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하늘땅사람이야기5: 우리는 신성함을 믿어야 한다 2004년 06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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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신성함을 믿어야 한다 ● 영웅 만들기 문화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의 국장 소식으로 미국이 떠들썩하네. '미국을 사랑한 이상주의자', '인물을 넘어서 미국과 세계가 가장 필요로 할 때 신의 섭리에 따라 나타난 인물'…야, 아무리 장례식 수사라고는 해도 좀 심하네. '친절, 단순 명료함, 선함이 그의 전 생애를 특징지었다'고? 온 몸이 막 군시러워지네." "신문 보면서 뭘 그렇게 중얼거려요?" "미국인들의 '영웅 만들기'는 좀 지나쳐. 9.11 사건 때 숨진 소방관들을 영웅으로 칭송하는 것은 그렇다 쳐도, 이라크에서 공포에 질려 총 한 방 쏘지 못한 채 숨어 있다가 이라크 군에서 생포되었던 여군을 전쟁 영웅으로 만들고, '라이언 일병 구하기' 류의 센티멘탈리즘으로 사람들의 비판의식을 잠재우고…." "당신 너무 과민한 거 아니에요?" "과민한 게 아니라 그렇다는 거지. 로널드 레이건만 해도 미국민의 입장에서는 영웅일지 몰라도, 다른 지역 사람들에게는 비극의 씨를 뿌린 사람일 수 있거든. 레이건 정권이 남아메리카와 아프리카나 중동에서 뿌린 불화의 씨가 지금의 분쟁과 테러로 나타나고 있으니 말이야." "그 사람들은 왜 그렇게 영웅 만들기에 집착하는 걸까요?" "다민족 국가니까 그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끈이 필요해서가 아닐까? 우리처럼 단일민족 국가의 경우는 국가적 정체성의 뿌리를 과거에 두고 있지만, 미국 같은 나라는 항상 그 뿌리를 미래에 둘 수밖에 없잖아. 그런데 미래는 부동(浮動)하는 거니까, 부동하는 정체성을 하나로 묶어줄 어떤 신화, 혹은 상징이 필요하지 않겠어? 영웅 만들기는 그런 신화 만들기의 일종일 거야." "그런 의미에서라면 우리에게도 영웅이 있으면 참 좋겠어요. 우리의 정체성은 자명하다고 말했지만, 사실 우리 정신은 유목민처럼 떠돌고 있잖아요?" "사실이야. 반 만년의 역사를 자랑하지만 딱히 '이게 우리 것이다' 할만한 게 뭔지는 잘 모르겠어." "영웅이 있으면 좋겠다는 내 말은 그러니까 지금처럼 모든 것이 흔들리는 시대에 우리가 언제라도 돌아가 스스로를 비춰볼 수 있는 큰 정신이 있으면 좋겠다는 말이에요." "나는 내가 당신의 영웅인 줄 알았는데……" "아이구, 참 내. 그래요, '당신을 나의 영웅으로 임명합니다'." ● 서구적 영웅 "나도 우리 시대에 진정한 영웅이 있었으면 좋겠어." "진정한 영웅이 어떤 건 데요?" "글쎄…물론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는 있겠지만, 적어도 영웅들은 비범한 고통 속에서 인간 정신의 위대함과 숭고함을 드러내는 존재여야 하지 않을까? 그걸 전형적으로 잘 보여주는 것이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드>의 두 주인공인 '아킬레우스'와 '헥토르'야. 그들은 인간의 절대적 한계인 죽음의 운명 앞에서 구차하게 삶을 구걸하지 않지. 오히려 비극적인 운명을 자기 용기의 증거로 삼으려 해. 트로이의 장군인 헥토르는 자기가 아카이아의 영웅 아킬레우스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와의 싸움을 피하려 하지 않아. 그것은 목숨보다도 소중히 여기는 명예에 손상을 가하는 일이었기 때문이지. 아버지 프리아모스가 흰 머리털을 쥐어뜯으면서 만류하고, 어머니 헤카베가 눈물을 흘리며 울다가 급기야는 옷깃을 풀어 헤쳐 다른 손으로 젖가슴을 드러내 보이면서 피할 것을 종용하는 장면은 <일리아드>에서 가장 비장한 장면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거야. 그런데도 헥토르는 결국 아킬레우스와 대결하다가 죽는 쪽을 택하지. 패배가 기정사실이라 해도 그는 트로이인들의 자긍심과 명예를 지키고 싶었던 거야. 그건 아킬레우스도 마찬가지야. 그는 선택적인 운명을 타고났는데, 전쟁터에서 큰공을 세우면 전사할 운명이고, 전쟁에서 큰공을 세우지 못할 경우 도리어 부귀영화를 누리며 장수할 운명이라는 거야. 선택은 그의 몫인 셈이지. 그라고 해서 살고 싶은 생각이 왜 없었겠어. 하지만 그는 절친한 친구인 파트로클로스가 헥토르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자 그 원수를 갚기 위해 전쟁터로 달려가지. 그게 결국 죽음의 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지." "결국 에고이즘 아니에요? 아니면 나르시시즘이던가? 그들이 지키려는 것이 명예요 자아 아닌가요?" "물론 그런 점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 그게 서구적 주체성의 한계이기도 하고." "부모의 가슴에 못을 박고, 아내의 고통까지도 모른 체 하면서 지켜야 할 명예라는 게 대체 뭐겠어요. 허영심 아니면 자만심 아니에요? 남자들이란…." "아니, 그런 성차별적인 말을 하다니…." "성차별이 아니라 결국 서구적 영웅이라는 게 '수컷스러움'과 통하는 게 아니냐는 거죠." "괜히 말을 꺼냈다가 본전도 못 찾네." "당신은 영웅이 되려고 하지 마세요." "사실 나는 영웅들로 떠받들려지는 이들에 대한 혐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야. 정신의 크기를 보여주는 큰 인물이 없는 시대를 슬퍼하기는 하지만, 누군가를 숭배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아니야.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동상 만들기 욕망'을 싫어하는 내가 영웅은 무슨…." "내가 너무 기를 죽였나?" "……" "……" ● 자기 희생의 길 "로댕의 조각작품 '칼레의 시민들' 생각나?" "그럼요. 근데 왜요?" "진정한 영웅은 자기의 명예나 허영심을 위해서가 아니라, 타자를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사람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예수님이 보여주신 생도 결국 그런 거 아니겠어?" "그 작품의 배경이 뭐였죠?" "나도 잘 몰라. 다만 백년 전쟁 당시에 영국군에게 포위되었던 칼레가 끝까지 저항하다가 마침내 항복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는데, 영국 왕은 항복을 받아주는 대가로 칼레의 시민 여섯 명을 처형하겠다고 했다지 아마. 그 이야기를 들은 생 피에르라는 청년이 고심 끝에 먼저 자원하자, 다른 이들도 그 대열에 합류했대. 결국 그들의 용기 있는 결단으로 칼레는 전멸을 면했던 거지. 인간성이 왜소해지는 시대에 로댕은 그들의 숭고한 용기를 기념하기 위해 그 조각상을 만든 것이겠지." "나찌에 의해 죽임을 당한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님이 생각나네요.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탈출한 사람들을 대신해 처형당하도록 선발된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비통하게 흐느끼는 모습을 보다가 '내가 그 사람을 대신하게 해주십시오. 그에게는 아내와 아이들이 있지 않습니가?' 하면서 아사(餓死)감옥에 들어갔다면서요. 타자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느끼고, 그의 자리에 홀가분하게 자신을 내놓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영웅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 예수님도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다'(요15:13)고 하셨지." "콜베 신부님은 아사감옥에서도 사제로서의 역할을 다했대요. 그를 포함해 10명의 동료들은 고통에 몸부림치기보다는 조용히 기도하고 찬송하며 죽음을 맞이했다지요? 죽음의 공포를 이긴 한 영혼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가를 보여준 것 같아요." "그래서 요한 바오로 2세는 인간성이 어둠에 잠겨버린 시대에 사랑의 기적을 보여주었다는 찬사와 함께 그를 성인의 위에 올렸어. 사실 사랑의 기적보다 더 큰 기적은 없으니까." "제 머리 쓰다듬는 격이긴 하지만, 여성들은 일상 속에서 그런 기적을 많이 만들면서 산다고 볼 수 있어요. 그런 의미에서 여성들은 작은 영웅이 아닐까요?" "네, 인정합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나한테 잘해요." ● 취약함을 받아들일 때 "인간의 고귀함은 강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약함을 받아들이는 데서 오는 것 같아.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말라 하신 것도 어쩌면 자기를 지킬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을 때 오히려 허영심과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 있음을 간파하셨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에게서 가장 긍정적인 것은 자기가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고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 기억이 다 사라지기 전에 세계민들 앞에 서서 그는 자기의 병세를 고했고, 사람들의 이해를 구했어. 나는 그것이야말로 그가 우리에게 남긴 가장 고귀한 메시지라고 생각해. 그는 미국을 초강대국으로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인간은 결국 유한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자신의 몸으로 증언한 셈이지." "인간적인 취약함은 슬픔의 근원이기도 하지만, 고귀함의 근원이기도 하네요. 문득 영화 <아이리스>가 생각이 나요. 옥스퍼드 대학교의 철학교수이자 작가인 아이리스가 생의 절정기에 알츠하이머병에 걸려 기억을 상실해가는 과정을 그린 영화지요. 그 영화 보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언어가 갖고 있는 아름다움과 설득력을 굳게 믿고 있던 사람이 어느 날 문득 기표와 기의의 연결을 잃어버린 채 망연자실할 때, 그게 어떤 느낌일까? 나는 아이리스가 '당황하다puzzled'라는 단어를 써놓고는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그 단어를 응시하던 장면을 생각하면 아찔한 생각이 들어." "당신도 그럴 때가 올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암흑 속을 항해하는 기분'이라던 그 느낌이 왠지 낯설지 않은 것 같아서 말이야. 어느 날 갑자기 자기 감정과 행동과 성격에 변화가 온 것을 알아차린다고 생각해봐. 끔찍하지. 문제는 그런 병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이지." "노인들에게는 알게 모르게 그런 공포가 있는 것 같아요. 친정 엄마도 가끔 건망증이 심해지면 '나 이러다 치매에 걸리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고 하세요." "알츠하이머병은 퇴행성 뇌질환이래. 뇌신경세포막을 구성하는 물질이 변형되어 뇌 속에 다하게 축적되면 그런 증상이 나타난다지. 이게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야. 옛날에는 그 원인을 알 도리가 없으니까, 그런 증상을 보이는 노인들을 보면 '노인네 망령들었다'고 했지. 그런 이들은 진단조차 받지 못한 채 냉대와 푸대접 속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어. 생각해보면 주변에 그런 분들이 한 두 분은 꼭 있을 걸." "아이리스가 친구인 쟈넷의 별장에 가서, 노트를 들고 바닷가로 달려가던 장면 기억나요?" "그럼." "뭔가를 쓰려는 듯이 노트 한 장을 뜯어 들고 펜을 잡으려다가, 가만히 종이를 자갈밭 위에 내려놓고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자갈로 지질러 놓잖아요. 한 장, 두 장, 세 장……. 마치 그게 날아가려는 자기 기억을 붙잡고 싶은 아이리스의 갈망처럼 보여서 얼마나 가슴 아팠는지 몰라요. 어느 순간 아이리스가 갑자기 자갈을 치우고 종이를 바람에 날려보낼 때 나는 차라리 후련함을 느꼈어요. 결혼하기 전 젊은 베일리가 친구에게 '아이리스의 머리 속엔 다른 세상이 있어요. 그 여자는 가끔씩 다른 세계로 가버려요' 하고 말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아이리스는 결국 그 다른 세계로 영원히 이사해버린 셈이지요." ● 우린 신성함을 믿어야 한다 "영화는 아이리스가 아직 건강할 때 대중들을 상대로 강연하는 장면을 보여주는데 그 영화는 어쩌면 그 대목을 들려주려고 만든 건지도 모르겠어. '우리는 신성함을 믿어야 합니다. 꼭 신의 이름이 필요한 건 아니죠. 좋습니다. 우리가 사랑이나 선이라 부르는 것이 있다면.' 그러면서 아이리스는 시편 139편을 낭송하지. <내가 주의 영을 피해서 어디로 가며, 주님의 얼굴을 피해서 어디로 도망치겠습니까? 내가 하늘로 올라가더라도 주님께서는 거기에 계시고, 스올에다 자리를 펴더라도 주님은 거기에도 계십니다. 내가 저 동녘 너머로 날아가거나, 바다 끝 서쪽으로 가서 거기에 머무를지라도, 거기에서도 주님의 손이 나를 인도하여 주시고, 주님의 오른손이 나를 힘있게 붙들어 주십니다. 내가 말하기를 "아, 어둠이 와락 나에게 달려들어서, 나를 비추던 빛이 밤처럼 되어라" 해도, 주님 앞에서는 어둠도 어둠이 아니며, 밤도 대낮처럼 밝으니, 주님 앞에서는 어둠과 빛이 다 같습니다.> 이 성경 말씀을 들으면서 나는 가슴이 저릿해지는 걸 느꼈어. 불멸하는 것은 사랑 뿐이야. 다른 것들은 다 군더더기일 뿐이지." "군더더기이지만 매혹적이지요. 그래서 덜어내기가 어렵구요." "그래서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건 아닐까? 고난의 풀무를 거치지 않으면 맑아지고, 깊어지고, 소박해지기 어려우니까 말이야." "그런가봐요. 모든 고난이 다 유익하다고 말할 자신은 없지만, 적어도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겪는 고난이라면 좋은 거 아닐까요? 아이리스의 말대로 우리가 신성함을 믿는다면 우리의 연약함은 오히려 그분에게로 가까이 가는 통로일 거예요." "머리로는 이해한다고 해도, 그걸 가슴으로 받아들이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닐 거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시간이 오겠지요." "하지만 그런 시간이 오기 전에 미리 깨닫고 살아간다면 삶이 그렇게 무겁지는 않을 텐데." "고통을 끌어안을 때 우리가 끌어안는 것은 사실은 그 밑바닥에 계신 사랑의 하나님이래요." "그게 바로 십자가가 보여 주는 진실이겠지." "당신하고 얘기를 하다 보니까, 영웅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주어진 삶의 몫을 눈물을 흘리면서라도 끝끝내 감당하는 사람들이 다 영웅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그래. 현실의 무게가 어깨를 짓누를 때면 벗어나고 싶기도 하고, 어딘가로 달아나고 싶은 생각도 들지만 끝내 자기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어찌 보면 무능해 보이는 사람들이야말로 신성함에 가까이 사는 사람인지도 몰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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