 같았다.”(베케트, 15쪽) 전통적인 방식으로 성경을 대해온 독자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에스트라공에게 성경은 더 이상 이데올로기 혹은 권력으로 변한 기독교의 텍스트가 아닙니다. 푸꼬 식으로 말하자면 에스트라공의 성경 읽기는 모든 지식체계를 미리 조건짓는 무의식적 하부구조의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에게 소박한 행복을 상기시켜주는 매개물일 뿐인 것입니다. 이런 경향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던 두 도둑 가운데 한 사람만이 구원을 받았다는 복음서 저자의 기록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데서도 알 수 있습니다. 블라디미르: 그런데, 복음서를 쓴 친구 중 하나만은 그자들 중의 하나가 구원을 받았다는 거야. 에스트라공: 그래? 그렇다면 그 친구들 견해가 서로 다른 거지 뭐. 얘긴 단지 그것뿐이지 뭐야? 블라디미르: 넷이 다 거기 한자리에 있었다니까. 그런데 그중 한 사람만이 구원받은 도둑 얘기를 하고 있는데, 왜 나머지 세 사람 얘기는 제쳐놓고 그 사람 말만 믿는지 모르겠다니까. 에스트라공: 누가 믿는다는 거야? 블라디미르: 누구나 다 그렇게 믿고 있잖아? 그 사람의 해석 밖에 모르고 있다니까. 에스트라공: 사람들이 다 바보니까 그렇지.(베케트, 17쪽) “그 사람의 해석 밖에 모르고 있다니까”. 베케트는 열린 텍스트를 하나의 의미규정 속에 가두는 행위에 대해서 혐오감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신성불가침의 확실성 위에 세워진 세계에서 소설은 죽는다”는 밀란 쿤데라의 말도 같은 의미일 겁니다. 하지만 베케트의 새로운 실험은 성공한 것일까요? 아무런 입각점도 없다면 모든 것은 불확실성 속에 매몰되고 맙니다. 베케트가 보여주려는 것은 아무런 입각점도 없는 세계의 혼돈일까요? ● 시간 속에서 멀미하는 사람들 이제 포크너와 베케트의 인물들이 체험한 ‘시간’은 과연 어떤 것이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연대기적 시간과 리얼리즘 소설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음향과 분노>>는 쉽게 읽히지 않습니다. 이 작품 속에서 시간은 비틀려 있기 일쑤이고, 서사구조도 매우 난해하기 때문입니다. 포크너가 우리를 골탕먹이려고 그런 서술방법을 택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그가 창조한 인물들의 내면을 그리기 위해서는 그런 방법이 가장 유효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기억은 연대기적인 시간을 따라 정리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우리 기억의 창고는 여러 가지 경험과 무의식의 층위가 뒤죽박죽으로 중첩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질서정연하게 정리할 수도 없으려니와, 정리한 그것이 곧 우리의 내면풍경을 있는 그대로 드러냈다고 말할 수도 없을 겁니다. 시간은 그것을 체험하는 사람들의 의식에 따라 달리 경험됩니다. 특히 비정상적인 의식세계에 투영된 시간의 빛깔은 다양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음향과 분노>>는 몰락한 귀족인 콤프슨 가문의 자녀들의 비정상적인 의식세계에 투영된 다양한 시간의 빛깔을 그려 보이고 있습니다. 네 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의 소제목은 각각 ‘1928년 4월 7일’, ‘1910년 6월 2일’, ‘1928년 4월 6일’, 그리고 ‘1928년 4월 8일’입니다. 시간의 질서가 무너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집 앞에 있던 목초지마저 팔아야 할 정도로 몰락한 집안의 가장인 아버지 콤프슨 씨는 술병을 들고 살고, 콤프슨 부인은 자기 연민에 빠져 집안 일을 흑인하녀에게 맡긴 채 침상을 떠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콤프슨 가문의 아이들(장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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