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북산 목사님께 드리는 편지 2004년 08월 10일
작성자
목사님은 제게 북산이십니다 최완택 목사님, 삼복 더위를 잘 나셨는지요? 저는 지금 모처럼 도봉산에 들었다가 돌아와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더워서인지 산 초입의 계곡마다 자리를 펴고 드러누운 사람들이 많이 보였습니다. 좀처럼 땀을 흘리지 않는 저도 몸에 흐르는 땀을 연신 닦아내며, 한 걸음 한 걸음 힘겨운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산행을 중단하고 계곡에 누워 하루를 보내고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물소리와 작별하면서 산중으로 접어드니 마음은 어느덧 평온해지고, 더위도 견딜만해졌습니다. 길섶에 나있는 들꽃들과 눈을 맞추며 걸었습니다. 애잔잔한 며느리밥풀꽃이 유난히 많이 보였습니다. 도봉산에는 이 꽃이 유난히 많지요? 동행에게 며느리밥풀꽃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다가, 어려운 시절을 온몸으로 버텨온 기층 민중들의 삶의 애환에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춘향전>과 <흥부전>, <심청전> 등 우리 정서의 원형질을 보여주는 이야기들 속에 담긴 눈물과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염원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문득 목사님이 옆에 계시면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크레타의 땅에 있는 것이면 돌뿌리 하나 나무 한 그루도 비극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게 어찌 크레타뿐이겠습니까? 꼭 비극이랄 것은 없겠지만 우리 강토에 피어나는 꽃 한 송이, 나무 한 그루도 나름의 이야기를 품고 있지 않겠습니까? 자주는 아니지만 목사님 곁에 설 때마다 '이 어른은 정말 이 땅을 사랑하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도랑가에 피어난 물봉선화, 벼 포기에 맺히는 새벽이슬, 깊은 산 속에서 들려오는 새 소리 하나 이야기 아닌 것이 없더군요. 책을 통해 얻은 지식은 많지만, 우리 강토에 피어나는 꽃과 나무들, 그리고 숲에 깃들어 사는 새들의 언어에 대해서는 무식하기 이를 데 없는 저는 그저 목사님을 경탄의 눈으로 바라볼 따름입니다. 우리 강토에 대한 그런 애정은 저절로 생긴 것이라기보다는 치열한 탐구정신에게 비롯된 것임을 저는 어렴풋이 알고 있습니다. 벌써 회갑이 지나셨네요. 제가 목사님을 처음 뵌 것이 1983년이니까, 벌써 20년의 시간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파고다 학원에서 민들레 교회를 막 시작하실 무렵일 겁니다. 그때가 마침 3.1절 기념주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예배를 마치고는 독립선언문이 최초로 낭독되었던 태화사회관에 들른 후 파고다 공원을 한 바퀴 둘러보고, 이문 설렁탕집까지 갔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저는 말없는 동행인이었지만 제 가슴에는 역사에 대한 기억이 깊게 새겨지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늘 절벽 앞에 서있는 것처럼 암담한 역사의 과정을 겪어내고 있던 터인지라, 과거로 거슬러올라 내 뿌리를 확인할 여력이 없었는데 그날 목사님은 역사란 '기억'이고, '기억'은 '의례'를 통해 전승되는 것임을 새삼스럽게 일깨워주셨던 것입니다. 어쩌면 제가 4.19혁명 기념일이 되면 젊은이들과 함께 4.19기념탑을 참배하고, 돌아오는 길에 감자탕을 사먹이곤 했던 것은 목사님의 모습을 카피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21년 전의 목사님은 막 40대로 진입하신 장년의 나이셨고, 지금의 제 나이보다도 훨씬 젊으셨을 때인데도 그 시절의 목사님은 여전히 어른이고, 저는 지금도 철없는 아이 같이 몽롱하고 미적지근하게 살고 있으니 어쩌면 좋습니까? 목사님은 민들레 홀씨가 되어 20여 년을 한결같이 제 곁으로 날아오십니다. 암담했던 시절, 80년 대 중반을 군목으로 재직하면서 저는 참 힘겹게 버티고 있었습니다. 민중신학과 해방신학을 비판하는 강의를 병사들에게 하라는 군대의 요구를 거절하면서 저는 무척 외로웠습니다. 저는 그럴 수 없었습니다. 해방신학을 비판하는 것은 당시로서는 저 자신을 부정하는 일이었기에 저는 미구에 닥쳐올 시련을 예감하면서도 '아니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저의 일거수일투족이 감시의 대상이 되고 있었고, 지휘관과 참모들의 눈빛도 다정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런 상황에서 민들레교회 주보는 시원한 생수처럼 달았습니다. 감로수라는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먹장구름 너머에 푸른 하늘이 있음을 일깨워주는 하늘의 소식이었습니다. 간혹 한 두 마디 꾸불텅꾸불텅한 글씨로 전해주시는 격려의 말씀은 내 마음을 쓰다듬는 커다란 손이었습니다. 저는 마음으로만 꾸벅 인사할 뿐 예의를 갖춰 감사하다는 말씀도 드리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꽤 많은 나의 길벗들이 목사님을 '형님'으로 호칭하고, 여러 후배들이 '선생님'이라고 호칭할 때도 나는 여전히 '목사님'으로 호칭하고 있습니다. 아껴주시는 정 깊은 마음을 알면서도 선뜻 다가서지 못하는 저의 수줍음 때문일 겁니다. 아니, 어쩌면 이따금 산을 찾는 마음으로 목사님을 대하고 싶은 마음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습니다. 목사님은 제게 北山이십니다. 그저 그 사실이 고맙습니다. 사람들은 제게 왜 승용차를 갖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그럴 때마다 '귀찮아서'라고 대답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지금은 제 건강에 약간의 문제가 생겨서 동물성 단백질을 섭취해야 한다는 의사들의 권고를 받아들여 고기를 조금 먹습니다―저는 고기를 먹지 않았습니다. 왜 고기를 먹지 않느냐는 집요한 질문 앞에 설 때면, 저는 그저 '당분간, 그러고 싶어서'라고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저 나름대로의 신앙적 실천이었습니다. 1990년에 우리나라에서 열린 JPIC(Justice, Peace and Integrity of Creation) 대회는 저를 생태학적인 개종의 길로 인도했습니다. 하지만 제 의식에 생태학적 세례를 준 것은 목사님의 가르침과 삶입니다. 목사님께서 한국공해문제연구소 이사장으로 일하셨던 시기는 참 어려운 때였지요? '공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 자체가 불온하게 받아들여지던 사회 분위기였으니까요. 목사님은 참 직정적인 언어로 공해를 유발하는 삶의 방식을 질타하셨습니다. 자동차 배기가스를 차 안쪽으로 배출하게 했으면 좋겠다는 말씀은 매우 도발적인 말씀이었고, 세련된 것과는 관계없는 표현이었지만, 통나무(樸)같은 그 질박한 언어가 제 가슴에 사건을 일으킨 것입니다. 통나무라는 말을 썼습니다만, 햇볕에 그을려 불그스레한 얼굴에 조금은 장난끼어린 표정으로 사람들과 세상을 대하시는 목사님 앞에 설 때마다, 허약한 저의 속사람이 드러나는 것 같아 편치 않습니다. 하지만 목사님의 품은 누구보다도 넓습니다. 시인 정현종은 "방이 많은 집 하나 짓는" 게 자기 꿈이라고 했지요. 그래 이 세상의 떠돌이와 건달들을 먹이고 재우고, 이쁜 일탈자들과 이쁜 죄수들, 거꾸로 걸어 다니는 사람과 서서 자는 사람, 눈 감고 보는 사람과 온몸으로 듣는 사람, 끌어안을 때는 팔이 엿가락처럼 늘어나는 사람, 발에 지평선을 감고 다니는 사람, 자동차 운전 못하는 사람, 원시주의자들, 말더듬이, 굼벵이, 우두커니, 하여간 그런 그악스럽지 못한 사람들을 먹이고 재우게 방이 많은 집 하나 짓는 일이야. (<한 그루 나무와도 같은 꿈이> 부분) 시인은 "무정부적인 감각들의 절묘한 균형으로/집 전체가 그냥 한 송이의 꽃인 그러한 곳"을 소망합니다. 아마 이 글을 읽는 이들은 목사님에게서 그런 집을 볼 겁니다. "자네 글은 깎아놓은 밤톨 같아서 원…" 하며 말끝을 흐리시는 목사님의 마음을 저는 어렴풋이 헤아리고 있습니다. 세월이 갈수록 저도 편한 글을 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땀내가 나고, 사람내가 나는 글 말입니다. 요즘 '시' 읽는 재미에 푹 빠지신 것 같습니다. 좋은 시가 있으면 소개하라고 하셨지만, 아직은 그럴 생각이 없습니다. 당분간은 목사님이 읽어주시는 시를 조용히 듣고 싶기 때문입니다. 파블로 네루다의 시를 읽으면서 눈이 떠지는 느낌이 들었다는 말씀을 들으면서, 1988년에 읽은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편의 절망의 노래>>의 감동과 더불어, 외로울 때면 읊조리곤 하던 한 구절을 떠올렸습니다. "달이 사는 내 황폐한 침실 속에서,/내 식구인 거미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파괴들 속에서,/나는 내 잃어버린 자아를 사랑하고, 내 흠 있는 성격,/내 능변의 상처, 그리고 내 영원한 상실을 사랑한다." 이게 웬 퇴폐냐고 책망하실 지 모르겠지만, 자기는 유년의 숲을 헤매고 있다고 말했던 카프카처럼 저도 역시 자신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채 방황하고 있습니다. 언제 한번 목산 산행에 동행해야 할 텐데요. 여러 해 전 광덕산에 오르실 때 한번 동행한 것이 유일하네요. 목사님은 그날 산길에서 점심 식사를 마친 후에 길 한 켠으로 물러나시더니 복사해 온 찬송가 악보를 챙겨들고 홀로 찬송가를 부르셨지요. 저는 얼핏 목사님께서 통나무처럼 사는 힘이 저기에서 오는구나 하고 생각했었습니다. 늘 어딘가로 흘러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항상 중심을 잃지 않는 삶의 뿌리에는 경건이 있음을 저는 조금쯤은 눈치채고 있습니다. 순(順)해야 통(通)한다 하셨지요? 목사님은 순하고 통한 삶의 길목에서 이정표처럼 서 계십니다. 이제 귀가 순해지셨으니(耳順), 온몸과 마음이 순하고 통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히말라야에 다시 가실 예정이라구요? 기회가 되면 저도 동행하고 싶습니다. 목사님, 뭇 생명을 품어안고 있는 산처럼 늘 그곳에 계셔주셔서 고맙습니다. 2004년 입추지절에 김기석 再拜
목록편집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