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하늘땅사람이야기3: 우리의 사티하그라하 2004년 04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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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사티하그라하 ● 촛불을 밝히고 "네가 부활절 새벽 촛불 예배에 참석한 것을 보고 난 깜짝 놀랐다." "왜요?" "너 같은 잠꾸러기가 그 새벽에 나오리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고, 또 기대하지도 않았거든. 그런데 회중석을 바라보는 순간 기적처럼 네가 어둠 속에 앉아 있더라." "그 말씀 들으니까 좀 섭섭하기도 하고 죄송하기도 하네요." "……" "캄캄한 어둠 속에서 '무덤 묵상'을 하고 있으려니까, 마음이 굉장히 편안해지던데요." "무슨 생각을 했니?" "잘 기억은 안 나요. 하지만 별로 대면해 본 적이 없었던 나 자신의 모습과 마주 서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거울을 보는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 들었어요. 마음의 창에 바친 내 모습이 매우 낯설어 보였어요." "방의 불을 다 끄고 창문 밖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보면 바깥을 향하던 시선이 점차 자신을 향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지. 어둠은 어쩌면 우리들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라는 하나님의 선물인지도 몰라." "그런데 성냥불을 당기는 '탁' 소리와 함께 작은 초에 불이 당겨졌을 때 가슴이 찡해지던 데요. 잠시 춤을 추듯 일렁이던 촛불이 자세를 바로잡고 서서히 주위를 밝히는 그 순간순간이 아주 강한 인상으로 다가왔어요. 그 작은 촛불 하나에서 불씨를 얻어간 이들이 다른 이들의 초에 불을 붙여주면서 조금씩조금씩 실내가 밝아지는 광경을 바라보노라니까 괜히 숙연해지더라구요." "그랬구나. 나는 촛불 예배를 드릴 때마다 윤동주의 <초 한 대>라는 시의 세 번째 연의 이미지가 떠오르더라. '염소의 갈비뼈같은 그의 몸,/그의 생명인 심지까지/백옥같은 눈물과 피를 흘려/불살려 버린다'. 여기서 윤동주의 초 한 대가 누구인지는 알겠지?" "예수님이지요." "그래. 그런데 마지막 연이 좀 유감스러워. '매를 본 꿩이 도망하듯이/암흑이 창구멍으로 도망한/나의 방에 품긴/제물의 위대한 향내를 맛보노라'. "조금 감상적이네요." "그렇지? 하지만 이 시는 윤동주가 18살 되던 해인 1934년 성탄절 전야에 썼던 시야. 암흑과도 같은 일제시기를 지나는 감수성 예민한 젊은이의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고 봐야겠지." ● 어둔 밤의 선물 "촛불 앞에만 서면 사람들이 일상과는 다른 정서 속으로 끌려 들어가는 것 같아요." "왜 그럴까? 단순한 감상만은 아닐 거야. 밝은 대낮은 모든 것을 다 눈앞에 드러내놓기 때문에 모든 것을 납작하게 만들지. 하지만 촛불은 어둠과 밝음을 동시에 가지고 있으니까 어떤 '깊이'를 만드는 게 아닐까? 사람 속에는 어둠도 있고 밝음도 있어. 밝음을 '일'이라고 한다면 어둠은 '쉼'일 거야. 밝음과 어둠이 교차하는 리듬 속에서 생명은 살아가는 거겠지. 현대인들의 문제는 밤을 잊은 채 살고 있다는 거지. 어두워지면 자고, 밝아지면 일어나는 게 자연스런 생명의 흐름인데 지금은 그게 뒤죽박죽이 되어버렸지. 우리 문화에 깊이가 없는 것은 어쩌면 어둠을 잃어버렸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 "잃어버린 게 아니라, 추방한 거 아닐까요?" "그렇게 생각하니?"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밤늦게 집에 돌아오면 컴퓨터부터 켜게 돼요. 습관적인 거지요. 대화방에 들어가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어떤 때는 새벽이 될 때도 있어요. 낮에는 피곤하니까 꼬박꼬박 졸고, 밤이면 눈이 반짝 떠져요." "우리 삶의 공간에서 어둠을 인위적으로 몰아낸 것을 발전이라고 하지만 그게 정말 발전일까? 물이 맑으면 물고기가 살 수 없는 것처럼 모든 것이 명명백백하게 드러나는 곳에서는 살 수가 없을 거야. 낮은 한 개의 눈을 가지고 있지만 밤은 천 개의 눈을 가지고 있다는 서양 속담도 있지 않니? 낮을 이성과 합리의 세계라고 한다면 밤은 감성과 상상력의 세계라고 할 수 있을 거야. 과학자들이 말하는 '접혀진 우주'의 그 드러나지 않은 부분, 곧 그 어두운 부분은 이성이 아니라 상상력을 통해서만 열리는 세계인지도 모르지. 우리가 제대로 살려면 밤을 밤답게 살아야 되지 않을까 모르겠다." "밤을 밤답게 살려면 신나게 놀아야겠네요. 밤이 제공해주는 비합리와 감성의 공간이 제도와 의무의 감옥에서부터 우리를 해방해 주니까요." "그렇게 쌓인 게 많으니?" "농담이에요." "농담같이 들리지 않는데." "사실 휘황한 서울 거리는 너무 유혹적이에요. 모든 가능성을 향해 열려 있으니까요." "그러니 밤을 고요한 명상의 시간으로 보내라는 말은 달나라의 방언처럼 들리겠구나." "그건 우리를 두 번 죽이는 일이지요." "살다보면 자기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어둔 밤을 맞을 때도 있어. 느닷없는 사고, 실패, 이별, 권태, 고독, 허무, 질병…. 이것들은 그야말로 반갑지 않은 손님이야. 하지만 이것들은 빚쟁이처럼 용케도 찾아와 우리에게 손을 내밀지. 셈을 하라는 거야. 괴롭고 힘겹지만 어쩌면 우리 삶은 이런 손님들이 있기에 조금이나마 피상성을 면하는 건지도 몰라. 세월이 흐른 후에 돌아보면 단조로운 우리 삶에 다채로운 무늬를 새겨놓은 것은 바로 이런 손님들이었다는 것을 알 게 돼. 16세기 사람 십자가의 성 요한은 캄캄한 밤이야말로 우리를 하나님 곁으로 이끌어간다고 했어. 물론 그 '밤'은 영혼의 밤을 의미하지만. 우리가 맞이하는 그 낯선 손님들은 우리를 불편하게 하기도 하지만 우리 영혼을 정화하는 역할도 해. 그는 '캄캄한 밤…이것은 다름 아닌 끊음이요, 씻음―세상의 바깥 일들, 육에 즐거운 것들, 의지에 맛스러운 모든 것을 끊고 씻어버림'이라고 했어. 자기 혼자 힘으로는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 위해서 모든 욕심을 비울 수 없기에, 우리 영혼에 찾아온 어둔 밤이야말로 행운이라는 거지. 그래서 그는 어둔 밤을 이렇게 노래했단다. '어느 어두운 밤에/사랑에 타 할딱이며/좋을씨고 행운이여/알 이 없이 나왔노라/내 집은 이미 고요해지고.'" 우리 인생에 드리운 '어둔 밤'을 '좋을씨고 행운이여' 하고 맞을 수만 있다면 세상에 무슨 걱정이 있고 두려움이 있겠니?" ● 불꽃, 영혼의 현존 "촛불 예배에서 보여주신 렘브란트의 에칭화 제목이 뭐였죠?" " <엠마오로 가던 길> 하고, <엠마오에서의 식사>, <그리고 그가 그들에게서 사라지다>였지 아마?" "그 식사 장면이 좀 인상적이었어요. 예수님이 떡을 떼시자 그들의 눈이 밝아져서 한 사람은 깜짝 놀라 모자까지 떨어뜨렸지요? 얼굴은 붉게 상기되고요. 또 한 제자는 가슴 위에 두 손을 모은 채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나서 경외심에 가득 차서 주님을 바라보지요. 그런데 계단을 내려오는 사환은 식탁에서 벌어진 일을 그저 조금의 호기심으로 바라보더군요. 사환의 뒤에 있는 개 한 마리는 어둠 속을 응시하고 있고요." "자세히도 보았구나." "저는 제가 그 사환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 "저는 태어날 때부터 기독교인이 되었지만, 아직 진실한 신자라는 생각은 안 들거든요. 교회 행사에 참여하기도 하고, 돕기도 하지만 그저 먼 산 바라보듯 하는 거지. 신앙적 사건을 내 삶과 깊이 연결시켜 본 적은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절실했던 때가 있다면 대입 준비를 할 때하고, 훈련소에 들어가서 마음이 물렁해졌을 때 정도예요. 그런데 그 사환의 모습을 보는 순간, '저게 나구나' 하는 생각이 든 거죠." "너 은혜 받았구나." "다 그 촛불 때문이에요." "얘기가 다시 촛불 얘기로 돌아왔구나. 내가 좋아하는 작가인 미셸 투르니에는 물과 불은 모두 생명과 밀접하고 특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 특히 우리가 물에 끌리는 까닭은 모든 생명이 물에서부터 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래. 그에 비해 불꽃은 영혼의 현존을 나타내기 때문에 사람을 매혹시킨대. '생명은 물에서 태어났지만, 불은 그 열과 빛, 그리고 연약함 때문에 바로 생명 그 자체를 나타낸다'. 그럴 듯 하니?" "불꽃이 영혼의 현존을 나타낸다는 말이 그럴싸하네요." "유럽의 성당을 순례하다 보니까 성당마다 밝혀진 작은 촛불이 마치 꽃밭처럼 느껴지더라. 여행자들이 자기 나름의 염원을 담아서 밝혀 놓은 것인데, 그러니까 춤을 추며 타오르고 있는 촛불은 기도인 셈이지. 그걸 보면 불꽃이 영혼의 현존이라는 말이 실감날 거야. 신앙심이 없는 사람도 초를 밝히는 것은 좋아한다더라. 내가 좋아하는 프랑스 화가 중에 라 뚜르 (La Tour, 1593-1652)라는 분이 있는데, 그분의 그림에는 촛불이 등장할 때가 많아. 그는 사람의 형상을 기하학적인 단순화하여 표현하곤 하는데, 화면마다 등장하는 촛불을 통해 인물의 내적인 정경을 잘 드러내고 있어. 지난번에 너도 <목수 요셉>이라는 그림을 본 적이 있지." "아버지 요셉의 작업장에서 촛불을 들고 계신 예수님 그림이요?" "그래. 그 그림은 명상적 고요함을 우리에게 환기시키지." "맞아요. 그 그림을 보는 동안 마치 사위가 조용한 듯 싶었어요. 그 고요함을 감히 깰 수가 없는 분위기였지요." "……" ● 우리의 사티아그라하 "하지만 촛불이 때로는 거대한 함성일 때도 있잖아요?" "그렇지. 여중생 추모 촛불 집회나, 부안 군민들이 벌인 촛불 집회, 탄핵 반대 촛불 집회 같은 것이 그렇다고 말할 수 있겠지." "역사 속에서 촛불 한 자루를 밝히는 것이 커다란 함성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한다는 것을 저는 이번에 처음 느꼈어요." "네가 2학년 땐가, 학교에서 네가 속한 노래 동아리가 연주회를 한다고 해서 내가 응원 겸해서 구경 간 적이 있었지? 공연을 보고 어둑어둑한 언덕길을 천천히 걸어 내려오는데, 운동장 한 켠에서 아주 소수의 학생들이 촛불을 밝히고 침묵 시위를 하고 있더라. 무슨 일인가 하고 보니까 1980년에 광주민주화항쟁의 실상을 알리고 투신했던 너희 학교 선배를 추모하는 모임이더구나. 처음 하는 말이지만 나는 그때 '내 아들이 저 위 강당이 아니라 이곳에 있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며 씁쓸해한 적이 있었어. 하지만 모든 것이 때가 있는 법이지. 발묘조장(拔苗助長)이라는 말 알지? 어리석은 송나라 사람이 벼가 빨리 자라게 할 셈으로 논에서 벼를 조금씩 뽑아놓았다지. 살리는 게 목적이었겠지만 그건 죽이는 일이었지. 세상사가 다 그런 것 같더라. 나는 이제 뭐든지 서두를 생각이 없어져버렸다." "……" "그래도 살아가면서 점점 큰 소리 내는 사람들이 싫어지는구나. 세상을 살만한 곳으로 만드는 사람들은 목소리 큰 사람들이 아니야. 뭔가 본질적인 것을 붙잡고 있는 사람은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 법이지. 전에는 이사야 42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종에 대한 언급을 상징적으로만 이해하려고 했었는데, 지금은 그게 있는 그대로의 진실로 생각되는구나.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게 아니하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다.' 나는 길거리에 몰려나와 분열과 갈등을 획책하는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계명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더라. 진실한 신앙은 말없이 낮은 자리에 서고, 누군가의 눈물을 닦아주고, 넘어진 이를 일으켜 세우는 것이어야지." "몇 주 전에 하신 말씀이 생각나요.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향한 수난의 길을 걷고 있을 때 제자들은 스승의 고뇌를 이해하지 못한 채 '누가 크냐?'는 다툼을 벌였지요. 그건 그들의 관심이 온통 자기 자신에게 집중되었기 때문이라면서 모을 집(集)에 가운데 중(中)의 집중(集中)은 한 가지 욕심으로 마음이 쏠리는 것이라고 하셨어요. 그에 비해 예수님의 삶은 잡을 집(執)에 가운데 중(中)의 집중(執中)의 삶이라 하셨어요. 가운데, 즉 진리를 굳게 잡은 자라야 자기를 넘어설 수 있다구요." "그래, 인도의 간디 알지? 그 까무잡잡하고 조그마한 인도인이 사람들에게 '마하트마' 곧 위대한 혼이라고 불리운 까닭이 뭐겠니? 그건 그의 삶이 執中의 삶이었기 때문일 거야. 그의 삶을 요약하는 말은 '사티하그라하'(satyagraha)와 '아힘사'(ahimsa)일 거야. 사티하그라하는 수동적 저항이라는 뜻도 있지만, 사실은 진실 혹은 본질(satt)을 굳게 붙잡는다(graha)는 뜻이야. 진리를 굳게 붙잡은 사람은 아힘사를 실천하게 되는데, 아힘사는 '불살생'을 일컫는 말이야. 아힘사를 실천하는 사람은 있는 힘을 다하여 지극히 작은 생명 하나라도 살해하지 않고 그것을 구해주려고 애쓰게 마련이지. 이게 자비이고 긍휼 아니겠니? 영국이 무서워한 것은 인도인의 총과 칼이 아니라, 이 자그마한 노인의 물레와 굽힐 줄 모르는 자비 정신이었어. 재미있지 않니?" "역사가 혼미함 속으로 곤두박질칠 때 사람들이 이심전심으로 모여서 밝혀든 촛불은 어떤 의미에서는 한국적인 사티하그라하일 수도 있겠네요." "정말 그런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의 의미를 늘 당시에 깨닫는 것은 아니니까." ● 빛의 세상을 향하여 "촛불이 증오나 적대감의 표현이 아닌 데도 사람들이 그걸 못마땅해하는 까닭이 무엇일까요?" "그 속에 어떤 정치적인 책동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겠지.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촛불집회를 누군가의 선동과 기획에 의해 조직적으로 일어난 일로 보더라. 너도 촛불집회에 나갔었지? 너를 그 거리에 내몬 것은 누구니?" "배후가 어디 있어요. 처음에는 역사의 물줄기를 뒤로 되돌리려는 이들에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서 나갔는데, 그 촛불의 물결 속에서 이상하게도 감동을 받았어요. 거기에는 미움도 증오도 누군가에 대한 배척도 없었어요. 지금까지 관습적인 예배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어떤 영적인 전율을 느껴졌어요. '의미'보다는 '재미'를 우선적으로 추구하며 살던 나도 역사의 주체일 수 있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 올랐어요." "3월의 광장이 네 영적인 학교였던 셈이구나. 촛불 집회는 우리 정치 문화의 새로운 이정표가 될 거야. 권모와 술수가 판을 치는 정치문화 속에서 촛불은 정치를 영적인 사건으로 만들고 있는 셈이지. 나는 시민들이 돌멩이와 화염병 대신 촛불 한 자루를 켜듦으로써 역사적 갈등을 민주주의의 축제로 승화시켰다는 점에서 2004년의 봄을 아름답게 기억하고 싶구나." "봄이 온 듯하더니 벌써 여름을 향해 가나봐요. 저는 벌써 더워요." "덥지만 빛은 더욱 밝아지겠지. 대낮에 촛불을 밝혀들고 사람을 찾았던 광인이 있었다지. 모두가 세상이 환하다고 말하는 세상에서 홀로 인간의 밤을 보면서 촛불을 켜든 이를 광인이 아니라 시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야 빛의 세상이 오겠지?" (김기석∥청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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