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또 다른 세계로 통하는 문 2004년 06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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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세계로 통하는 문 (월간 <새가정>에서 청탁받은 글입니다. 꼭지 제목이 '나에게 주는 선물'인데, 내게는 '독서'를 주제로 써달라 했습니다. 사실 내게 주는 선물이 있다면 그건 '쉼'인 데 말입니다. 그래서 두서없는 글이 되었습니다.) '권태'의 문을 열고 들어가 주일 오후 집회까지 다 마치고 사람들이 하나 둘 흩어지고 나면 홀가분함보다는 왠지 모를 허기증에 시달릴 때가 많다. 말을 많이 한 후유증이 아닌가 싶다. 이런 증세가 심한 날은 종작없이 흩어지는 마음을 안돈시키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텔레비전 앞에도 앉아보고, 주전부리를 해보기도 하지만, 헛헛한 마음은 쉽게 가라앉질 않는다. 그러면 싸이렌의 노랫소리에 끌리는 항해자들처럼 뭔가에 끌려 집밖으로 나갈 때도 있다. 물론 정처가 있는 것은 아니다. 여러 해 전 어느 날이다. 그날은 말이 빚은 멀미 증세가 좀 심했다. 절실함을 담지 못한 채 발설된 말이 울혈처럼 가슴에 맺히고 만 것이었다. 외롭고 슬프고 속이 상했다. 집으로 돌아가면 가족들에게 공연히 짜증을 낼 것 같은 불길한 조짐 때문에 거리로 나섰다. 나를 잊을 수만 있다면 뭘 해도 좋을 것 같았다. '영화를 보든, 친구를 불러내든 일단 나가고 보자.' 차를 타고 시내로 나가는 데 세상은 왜 그리도 낯설던지. 들까불리는 마음을 다잡아 보려고 나선 종로 거리가 그렇게 쓸쓸할 수가 없었다. 이미 친구를 불러낼 마음도, 영화를 볼 마음도 없었다. 생각을 떨쳐버리려고 이곳저곳 기웃거려 보기도 했지만, 내 마음이 깃들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터덜터덜 걷느라 몸은 이미 고달파졌는데도 마음의 풍랑은 가라앉지 않았다. 지옥은 한 순간도 자기를 잊을 수 없는 곳이라 하던가. 나는 그날 지옥을 경험했다. 걷고 또 걸어 집으로 돌아왔지만 의아해하는 가족들에게 말 한 마디조차 건넬 수 없었다. 홀로 있고 싶은 생각에 서재로 들어갔다. 서가에 꽂혀 있는 책들을 눈으로 훑어 나갔다. 무엇을 하리라는 생각도 없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이상의 『권태』가 눈에 들어왔다. 내 심정을 반영하는 듯한 그 제목에 끌려 책을 뽑아들었다. 이미 여러 번 읽었지만 첫 대목을 읽는 순간 내 마음은 그 문장에 사로잡혔다. <어서 차라리 어두워 버리기나 했으면 좋겠는데, 벽촌의 여름날은 지리해서 죽겠을 만큼 길다. 동에 팔봉산(八峰山). 곡선은 왜 저리도 굴곡이 없이 단조로운고? 서를 보아도 벌판, 남을 보아도 벌판, 북을 보아도 벌판, 아―이 벌판은 어쩌라고 이렇게 한이 없이 늘어 놓였을고? 어쩌자고 저렇게까지 똑같이 초록색 하나로 되어 먹었노?> 그냥 내 마음이었다. 상황은 달라도 우리가 서있는 마음 자리는 동일했다. 나는 폐병에 시달리는 이십 대의 이상이 되어 서가에 기대선 채로 책을 읽어나갔다. 한번 읽고 두 번 읽고 몇 번을 읽었는지 모른다. "소는 식욕의 즐거움조차를 냉대할 수 있는 지상 최대의 권태자다. 얼마나 권태에 지질렸길래 이미 위에 들어간 식물을 다시 게워 그 시금털털한 반(半) 소화물의 미각을 역설적으로 향락하는 체해 보임이리오?" 반추(反芻)를 계속하는 소를 보면서 작가가 하는 말이다. 어느덧 나는 소가 되어 시금털털한 나의 고독을 반추하고 있었다. 나의 고독은 사소했고, 사치스러웠다. 어느 순간 밖에서 들려오는 일상의 소음들이 낯설지 않았다. 피곤하기는 했지만 편안했다. 비로소 마음이 가라앉은 것이다. 『권태』의 문을 열고 들어가 젊은 천재 이상의 내면세계에 수굿이 머물고 나서야 나의 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던 셈이다. 마음의 스승을 모시고 먼길을 떠날 때면 책을 챙기는 것도 일이다. 일정에 따라서 책을 한 권만 넣어갈 때도 있고, 두 세 권을 가져갈 때도 있다. 가벼운 읽을거리를 뽑아들 때도 있고, 묵직한 내용의 책을 고를 때도 있다. 며칠 전 거창에 갈 때는 장일순 선생의 일화를 모아놓은 최성현의『좁쌀 한 알』과 밀란 쿤데라의『Ignorance』를 가져갔다. 버스를 타고 가는 그 긴 여정이 부담스럽지 않은 것은 몇 시간씩 앉아 독서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는 기쁨 때문이다. 버스 안에서 나는 홀로가 아니었다. 한번도 만나 뵌 적이 없지만, 마음으로 경모하던 장일순 선생님을 스승으로 모셨으니 말이다. 선생님은 때로는 조용히 일깨워주고, 때로는 넌지시 일러주신다.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는 어떠해야 하며, 역사 앞에서 책임을 진다는 것은 무엇인지. "사회를 변혁하려면 상대를 소중히 여겨야 해. 상대는 소중히 여겼을 적에만 변하거든. 무시하고 적대시하면 더욱 강하게 나오려고 하지 않겠어? 상대를 없애는 게 아니라 변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면 다르다는 것을 적대 관계로만 보지 말았으면 좋겠다, 이 말이야." 찾아온 사람을 나무라는 법도 없고, 판관이 되지도 않고, 설교를 하지도 않으면서 단번에 그의 동료가 되어 산란한 마음을 가지런히 만드는 선생님을 보면서 사랑과 이해와 존중의 힘을 깨닫는다. 말없는 가르침인 셈이다. 선생님의 나지막한 자탄도 듣는다. "추운 겨울날 저잣거리에서 군고구마를 파는 사람이 써붙인 서툴지만 정성이 가득한 군고구마라는 글씨를 보게 되잖아? 그게 진짜야. 그 절박함에 비하면 내 글씨는 장난이지. 못 미쳐." 그 말씀 앞에서 나는 스스로 종아리를 걷어올리고 매를 자청하기도 한다. 큰 정신이 보여주는 투박한 진정(眞情) 앞에서 매끄럽기는 하지만 절박함이 부족한 나의 말과 글이 부끄러운 까닭이다. 그럴 때면 눈을 감고 호흡을 가지런히 하여 기도를 올린다. 진정과 애덕이 내 영혼에도 새겨지게 해달라고. 책은 만남이다. 나는 어느 곳에 가든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는 책이 있다고 생각한다. 서점에서 직접 구입을 할 수도 있고, 누군가를 통해 내게 전달될 수도 있다. 거창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책은 이오덕과 권정생이 주고받은 편지글 모음집인『살구꽃 봉오리를 보니 눈물이 납니다』였다. 짬짬이 편지글을 읽어가다가 '인간은 최악의 고통 속에서만 진실할 수 있다'는 말 앞에서 오랫동안 머물렀다. 별고 없는 내 삶이 점점 진실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자책하면서.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볼 것이라는 말은 결코 빈 말이 아님을 실감하면서. 권정생의 직관적 언어는 가슴 깊은 곳까지 파고들어 깊은 울림이 되었다. 추상과 관념의 언어로는 도달할 수 없는 자리였다. "굶주린 이웃을 곁에 두고 고독하다드니, 괴롭다느니 사치한 생각만 하는 제가 미워집니다." "가진 것을 '준다'고 하지 말고 '되돌려 준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생산한다는 말은 아예 버리고 '받는다'는 말이 옳겠지요. 우리 자신이 햇빛을, 공기를, 물을 생산한다는 사람은 미친 사람일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절대 하나 되는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일만 송이의 꽃이 각각 그 빛깔과 모양이 다른 꽃들이 만발하여 조화를 이루는 나라입니다." 내게 책을 읽는 시간은 분주한 일상 가운데 자칫 잃어버리기 쉬운 본디 마음을 회복하는 치유의 시간이다. 물론 그 책은 진실한 책이어야 한다. 식견이 부족한 글은 용납할 수 있지만 진정이 담기지 않은 채 화려하기만 한 글을 보면 화가 난다. 좋은 책을 만나는 것은 행복이다. 오늘도 새로운 세계의 문을 여는 조심스러움으로, 새로운 만남에 대한 설렘을 간직한 채 책장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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