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하늘땅사람이야기1: 인생은 살만한가 2004년 02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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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살만한가 인간에 대한 예의 "겨울 산에 들어오면 언제나 눈의 품에 안긴 생명의 씨앗이 떠올라요." "또 뭔가 이야기를 하고 싶으신 거지요. 저기 햇살 좋은 자리가 있네요. 잠시 쉬었다 가지요." "저 멧비둘기의 평안을 깨는 것 같아 미안하네요." "양해하겠지요.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힘겨운지 알면 제가 알아서 자리를 비워줘야지요. 그건 그렇고 아까부터 왜 자꾸 한숨을 내쉬세요, 산에까지 오셔서?" "요즘 죽음의 망령이 한반도 상공을 배회하고 있는 것 같아서 우울해요. 초등학생, 중학생, 대학생 할 것 없이 살해당하고, 자살하고…" "살맛 없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아진다는 거겠지요." "왜 그럴까요? 언제 우리가 유토피아에 산 적이 있었나요? 힘겨워도 그게 운명이려니 하고 견디면서 살았지…" "웬 운명 타령이세요? 하지만 우리 시대에는 그늘이 없어져버린 것 같아요. 뙤약볕 아래를 걸어가는 느낌이에요. 욕망의 집에는 지붕이 없다면서요? 그러니 그 안에 사는 이들은 늘 목마를 수밖에 없지요." "태양 때문에 살인을 저질렀다는 뫼르소가 되신 것 같네요. 자칫하면 갱년기를 맞은 40대 아줌마의 푸념이라는 소리를 듣겠어요. 그나저나 사회적 수모를 감내하기 어려워 오늘의 고통을 스스로 해결하려고 한다는 유서를 남기고 떠난 고위 공직자의 죽음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말하고 싶지 않은 데요." "할 말이 없다는 말인가요? 말하자면 피곤하니까 그만 두겠다는 말인가요?" "참 짓궂으시네요. 말하기 싫다는 데." "기왕 짓궂다는 말을 들었으니까, 하나만 더 묻지요. 그의 죽음을 둘러싼 사람들의 반응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답답해요." "……" "한 사람의 죽음 앞에서 너무 예의가 없는 것 같아요." "정치적인 목적으로 덧칠하는 것 말인가요?" "예, 죽음의 고뇌를 이해한다면 그걸 당장 해석하려는 성급함은 피해야지요. 그건 그야말로 그를 두 번 죽이는 일 아닌가요? 그 사건 자체가 말할 때까지 버려두는 기본적인 예의는 모두가 지켰으면 좋겠어요." "충분히 공감해요." "그뿐 아니라 어떤 사람의 삶을 너무 흑과 백으로 가르는 것도 문제지요. 세상에 전적으로 옳고 깨끗한 사람이 어디에 있으며, 장점이라곤 하나도 없는 종자가 어디 있겠어요? 뒤섞인 거지요. 교회학교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바탕을 희게 만드셨는데 우리가 자꾸 죄를 지으면 그 마음이 시꺼매진다고 했대요. 그러면서 학생들에게 '지금 여러분의 마음은 어떤가요?' 했더니 한 녀석이 대답하더래요. '우리는 얼룩이지요 뭐.' 우리가 그런 것 아니겠어요?" "참 재미있는 이야기네요. 험한 세상을 살아와서인지 우리는 사실 가르고 자르는 일에 익숙한 편이지요. '소이小異' 때문에 '대동大同'을 버릴 때가 많았어요. 투쟁 국면에서는 어쩌면 당파성을 견지할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이제는 두루 살펴 너무 치우치지 말아야 하는데, 우리는 모든 것을 일도양단으로 재단해서 갈무리해두려는 경향이 강한 것 같아요. '나쁜 놈' 아니면 '좋은 분'인 거지요." 프로메테우스의 시간 "제가 그의 죽음의 풍경 가운데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은 그의 죽음을 의인의 죽음으로, 순교의 빛깔까지 덧칠해 미화하는 것이에요. 그게 한 인간에 대한 진정한 예의인가 하고 생각해보지만, 영 개운칠 않아요. 뭔가 그 의도가 도드라져 보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어요." "독직 혐의를 받고 있던 그분은 시민적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데 대해 직접적으로 책임을 지려 한다면서 자살을 택했는데, 저는 이 대목이 좀 석연치 않아요. 꼭 자살이어야 했나? 물론 그가 겪은 모멸감과 아픔을 제가 다 이해할 수는 없어요. 그래요, 어쩌면 우리는 남의 이야기니까 쉽게 말하는지도 몰라요……하지만 고통 속에서 죽음을 택하는 것은 가장 쉽고 나태한 방법이래요. 죽음은 그렇게 서두를 것이 못되는 것 아닌가요? 수모를 감내하면서 자기를 돌아볼 수 있었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가끔은 감옥에 가서 큰 정신이 되어 나오는 분들도 계시지요? 자주 말씀하신 디이트리히 본회퍼 목사님이나, 번연, 바울 사도…" "모든 것을 서열화하는 사회에서 경쟁을 통해 성장한 사람들은 대개 오르기에는 익숙하지만, 내려오는 일에는 매우 서툴지요. 사실 산 길을 걸을 때도 올라가기보다는 내려오는 게 훨씬 어렵잖아요? 올라갈 줄 알면 내려올 줄도 알 거라고 생각하면 그건 오산이에요. 높아지려는 자기 마음을 자꾸 끌어내려야 해요. 마를린 몬로가 치마를 끌어내리듯이." "에이, 마를린 몬로는 치마를 끌어내리는 게 아니라, 뭔가를 보여주려고 그런 장면을 연출한 거지요. 잘 아시면서. 사실 저도 살아가면서 큰 어려움을 겪어보지 않은 터이라 삶의 터전이 흔들리고, 급기야는 정성스레 쌓아올린 인생의 공든 탑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바라볼 때의 심정이 어떤 건지는 잘 모르겠어요. 철없는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그 무참한 추락의 순간에도 가슴 한 구석에는 후련함이 슬쩍 얼굴을 보이는 것은 아닐까 싶어요. 우리는 애착하는 것만큼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생각도 있는 것 아닌가요? 저는 가끔 코카서스 산정에서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 먹히는 고통을 감내해야 했던 프로메테우스를 생각하면서 비장한 결의를 다질 때도 있어요. 시시하게 징징거리지 말아야지." "와, 이야기를 듣다 보니 굉장한 아줌마네요. 아 참, 이렇게 이야기하면 야단맞지. 프로메테우스 이야기를 듣고 너무 놀라서. 왜 이 사건을 두고 프로메테우스가 떠올랐는지는 모르겠지만, 프로메테우스의 고난은 자취한 고난이지요. 그것도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을 위해서 말이에요. 그런 의미에서 그는 영웅이지요.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신 분이 떠오르네요. 십자가의 시간, 그 야수의 시간에 낄낄거리며 죽어가는 자를 조롱하던 이들조차 용서하시던 분,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침묵 앞에서 그분이 느끼셨을 암담함, 그러나 그분은 자기 몫의 잔을 남김없이 다 마셨지요." "……" 어른이 그립다 "미안해요. 설교조가 되었네요. 직업병이려니 하고 양해해주세요." "그래도 재빨리 알아차리셨으니 됐어요. 저는 우리 시대의 지도자들이 정말 정신의 '어른'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철인 왕을 기다리는 것은 아니지만, 구체적인 문제 앞에서는 치밀하게 일을 처리하면서도 혼자 있는 시간에는 철저히 자신을 돌아보는 사람들 말이에요." "'어른'을 '성인成人'이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누구한테 배운 말인데 '성인'은 '성인成仁, 즉 어질게 된 사람'을 의미하는 거래요. 그럴 듯 하지요? 그러니까 어른이란 자기만 아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이들을 진심으로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란 뜻일 거예요. 내가 학교에 있을 때의 일이 생각나네요. 무더운 여름날 학생들의 눈이 수초 사이에 떠있는 붕어눈처럼 어벙벙 하길래 각자 자기 꿈 이야기를 나누자고 했어요. 그랬더니 아이들 눈에 빛이 돌아오데요. 학생들의 꿈의 무늬는 참 다양했어요. 호텔 여사장이 되겠다는 화려한 꿈으로부터, 지금도 현역인 어느 정치인의 아내가 되겠다는 당돌한 아이까지…어떤 아이는 자기는 어떻게든 대학에 가야한대요. 그래서 추임새를 넣는 기분으로 '왜?' 하고 물었더니, 대학가요제에 나가야 하기 때문이래요. '그 다음에는?' 하고 물었더니 졸업하는 날 바로 결혼할 거래요. 그 이유가 뭔지 아세요. 주부가요열창에 나가기 위해서래요. 아이들은 폭소의 도가니가 되었어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그런 이야기가 이어지다가, 어느 학생 순서가 되자 아이들 눈에 일순 긴장의 빛이 감돌았어요. 그 학생은 소위 좀 노는 아이였어요. 과연 저 아이가 일어나서 자기의 꿈 이야기를 할까 다들 궁금한 표정이었어요. 그런데 그 아이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다소 뜸을 들이다가 '나는 어른다운 어른이 되는 게 꿈이에요' 하고 말했어요. 그 낯설고도 예기치 않은 대답에 아이들은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몰라 내 표정을 할끔거렸어요. 나는 이야기를 거드느라고 물었지요. '어른다운 어른이 어떤 건데?' 그러자 즉시 이런 대답이 돌아왔어요. '자기 말과 행동에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이요.' 그리고 아이는 자리에 앉았어요. 뭔가 둔중한 것으로 한 대 맞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그 아이의 말 망치가 내 정수리를 친 거지요. 나중에 알았어요. 그 학생의 아버지는 몇 년 전에 집을 나가버렸고 어머니는 자포자기적인 심정으로 살아가고 있었어요. 그때부터 나는 '어른' 하면 자기 말과 행동에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을 떠올리게 돼요." "저는 어른이 된다는 걸 가벼워진다는 말로 이해하고 싶어요." "물론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아니겠지요?" "그럼요. 자유로워진다고 할까요? 집착으로부터 벗어난다고 할까요? 사실 나이가 들어서도 뭔가에 집착하는 것을 보면 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두고 볼 게요. 나중에 나이 들어서도 그렇게 말씀하실지." 자아가 속절없이 무너질 때 "정현종 시인의 <마른 나뭇잎>이라는 시 아시지요? 짧은 시인데 촌철살인이라고, 깊은 울림을 주더라구요. '마른 나뭇잎을 본다.//살아서, 사람이 어떻게/마른 나뭇잎처럼 깨끗할 수 있으랴.' 저도 때가 되면 깨끗이 질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덜 떨어진 사람 소리 듣기 싫은 거지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꼭 붙잡고 놓지 않는 게 덜 떨어진 거라면서요?" "아하!" "우리 삶이 누추해지는 것은 지켜야 할 자아가 너무 강하기 때문일 거예요. 자아, 그것은 우리 삶의 울타리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우리를 가두는 벽이자 올무이지요. 지나온 삶의 퇴적물인 자아는 마치 프랑켄슈타인처럼 자율적으로 움직이려 하지요. 어쩌면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잃는 한이 있더라도 자아의 울타리는 무너뜨리지 않으려고 하지요." "왜 그럴까요?" "자기의 실상과 대면하기 싫어서가 아닐까요? 어거스틴의 말이 떠오르네요. 그는 친구인 뽄띠치아누스의 말을 들으면서 마음이 뜨거워지지요. 그는 그때의 경험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어요. '그가 말하는 동안 주여, 당신은 나를 내 자신 안으로 돌이키게 하셨습니다. 자신을 살피기가 싫어서 여태 내가 있던 내 등뒤에서 나를 떼쳐서 바로 내 얼굴 앞에다 나를 세워놓으셨습니다. 얼마나 추하고 일그러지고, 더럽고 때 끼었고, 종기투성이인지 보아라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걸 처음 읽었을 때 솔직히 기가 턱 막히더라구요.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제 이야기였어요. 지금도 마찬가지 아닌가 하는 생각에 가끔 아득해지기도 해요. 사람들은 거울 앞에 서서 제 얼굴은 들여다보면서도 제 마음은 한사코 들여다보려 하지 않지요. 제 본 모습을 볼 자신이 없기 때문에, 자아의 울타리를 세우고 그 뒤에 숨어버리는 거지요." "그러니까 채 준비도 안 됐는데, 자아가 속절없이 무너질 때 사람들은 살아갈 용기를 잃게 되는 건가요?" "글쎄요, 참담하겠지요. 문제는 그 이후예요. 무너진 자아의 잔재를 끌어 모아 어떻게든 그것을 재구성해보려고 애를 쓰는 이들도 있어요. 참 안쓰러운 노력이지요. 하지만 아까 말씀하신 대로 자발적으로 버리지는 못했지만, 외부의 충격으로라도 그 감옥이 무너진 것을 홀가분하게 생각하면서 새로운 삶을 꿈꾸는 사람도 있어요. 이런 이들은 어느 정도는 자기 삶에 여백을 만들었던 사람들이겠지요." 인간의 위대함(?) "저는 가끔 속절없이 세상을 버리는 사람들을 볼 때면 가끔 생텍쥐베리의 <<인간의 대지>>에 나오는 이야기가 생각나요. 거기서 그는 1935년에 파리와 사이공 사이의 장거리 항로 개척 비행 중에 북아프리카의 리비아 사막 한복판에 추락했던 자신의 경험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어요. 산채로 모래바다 위에 내던져진 것만도 기적이었지요. 침착한 그는 치밀한 과학자의 계산으로 가능한 모든 방법을 모색하여 인간의 세계로 되돌아갈 길을 찾아 헤맸대요. '습도가 낮은 이곳에서 이대로 가면 24시간이 지나면 목숨이 가랑잎처럼 말라버릴 것이다. 허지만 지금 동북풍이 바다 쪽에서 불어오니 습도는 약간 높아질 것이다. 그래, 동북쪽으로 가자.' 그는 밤에는 낙하산 천을 찢어 모래 위에 깔아놓았다가 새벽에 이슬을 짜서 목을 축였대요. 그러나 며칠이 지나면서 구원의 여망은 보이지 않았어요. 냉철한 그는 마지막 방법을 쓰기로 했어요. 비행기의 잔재를 태우는 것이었지요. '세상에서 불을 다룰 수 있는 동물은 오직 인간뿐이니, 누군가가 사막에서 일어나는 불꽃을 본다면 우리는 구원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누군가가 찾아와 주기를 고대했어요. 그러나 아무도 그를 찾아오지 않았어요. 다음 날 그는 다시 걷기 시작했어요. 그대로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순간순간 다가왔겠지요. 하지만 그의 뇌리에 떠오른 것은 라디오 앞에 앉아 이지러진 얼굴로 절망에 잠겨 기다릴 아내의 얼굴과 불안과 초조에 사로잡힌 친구들의 얼굴이었대요. 그때 섬광처럼 '조난자들은 내가 아니라 바로 그들이다. 내가 그들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이 떠올랐대요. 죽음의 순간에 그는 자기보다 더 큰 존재의 실상에 마주쳤던 것이지요. 죽고 싶고,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더라도 살아야 하는 까닭은 어쩌면 우리와 관계를 맺고 있는 이들 속에서 찾아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와, 이제 보니 이야기꾼이시네요." "놀리지 마세요." "놀리는 게 아니에요. 아무튼 나의 생명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가질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아니, 이건 생각의 문제가 아니라 깨달음의 문제이겠네요. '천지동근天地同根'이니, '만물일화萬物一華'니 하는 어려운 말을 굳이 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허무의 심연으로 떠내려가지 않는 것은 언제나 곁에 '너'가 있기 때문이지요. 때로는 귀찮게도 생각되고, 사르트르가 외쳤듯이 타인이 지옥처럼 느껴지더라도 말이에요. 결국 내 생에 대한 결정권은 나만의 것일 수는 없다는 말이지요." "이야기가 어째 늘 듣던 결론으로 가는 것 같네요." "별 수 있나요. 한 우물에서 나오는 물맛이 비슷할 수밖에요." "오해하지는 마세요. 진부하다는 뜻은 아니니까요. 그런데 정말 인생은 살 만한 것일까요?" "아니, 왜 이러세요. 다시 원점으로 가자는 거예요? 어쨌든 그런 물음에 대해서 어떤 분은 정답이 없는 문제를 붙들고 씨름하느라 세월 보내지 말고, 눈앞에 보이는 일을 붙들고 성심껏 살라고 하더군요." "나는 그래도 인간이 위대했으면 좋겠어요." "어떤 게 위대함일까요? 그리스 비극은 자신이 지신 가능성을 끝까지 밀고 나가 눈을 크게 뜨고 파멸될 수 있다는 것을 인간의 위대함으로 제시한대요." "십자가를 향해 돌아서면서, '이제는 일어나 가자' 하셨던 분처럼요?" "그래요, 이제 일어나 가지요. 해 지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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