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하늘땅사람이야기2: 기억과 망각 사이 2004년 03월 0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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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과 망각 사이 ● 참담한 부끄러움의 재 속에서 "오늘 아침에 하박국을 읽었는데 3장 13절에 나오는 말씀이 제게는 좀 섬뜩하더라구요." "어떤 내용이지?" "주께서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려고, 기름 받은 자를 구원하시려고 나오사 악인의 집머리를 치시며 그 기초를 끝까지 드러내셨나이다." "뭐 찔리는 일이 있나보지?" "아니 그런 건 아니고요, '그 기초를 끝까지 드러내셨나이다' 하는 대목에서 뿌리를 드러낸 나무(露根)의 안쓰러운 모습이 떠올랐거든요. 언젠가 말씀하셨잖아요, 나무를 살리는 것은 뿌리인데, 그 뿌리는 땅에 숨겨져 있어야 제 구실을 할 수 있다고요." "그런 말을 다 기억하고 있구나. 제법인데." "안 듣는 것 같아도 다 듣는다니까요." "그 구절을 들으니까 나도 속이 편치는 않다. 굳이 '악인'을 자처할 생각은 없지만 여하튼 하나님이 내 인생의 집머리를 치시면 그 기초까지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생각만 해도 오싹하다. 내 인생의 집이 얼마나 부실한 토대 위에 세워졌는가가 드러나면 다른 사람들은 고사하고 나 스스로에게도 부끄러울 것 같아서 말이야." "그렇게 서해바다처럼 쓸쓸한 목소리로 말씀하시면 어떡해요? 내가 좀 엄살을 피우고싶어 다가와도 얼른 자기 반성 속으로 도피하시니 말이에요." "내가 그랬나? 미안하다. 그런데 뭐 걱정되는 일이라도 있니?" "걱정보다도 화가 나서요. 요즘 정치인들이 하는 양을 보고 있노라면 아나키스트들의 심정이 이해가 간다니까요? 특히 '친일진상규명법'인가요? 3.1절을 앞두고 우여곡절 끝에 통과된 그 법안을 훑어보면서 '눈 가리고 아웅' 한다는 말을 실감하게 되었어요. '해묵은 상처를 건드려 덧낼 필요가 뭐가 있냐, 우리도 그 시대에 살았더라면 똑같이 처신할 수밖에 없었을 거다, 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한 일이다'. 이게 내가 살고 있는 나라의 소위 어른이라는 사람들의 수준이구나 하고 생각하니 암담해요." "그래, 그런 생각이 들만도 하지. 나도 때로는 암담한 생각에 사로잡힐 때가 많으니 말이야. 하지만 나는 지금의 역사적 혼돈을 긍정적으로 봐. 어쩌면 우리가 잃어버렸던 정신적 주체성을 되찾을 수 있는 좋은 기회인지도 몰라. 병든 터전 위에 새로운 집을 지을 수는 없지 않겠니? 나는 오랫동안 망각의 늪 속에 잠겨있던 역사의 진실이 수면 위로 드러날 때마다 하나님이 가인에게 하셨던 말씀이 떠오르더라.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한다.' 참 무서운 말씀이야. 노근리 학살 사건, 제주도 4.3사태, 거창 양민학살사건, 그리고 친일파들의 행적 등…. 부끄럽고 원통해. 지금까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앞만 보고 달리느라고 죽은 이들의 하소연에도 귀를 막고, 살아있는 이들의 절통한 사연에도 눈을 가리고 살아온 거지. 하지만 역사는 지나가 버린 것이 아니야. 함석헌 선생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어. '그것은 결코 지나간 것이 아니다. 현재 안에 아직 살아 있다. 완전히 끝맺어진 것이 아니라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뜻으로 본 한국역사』(한길사, 1997), 39쪽] 어떠한 역사도 완료형이 아니야. 그것은 사람들의 기억을 통해 지금과 관계를 맺지. 어떻게 해야 할까? 이 못난 민족의 눈물의 역사에 눈을 감아버릴까? 하지만 그것은 정신의 비겁일 뿐이야. 무덤에 회칠을 하는 사람들처럼 역사를 미화해야 할까? 그건 자기 기만이지. 두 눈 똑바로 뜨고 우리의 부끄러운 역사를 직시해야 해. 그러면 그 참담한 부끄러움의 재 속에서 새로운 정신이 움터나올 거야." ● 망각의 매혹을 떨치고 "그런데 한사코 숨기고 덮어두려고 하는 이들이 있으니 문제지요. 어느 유명한 언론인은 친북이 친일보다 열 배는 나쁘다고 했더군요. 인터넷 신문으로 읽어봤는데, 가관이었어요. '친일은 거의가 일제의 강압에 의해 이뤄졌고 거의가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이길 것이란 정보부족 사태에서 이뤄졌다.' 그래서 어쨌다는 거죠. 우리가 어떤 사람의 처지를 아픔을 가지고 이해하는 것과 잘못을 호도하는 것은 전혀 다른 거잖아요? 사람은 생각하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사는 대로 생각한다더니, 자기가 서있는 입장에 따라서 똑같은 현실을 어찌 그리 달리 볼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저는 인간의 지성에 대해서 점점 회의적이 되어가고 있어요. 합리적이고 보편적인 이성은 간 데 없고, 편가르기에 입각한 자기 합리화나 억지 논리가 지성일 수는 없으니까 말이에요. 드레퓌스 사건 때 보여준 프랑스의 지성인들의 태도까지는 기대하지 않아요. 다만 곡학아세하지는 말아야지요. 펜을 꺾든가." "바로 그게 우리 사회의 병리현상의 뿌리일 거야. 지성은 덧칠하는 게 아닌데. 너무나 많은 지식인들이 강자의 이익을 대변하고, 또 기득권자들의 행태를 정당화하면서 밥벌이에 열을 올리지. 종교까지도 그런 대열에 가담하고 있으니 답답한 노릇이다." "거짓 종교는 사람들을 잠들게 하지만, 참 종교는 사람들을 깨운다면서요? 언젠가 비동일성의 고통에 대해 말씀하신 적이 있어요. '현실의 나'와 '이상화된 나' 사이에 놓인 비동일성의 고통을 잊으려고 사람들은 즐겨 망각을 택한다는 내용이었던 것 같아요. 사람들이 술과 오락, 마약이나 향락에 빠지는 것은 그것이 정직한 자기 얼굴과 대면할 순간을 지연시켜 주기 때문이겠지요? 종교도 기억보다는 망각의 전략을 사용할 때가 많은 것 같아요." "호메로스의 『오뒤세이아』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모양이구나. 이 책에서 오뒤세우스 일행은 마녀 키르케의 섬에 올라가는데 거기서 오뒤세우스의 부하들은 키르케가 주는 음료수를 마시고 돼지로 변해버린단다. 문제는 그들이 돼지의 외모와 털과 목소리를 가지게 되었으나, 분별력만은 여전하여 예전과 다를 바 없었다는 것이다. 돼지의 몸을 가진 인간이라는 이 기묘한 비동일성은 결국 사람을 선택 앞에 서게 하지. 인간이었다는 기억을 잊어버리고 돼지로서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고통스럽더라도 끝까지 기억을 유지할 것인가? 트로이 전쟁에 참여했던 오뒤세우스가 고향인 이타카로 돌아가는 길에 생긴 여러 가지 이야기를 엮은 이 놀라운 서사시는 기억과 망각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단다. 한번은 풍랑을 만나 표류하던 오뒤세우스 일행이 파도에 떠밀려 어느 해안가에 당도하는데, 그곳은 로토파고이족의 땅이었대. 섬의 주민들은 오뒤세우스의 부하들에게 로토스를 먹으라고 주었어. 꿀처럼 달콤한 로토스를 먹은 사람들은 귀향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그곳에 머물기를 원했어. 오뒤세우스는 울고불고하는 이들을 억지로 잡아끌어 노젓는 자리에 묶고는 배를 저어 그곳을 떠나버렸지." "그 섬 참 매혹적이네요. 혹시 어딘지 아세요?" "왜 가보게? 사는 게 많이 힘든 모양이다." "힘들지요. 아무튼 즐겁고 아름다운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지만, 부끄럽고 고통스러운 기억을 유지한다는 것은 여간 힘겨운 일이 아닐 거 같아요." "개인의 삶에서 일어나는 도피적 망각은 한 존재의 영적 건강을 위협하지만, 역사 속에서 벌어진 일들에 대한 33망각은 훨씬 더 위험하지. 그런데도 사람들은 즐겨 로토스를 먹으려 하지. 망각은 기억보다 달콤하니까. 그런데 망각보다 더 위험한 것은 왜곡된 기억의 주입이야. 친일파들이 애국자로 둔갑하고, 독립운동가들과 그들의 후손들이 역사의 변방에 유폐되어버린 것, 이보다 가혹한 일은 없을 거야. 나는 지금 우리가 감당해야 할 역사적 소명은 '망실된 기억의 복원'과 '왜곡된 기억의 바로잡음'이라고 생각해. 그 시절을 몸으로 살아냈던 이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나기 전에 그들의 몸에 새겨진 아픈 기억들을 되살려내는 것은 한풀이의 기능이 아니라, 오늘의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이 될 거야." ● 땅에 묻힌 진실을 캐내며 "좀 바보스러운 질문이지만 기억을 되살리는 게 오늘의 역사 바로 세우기와 어떻게 연관되지요?" "정말 바보스러운 질문이구나. 하지만 어쩌겠니? 그게 우리 교육의 문제이니.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과거는 과거로 흘러가 버리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보이지 않게 우리 삶을 규정하고 있다는 점이야. 너도 언젠가 말했지. 술이 거나해지면 일제시대에 배웠던 노래를 향수에 가득 찬 음조로 부르는 분들을 보면 화가 난다고. 그건 그저 거리가 미를 창조한다는 말이 있듯이, 옛 시절에 대한 아련한 향수일 수 있어. 하지만 정작 심각한 문제는 일제에 부역하던 이들의 후손들이 지금도 사회의 지도층을 형성하고 있다는 사실이야. 그리고 일제를 거치면서 우리 속에 내면화된 자기비하의 감정이 여전히 지금도 맹위를 떨치고 있다는 사실이야. 지금은 국민학교라는 용어가 폐기되었다만 우리는 해방된지 50년이 넘도록 '국민학교'라는 말에 담긴 어두운 이데올로기를 떨쳐버리지 못했던 거야. '국민'이라는 말은 황국신민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지탱하기 위해 동원되고, 통제되고, 조작될 수 있는 집단을 뜻하는 단어였단다. '국민'이라는 말의 대척점에 있는 단어는 '비국민'일 텐데, 국가가 제시하는 이데올로기에 복속되기를 거절하는 사람들에게는 '비국민'이라는 낙인이 찍혔던 거지. '비국민'의 낙인 가운데 가장 선명한 것이 뭔지 아니?" "빨갱이라는 말이요?" "제법인데. 그래, 우리는 오랫동안 빨갱이라는 말에 가위눌려 지내왔지. 반공이 국시인 나라였으니 말이야. 우리가 '나'와 다른 '남'을 용납하지 못하는 것은 오랫동안 가르고 배제하는 데 익숙한 세상에서 살았기 때문일 거야." "얼마 전 텔레비전에 나오신 어느 독립운동가 할아버지가 아직도 우리 조국은 해방을 체험하지 못했다고 하시는데, 가슴이 찡해졌어요. 친일파들이 훈장을 받는 것을 보고는 3.1절 기념식장에 한번도 안 가셨대요." "그래, 이제야말로 진실이 규명되고, 역사가 바로 서야 할 때야."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은 진실을 외면하는 사람, 그들의 텅빈 영혼보다 텅빈 주머니에 더 마음을 쓰는 이들을 보면서, '인간의 영혼이 타락하여 한 조각의 고깃덩어리가 되었다'고 했더군요. 그의 말을 들을 때마다 저는 가슴에 전율을 느껴요. 그는 진실은 땅에 묻혀 있다고 말해요. 그런데 우리에게 들려오는 것은 진실이 묻혀 있는 땅의 껍질을 다지는 인간들의 발자국소리인 거죠." "그래서 필요한 것이 진실을 찾아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증인들이지. 증인들의 행렬이 오늘에서 내일로 끊임없이 이어진다면 언젠가는 진실은 드러나게 마련이지." ● 참회와 속죄 없이는 "그런데 진실은 늘 아픈 거잖아요?" "아픔을 견디면서 현실을 직시하게 될 때 우리 역사는 조금씩 발전해 갈 거다. 그리스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전기를 읽다보니까 이런 대목이 나오더구나. 터키인들이 그리스의 기독교인들을 살해하는 무서운 밤이 지난 후 카잔차키스의 아버지는 어린 아들을 데리고 핏자국이 흥건한 거리를 지나 커다란 고목 대추야자나무가 있는 마을의 중앙 광장으로 갔어. 그 나무에는 목이 매달린 사람들이 흔들거리고 있었는데, 그들은 맨발에 속옷만 걸쳤고, 짙푸른 혓바닥이 입에서 축 늘어져 있었어. 어린 니코스는 차마 그 광경을 볼 수가 없어서 얼굴을 돌리고 아버지의 무릎에 매달렸어.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의 머리를 꽉 잡고는 대추야자나무 쪽으로 돌렸어. 그리고 그들을 똑바로 보라고 외쳤어. '죽을 때까지 목이 매달린 이 사람들은 절대로 네 머릿속에서 사라지면 안 된다. 알겠지!' 공포에 질린 아들이 물었어. '누가 그들을 죽였어요?' '자유가 죽였어!' 이 짧은 한 마디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한 평생의 주제가 되었어. 아버지와 아들이 집으로 돌아갔을 때 어머니가 어디에 다녀왔냐고 물으니까 아버지는 무뚝뚝하게 대답했어. '예배를 드리러 갔었지.' 벌써 읽은 지 25년쯤 된다만 나는 이 대목을 잊을 수가 없어." "무섭네요. 자유의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이 생각나네요. 그러고 보면 우리 젊은이들은 너무 안일한 게 아닌가 싶네요. 어쩌면 우리들은 가슴에 각인된 뚜렷한 기억이 없어서 불행할 수도 있구요." "별 소리를 다 하는구나." "배부른 자의 헛소리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의 정신이 빈곤한 것이 어쩌면 기억의 빈곤 때문이 아닌가 싶어서 그래요." "기억의 빈곤이라? 네가 그 말을 하니까 서독의 대통령이었던 폰 바이츠제커의 말이 생각나는구나. 그는 1985년 5월 8일 종전 40주년을 맞아 국회에서 이런 연설을 했단다. '지나간 일은 수정되거나 백지화될 수는 없다. 그렇지만 과거에 대해서 눈을 감는 사람은 현재에 대해서는 장님이 된다.……참회와 속죄 없이는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과거를 기억함은 역사를 통한 하나님의 증언이다. 그것은 속죄의 원천이다.……이 증거를 망각하는 자는 내일에 대한 믿음을 상실하게 마련이다.' 여기에 비하면 이제 매년 신사를 참배하겠다는 일본 고이즈미 총리의 발언은 얼마나 한심한지 모르겠다.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인 오에 겐자부로가 뭔가 늘 비웃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고이즈미를 신랄하게 비판한 까닭이 무엇인지 알 듯도 하더라. 아까 네가 인용했던 하박국의 한 구절이 떠오르는구나. '네가 여러 민족을 멸한 것이 네 집에 욕을 부르며 너로 네 영혼에게 죄를 범하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담에서 돌이 부르짖고 집에서 들보가 응답하리라.'(2:10-11) 약탈한 것으로 멋진 집을 지어보았자 그게 스위트 홈이 될 수는 없다는 말이지. 담에서 부르짖는 돌의 외침과 거기에 화답하는 들보의 탄식을 듣지 못한다면 만물의 영장이라는 우리의 자랑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니?" "사실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고 참회한다는 게 말처럼 쉽진 않은 것 같아요. 때로는 나의 잘못이 명백한 데도 자존심 때문에 오히려 언성을 높일 때도 있거든요. 정치인들이 일반 대중들의 상식에도 못 미치는 언행을 하는 것을 볼 때마다 '저게 저 분들의 본심일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자기들의 정파의 이익을 위해서 가면을 쓰고 행동하면서, 그 대신 자기 동일성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어요." "그래, 어쩌면 현실 정치인들에게 중요한 것은 '진실'이 아니라 '이익'인지도 몰라. 그들에게 참회와 속죄는 종교적 영역에 국한된 말인지도 몰라. "비참하네요. 꼭 그렇게 살아야 하나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을 '진실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로 푸신 적이 있지요? 진실은 안팎이 일치되는 것이고, 안팎이 일치될 때 비로소 아무 것도 두려워할 게 없으니 내적인 자유를 얻게 된다구요?" "별 걸 다 기억하고 있구나. 여하튼 고맙다. 내 말을 흘려듣지 않았으니." "그나저나 친일진상규명법이 통과되었다고는 하지만 정말 실효를 거둘 수 있을까요? 아무래도 안팎의 방해가 워낙 커서 유야무야되고, 또 적극적인 친일분자들이나 소극적인 부일배(附日輩)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계기가 될까봐 겁이 나요." "그러니까 눈을 똑바로 뜨고 지켜보아야지.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대추야자나무에 매달린 사람들의 처참한 모습을 바라보았던 것처럼. 모두가 잠이 들어도 정신을 차리고 깨어있는 이들이 있는 한 희망은 있을 거야. 그리고 우리가 늘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역사의 주인은 공의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이야. 하나님을 배제한 채 행하는 인간의 일들을 보면서 하늘에 계신 분이 웃으신다고 하지 않든. 그 웃음소리를 듣는 귀가 열려야 역사적 지성을 가진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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