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영혼의 미로 속에서 길 찾기 2004년 01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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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미로 속에서 길 찾기 (이 글은 '오늘 이땅에서 성직자로 산다는 것'이라는 제목으로 썼던 글을 월간지 <<기독교사상>>의 요청으로 보완한 것이다. 십계명을 풀어 쓴 부분은 손대지 않았다.) Ⅰ. 내 마음 다 팔았고나 내 마음 다 팔았고나! 다 팔아먹었고나! 아버지가 집에서 나올 때 채곡채곡 넣어주시며 잃지 말고 닦아내어 님 보거든 드리라 일러주시던 그 마음 이 세상 길거리에서 다 팔아먹었고나! 다 팔아먹고, 다 헤쳐먹고, 이젠 껍데기만 남았고나. 님 생각이 나는 오늘엔 바쳐야 할 그 맘은 없고 세상 풍파에 부대끼고 더러운 기록을 그린 이 껍질 밖에 없으니 무엇으로 님을 만나? 무슨 맘에 님을 찾나? 속았구나? 세상한테 속았구나! 그 사탕에 맘 팔고, 그 옷에 맘 팔고, 고운 듯 꾀는 눈에 뜨거운 맘 다 팔고 피리 소리 좋은 듯해 있는 맘 툭 털어주고 샀더니 속았구나, 속 없는 세상한테 속았구나! (함석헌, <내 마음 다 팔았고나> 부분) 첫 번째 제자들은 배와 그물을 다 버리고 예수를 좇았다. 그러나 버릴 배도 그물도 없었던 나는 달랑 단심(丹心) 하나 챙겨들고 길을 나섰다. 예수라는 대해에 언젠가 이르리라는 소망을 품고. 꿈결처럼 만났던 그 아름다운 인연들이 저마다 가슴에 품고 살던 예수, 그 인격의 핵심에 도달하기 위해 하류로 하류로 흐르리라고 다짐했다. 하류로 갈수록 소용돌이는 적어지고 흐름은 유장해지리라 기대하면서. 온전히 비우고 온전히 바치고 싶었다. 그러나 해가 갈수록 내 성정은 가팔라졌고, 지켜야 할 자아의 벽은 높아만 갔다. 난마처럼 얽혀 도무지 풀리지 않는 생의 물음과 치열하게 다투다가, 독신의 언사도 불사하다가, 허무의 물결에 휩쓸리기도 했다가, 젊음의 치기에 내몰리기도 하다가, 역사의 격랑 앞에서 두려워 떨다가, 조금은 고요해졌다. 난봉 낙타를 타고 사막을 횡단하듯 비장했던 마음의 결기는 어느새 풀어졌고, 표정도 사뭇 부드러워졌다. 모든 것을 삐딱하게만 보던 가파른 시선도 조금은 부드러워졌고, 빈정거리는 듯한 말투도 교양있는 말투로 바뀌었다. 영혼의 성숙인 줄 알았다. 그러나 실은 영혼의 혼미요 타락이었다. 내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었다. 앵무새처럼 남들의 말을 답습하고, 남의 표정을 훔쳐 내 것으로 삼았다. 나는 없었다. 더러웠다.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었어야 하는 건 욥이 아니라 바로 나였다. 그러나 나는 재 가운데 앉지 않았다. 편안한 자리에 앉았다. 이게 아니지 하는 자책이 없지 않았지만, 그 자리를 떠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배고픔도 목마름도 이제는 없다. 하늘에서 만나가 내리지 않아도 상관없었고, 반석에서 샘물이 솟지 않아도 괜찮았다. 기가 막힌 전락이었다. 이웃을 향한 애태움으로 세상을 밝혔던 예수의 혼불은 끄름만 남기고 스러졌다. 존중받고 대접받는 일에 익숙해졌다. 감사의 마음은 점점 줄어들고, 새로운 현실에 대한 당혹감은 사라졌다. 정신을 곤두세우고 치열하게 묻던 질문은 어느새 슬그머니 자취를 감췄다. 인생에는 해답이 없다는 말을 만능키로 삼아 하루하루 맘 편하게 사는 것이다. 물론 소유의 넉넉함은 누리지 않으려 애쓴다. 어쩌면 그건 마지막 남은 자존심일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이제 내겐 하류의 유장함도, 상류의 맑음과 치열함도 없다. 다만 하루하루 편안함만 구하는 소인배가 있을 뿐이다. 단심은 어디 가고, 누추한 허울만 남았다. 물신의 호랑이에게 팔다리마저 다 빼앗긴 채 피묻은 저고리로만 남았을 뿐, 삼십 대 초반의 청년 예수의 끓는 피는 사라졌다. 아, "다 팔아먹고/다 헤쳐먹고/이젠 껍데기만 남았고나". Ⅱ. 저 님이 가시기 전 해는 서산 위에 뉘엿이 눕고 내 몸은 피곤하고 저녁 바람은 가벼이 불 때 다 팔고 남은 내 맘의 껍질은 물 마른 우물같이 텅 빈 쓸쓸함만 길었는데 님은 저 언덕을 올라가시네, 저녁 영광 안으시고. 저 님이 가시기 전, 저 님이 저 언덕을 아주 넘으시기 전, 가자, 내 맘아, 팔다가 남은 부스러기라도 모아 가지고 가서 바치자. 받으시거나 아니 받으시거나 발 앞에나 쓰러지자! 세상아 내 맘을 도로 주어! 이 껍데기 세상아 내가 날 속여 껍데기로 만들었지만 네게 줄 내 맘이 아니었더니라. 님께 바쳐야 할 내 맘을 도로 내놓아, 어서 내놓아! 내가 본시 네게서 받은 것이 없었노라. (함석헌, <내 마음 다 팔았고나> 부분) 이제 해가 지려 한다. 나이로 보면 아직 서산낙일 신세는 아니지만, 내 마음은 급하다. 그래서 서편 하늘을 곱게 물들이는 노을의 고움을 노래하지 못한다. 쓸쓸한 겨울 하늘을 사선으로 비껴나는 새들의 비행을 외로운 눈길로 뒤쫓는다. 속은 다 쪼아 먹힌 채 오뉴월 무논 위에 둥둥 떠다니는 우렁이 껍질처럼 처량한 것이다. 이제는 돌아서야 한다. 쥐엄나무 열매를 삼키다가 아버지 집을 기억해낸 탕자처럼 이제는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나 돌아갈래!" 하고 외치던 영화 속의 인물처럼, 돌아감의 열망이 나를 사로잡는다. 너무 늦기 전에. 세상 즐거움에 너무 익숙해지기 전에. 높아지려는 마음의 낡은 옷, 편안해지려는 습성의 낡은 옷, 은밀한 쾌락의 충동을 감싸고 있는 욕망의 낡은 옷, 흐려지고 어두워진 영혼의 낡은 옷을 벗고, 벌거숭이가 될지라도 그분 앞에 서야 한다. 유골을 수습하는 사람의 조심스러움으로, 팔다가 남은 마음을 챙겨서 그분 앞에 가져가야 한다. 받고 안 받는 것은 그분의 마음이지만, 바치는 것은 나의 일이 아닌가. "아, 허구헌 길 굽기도 한지고! 당신을 떠나기만 하면 나은 무엇이 얻어질까 바라던 무엄도 했던 내 영혼이여! 등으로, 배로, 옆구리로 엎치락뒤치락해 보아도 모든 것이 고통일 뿐, 오직 하나 당신만이 안식이로소이다. 당신이야말로 늘 곁에 계시사 처절한 방랑에서 우리를 구하시고, 당신의 길 위에 우리를 세우시고, 말씀하시나이다. '내닫거라. 내가 너희를 안아다주마. 내가 너희를 데려다주마. 거기 가 내가 안아주마."(『고백록』, 제6권 제16장) 돌아가는 길이 쉽지는 않다. 옛 생활의 습성이 옷자락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몸에 익은 편리함을 버리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굳은 다리를 펴는 일도 힘겨운데, 굳은 마음과 삶의 습성을 펴는 일은 얼마나 어려울 것인가? 그래도 가야 한다. 울면서라도 가야 한다. 울면서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어들인다지 않던가? 가다가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한 걸음씩 그 길을 줄여나가야 한다. 나는 십계명을 그 길의 이정표로 삼기로 한다. Ⅲ. 돌아가는 길 십계명에 대한 주석이나 신학적 논증은 지금 이 자리에서 나의 관심이 아니다. 물론 십계명의 '삶의 자리'를 무시하면 안 되겠지만, 나는 오늘의 삶의 자리로 십계명을 불러내려 한다. 그것은 십계명을 입각점으로 삼아 지금 우리의 삶의 자리를 재확인하려는 것이다. 시인 김춘수는 주체와 타자의 관계는 '상호 호명 행위'를 통해 형성된다는 사실을 인상깊게 노래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호명행위는 관계맺음의 시작이다. 물론 호명행위는 꼭 언어라는 매체를 통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동양의 선비들은 '유현금'(有絃琴)이나 뜯을 줄 알지 '무현금'(無絃琴)을 뜯을 줄 모르는 이들은 금서(琴書)의 참맛을 모른다 했다. 소리 없는 호명행위는 가능하지만 호명행위 없는 관계란 없다. 호명하고 호명당하는 되먹임의 관계를 통해 우리는 자기 자신을 알게 된다. 지금 우리가 십계명을 호명하는 것은 십계명의 호명에 응답하기 원하기 때문이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나는 이 계명을 대할 때마다 의식의 가위눌림을 경험한다. 엄혹했던 시절 거리에서 불심검문을 당할 때만큼이나 이 계명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 유대교에 뿌리를 둔 유일신 종교의 '배타성'은 바로 이 계명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자리에서 종교 다원주의니, 종교간의 대화니 하는 말은 사용하고 싶지 않다. 다만 이 계명이 가리켜 보이는 해방적 진실에 잠시 눈길을 돌려보았으면 좋겠다. 섬겨서는 안 된다고 규정된 다른 신은 어떤 존재인가? 사람들을 자유의 길로 이끌기보다는 예속의 길로 인도하는 신들이다. 욕망을 부추기고, 두려움을 자극함으로 사람들을 지배하려는 신은 존재하지 않는 신, 인간들이 자의적으로 만들어낸 계략일 뿐이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5:1)고 말했다. 자유는 미리 주어진 어떤 형이상학적, 혹은 선험적인 현실이나 전제가 아니다. 그것은 이런저런 현실적인 얽매임에 대한 부정을 통해 발생한다. 예수는 질곡으로 변해버린 기존의 제도나 종교의 울타리를 뛰어넘었고, 사람들을 최종적으로 억압하는 죽음 앞에서조차 흔들리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는 윤동주의 말대로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십자가> 중에서)인 것이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에게 노예적인 굴종을 요구하는 도덕이나 이데올로기, 화석화된 교회 제도나 교리조차 '다른 신'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나는 제1계명을 이렇게 읽는다. "고통과 억압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또 해방의 길로 이끄는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다. 그 외에 다른 신을 섬겨서는 안 된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 에덴의 동쪽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누구나 불안을 운명처럼 느끼고 있다. 시간은 실존이 본질을 회복해야 할 '기회'이지만, 그것의 유한성 때문에 그만큼 절박함으로 다가온다. 사람들은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을 잡아채 공간화하고 싶은 욕망을 느낀다. 이것이 개인의 삶에서는 '타성'으로 나타나고, 집단생활 속에서는 '관행'으로 범주화된다. 또 이것이 물화된 형태로 나타난 것이 곧 '우상'이다. 하나님은 세상의 어떤 것의 형상으로도 당신의 '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신다. '상'을 만드는 순간 그것은 이미지가 아니라 실체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어떤 규정성 속에 갇힌 하나님은 이미 하나님이 아니다.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이라지 않던가? 하지만 사람들은 스스로의 불안을 잠재울 길이 없기에 금송아지를 만들어놓고 그 앞에 엎드려 경배하기를 원한다. 스스로 자기 업적의 노예가 되고 있는 이들을 본다. 대형교회를 이루기 위해 몸부림치고, 자기 이름을 딴 기념 교회를 만들고, 웅장한 교회당을 지음으로 자기 존재를 확인하려는 이들, 어쩌면 그들은 하나님이 아닌 자기 불안의 외화물을 섬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청준이 말하는 '동상 만들기'의 욕망은 우상을 만드는 존재인 인간의 타락한 실존을 가리키는 적절한 은유이다. 세상을 떠나면서 "내 이름으로 문학비도 세우지 말고, 내 이름을 딴 문학상도 제정하지 말라"고 했던 소설가 이문구의 깨끗한 마무리가 참 부럽다. 제2계명을 나는 이렇게 읽는다. "하나님을 어떤 규정성 속에 매어두려 하지 말아라. 우리 삶의 무제약적인 지평이며 자유이신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살라."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이름은 곧 존재이다. 이름을 묻는 모세에게 하나님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출3:14)라고 대답했다. 이것은 대답이 아니라 오히려 '거절'이다. 성서의 하나님은 '스스로를 드러내면서 감추는 분'(사45:15)이다. 인간의 어떤 말로도 포착될 수 없는 분이기에 히브리의 시인들은 다양한 '은유'를 동원해 자기들의 하나님을 고백했다. "여호와는 나의∼"에서 '∼'은 각자의 실존적 체험에 따라 달라진다. 목자, 피난처, 빛, 산성, 요새, 용사, 능력, 피할 바위, 구원의 바윗, 분깃, 바위, 힘…. 하나님은 '서술어'로만 표현될 수 있다. 문제는 하나님의 이름이 깊은 울림 없이 호명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관습적으로, 공허하게 발설하는 것이야말로 그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이다. 살아가면서 제일 기분 나쁜 게 '내 이름'이 나쁜 의도로 사용되는 것이다. 누군가가 나의 본질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일을 하면서 편의상 '내 이름'을 들먹인다면 용서할 수 있겠는가? 자신의 욕망을 정당화하기 위해 끌어다대는 하나님의 이름, 혹은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담론을 독점하려는 종교 권력, 사람들 속에 두려움을 심어 지배를 영속화하려는 종교 상인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라크에서 침략전쟁을 벌인 미국이 '하나님의 정의'를 들먹인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겠다. 예수님은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당신의 이름'으로 기도하라고 했다. 이 말은 우리의 기도가 당신의 이름으로 바쳐지기에 합당한 것이 되도록 하라는 말이 아닐까? 그래서 나는 제3계명을 이렇게 읽는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되 허황한 말을 버리고 퍼내고 남은 진실의 언어로 부르라. 존재 전체를 투입해 두렵고 떨림으로, 그리고 그리움으로 부르라."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회색일당에서 시간을 팔아먹은 현대인들은 '바쁘다'는 말을 달고 산다. '바쁘다'는 말은 어느새 '나는 상당히 중요한 인물'이라는 자기 과시의 언어가 된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분주하면 가장 본질적인 것을 잊게 마련이다. '분주할 忙' '잊을 忘'의 구성요소가 같다는 사실이 흥미롭지 않은가? 뭔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사람의 발걸음은 느려지게 마련이다. 안식일은 급하게 서두르는 우리 앞에 밝혀진 하나님의 빨간 신호등이다. 사람의 사람됨은 돌아봄에서 비롯된다. '反者, 道之動', 곧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이 도의 움직임이라지 않던가. 안식일은 어떤 특정한 날이 아니라 근원으로의 돌이킴을 일컫는 말일 것이다.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말은 '쉬라'는 하나님의 명령이다. 그런데 이런 계명을 잘 지키지 못하는 것이 목회자들이다. '쉼'을 '게으름'으로 인식하는 삶의 패러다임에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명을 가진 것'이 휴식을 누리지 못한다면 시간의 흐름 속에서 방향을 잃고 헤매게 마련이다. 쉼은 명령이다. 칼하인츠 A. 가이슬러는 "휴식은 사색, 예견, 망각과 이해를 위한 시간"이라 했다. 카프카는 평안과 고요함을 허락하지 않는 성급함을 인류의 중죄로 여겼다 한다. 쉼은 명령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의 쉴 권리를 인정하고, 확보해 줄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일꾼들과 나그네, 그리고 육축의 쉴 권리까지 명시한 안식일 법은 가히 혁명적인 선언이다. 이제는 그분 앞에 멈추어 섬이 필요하다. 땅의 안식을 명한 '안식년' 규정에 이르면 우리는 하나님이 생명의 하나님임을 더욱 명확히 인식하게 된다. "신들을 찾아 나선 여행길이 고되어서 지쳤으면서도, 너는 '헛수고'라고 말하지 않는구나. 오히려 너는 우상들이 너에게 새 힘을 주어서 지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구나"(사57:10). 이 말씀이 참 아프게 다가온다. 나는 제4계명을 이렇게 읽는다. "서두르지 말고 자주 멈추어 서라. 근본으로 돌이켜라. 생명의 감수성을 회복하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크루제만은 부모 공경의 계명이 가정을 떠나서는 그 어떤 대책도 마련할 수 없었던 노인들과 병자들, 그리고 약자들의 살 권리를 보장하려는 하나님의 배려라고 말했다. 하나님은 세대의 고리를 통해 이스라엘이 누리는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종교적 자유가 가장 힘없는 사회 구성원들에게까지 미치도록 규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칼빈은 다른 측면에서 이 계명에 접근한다. 그는 부모공경의 계명이 프로메테우스적 기질을 타고난 인간이 자연스럽게 권위에 대한 복종과 겸손을 배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권위'의 정점에는 하나님이 있다. 그러니까 부모공경의 실천은 일차적으로는 자기 부정을 통한 자기극복의 훈련이요, 다음으로는 하나님에게로 돌아가는 훈련인 셈이다. 어느 쪽이든 부모는 우리에게 때로는 벗어나고픈 질곡이거나 언제라도 귀의하고픈 고향이다. 시인 신경림은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이라는 시에서 어린 시절에 보았던 할머니와 어머니의 궁기든 삶을 회상하면서, 나이 들어 넓은 세상에 나와 많은 것을 보고 들었지만 결국은 자기의 세계가 그분들의 세계와 다르지 않더라고, 아니 자신에게는 그것만이 세상의 전부더라고 고백한다.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을 들었다./하지만 멀리 다닐수록, 많이 보고 들을수록/이상하게도 내 시야는 차츰 좁아져/내 망막에는 마침내/재봉틀을 돌리는 젊은 어머니와/실을 감는 주름진 할머니의/실루엣만 남았다." 퇴영적인 감상으로 들릴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게 본질 아닌가? 부모를 떠난 나는 누구인가?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나의 살아있음을 스스로 경축하는 일이며, 생명이 신비이고 선물임을 수긍하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제5계명을 이렇게 읽는다. "세상의 모든 약자들을 네 부모인 듯 대하고 살아라. 그리고 네 부모가 하나님의 사랑의 통로가 되어 너를 있게 했듯이, 부모 공경이야말로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하는 진실한 길이다." 살인하지 말지니라. 가인의 후예들의 모듬살이는 파괴와 폭력과 죽임의 기운으로 가득 차 있다. 가인의 뻔뻔한 항변은 지금도 도처에서 들려온다. "내가 내 동생을 지키는 자입니까?" 이라크의 무고한 사람들이, 그리고 팔레스타인의 난민들이 무자비한 폭력에 신음하고 죽어간다. 기아와 질병으로 죽어가는 어린이들과 가난한 이들을 보면, 인간의 존엄성이 어디에 있는가 탄식하지 않을 수 없다. 쫓겨날 처지에 있는 이주 노동자들이 죽음으로 자기의 절망감을 표현하고, 학벌사회의 관문 앞에서 절망한 청소년들과, 열리지 않는 취업의 문 앞에서 생의 마침표를 찍어버리고 마는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내몬 것은 누구인가? 우리 모두? 이런 고백은 자칫 폭력을 추상화할 우려가 있다. 우리 모두의 책임이라는 말은 결국 아무의 책임도 아니라는 말과 같다. 살인자는 바로 '나'다. 내 삶의 방식이, 내 사유 방식이, 포기할 수 없는 나의 입장이 다른 이를 죽이고 있다. "사람을 실제로 죽인 사람만이 살인자인가./아닐 것이다./예컨대 말 한마디, 눈초리 하나도 살인적일 수 있을 것이다./어떤 거짓말은 살인적이고/어떤 진실도 살인적이다./어떤 냉담도 그렇고/어떤 열정 또한 그러하다."(정현종, <살인자> 부분) 시인의 감성 과잉인가?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둔감한 영혼은 폭력의 실상을 보지 못한다. 함께 살라고 지음받은 인간은 서로에게 기댄 채 살아간다. '너' 없는 '나'는 없다. '존재'가 존립하기 위해서는 '관계' 속에 있어야 한다. 그 관계에 미움이 깃들어 틈을 만들었다. 이것이 타락이다. 타락한 인간은 이웃과 세상에 대해서 적대적이다. 거기에서 비롯되는 것이 전쟁, 분쟁, 환경파괴이다. 우리는 총과 칼로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지만, 우리의 말과 표정과 눈빛으로 이웃들을 살해하며 산다. 예수가 우리에게 내리는 처방은 사랑이다. 죄는 나누고, 사랑은 하나 되게 한다. 사랑은 '온전하게 매는 띠'라고 않던가? 그래서 나는 제6계명을 이렇게 읽는다. "생명의 본디 모습은 서로 북돋워주고, 어루만지고 격려하는 것이다. 온 힘을 다하여 생명을 보살펴라. 네 이웃을 살리는 것이 곧 네가 사는 길이다." 간음하지 말지니라. "자줏빛 바위 가에/잡고 있는 암소 놓게 하시고,/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시면/꽃을 꺾어 바치오리다." 아름다움 앞에서 물결치는 한 노인의 마음조차 용납될 수 없는 세상은 삭막한 곳이다. 아름다움을 찬탄하는 것은 인간을 고귀하게 하는 것이지 추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욕망 자체는 추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니다. 문제는 그 욕망이 과도하게 되거나 왜곡되는 것이다. 욕망의 처소인 감정은 무절제하기 때문에 자신만을 섬기는 경향이 있다. 이것을 잘 다룰 수 있다면 성인이다. 우리에게 욕망을 불러일으킨 대상을 진심으로 존중하고 이해할 때 우리 욕망은 창조의 힘이 된다. 하지만 병든 욕망은 대상을 물화시킨다. 즉 나와 마주 서있는 사람은 존엄한 인격이 아니라 나의 욕망 충족을 위한 수단인 것이다. 이것은 양편 모두를 비인간화한다. 자기의 눈을 바라보는 모든 대상을 돌로 바꾸어버렸다는 메두사는 신화 속의 인물이 아니라, 바로 왜곡된 욕망에 사로잡힌 모두의 모습이다. 텔레비전, 영화, 인터넷, 잡지, 광고, 간판, 음악…거의 모든 매체마다 성적 담론이 홍수를 이룬다. 불륜과 외설과 음란이 일상의 풍경이 되고 있다. 이 시대에 사는 사람들은 어느 정도 '육체교 신자'가 되어 살아간다. 육체교의 특색은 주체의 몰각과 과도한 집착이다. 육체의 활화산 위에 집을 지으면 우리 속에 있는 '신성한 불꽃'은 꺼질 수밖에 없다. 미혹의 문을 닫고 색정의 문을 닫아야 하늘이 보인다. 진리가 보인다. 나는 제7계명을 이렇게 읽는다. "네 앞에 마주 선 사람을 존귀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대하라. 그는 어떤 경우에도 네 욕망 충족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도적질하지 말지니라. 이 계명은 다양한 목적어를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이 계명이 본래 가리키는 것은 자유인을 납치해 노예로 팔아먹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다. 애굽의 전제정치 하에서 노예적 노동에 시달렸던 이스라엘로서는 이 계명처럼 피부에 와 닿는 것이 없을 것이다. 사람 도둑질하면 우선 인신매매와 유괴가 떠오른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 그보다 더 은밀하고도 지속적으로 자행되는 도둑질은 시장경제라는 의상을 입고 나타난다. 스스로를 인격이 아니라 상품으로 시장에 내놓음으로써 진정한 자아를 상실하도록 하는 사회체제도 사람 도둑질에 가담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에리히 프롬은 인간의 생존양식이 존재양식에서 소유양식으로 변해가는 것을 언어의 변천 과정을 통해 고찰한 바 있다. 즉 고대어에서는 소유를 나타내는 '갖는다'라는 동사가 없었다 한다. 히브리인들은 '나는 그것을 갖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존재를 나타내는 간접표현, 즉 '그것은 내게 있다'를 사용했다 한다. 그런데 산업사회 이후 존재의 언어는 소유의 언어로 전환되었다. 존재 망각의 역사는 언어의 타락에서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람 도둑질은 가정에서도 일어난다. 자식들에게 자기들의 욕망을 투사함으로써 자라나는 아이들의 '현재'를 박탈한 채 학원으로 내모는 것도 일종의 도둑질이다. 욕망과 두려움에 축복이라는 당의를 입혀 사람들에게 제공하고, 신자들로 하여금 스스로 생각하는 주체로 서지 못하도록 하는 종교인들도 사람 도둑질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복음의 길은 정신적 예속의 길이 아니라, 참 자유의 길이 아니던가?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를 존재 상실의 길로 내모는 것은 가속화된 시간이며 업적주의이다. 분주함 속에서는 진실한 사랑이 불가능하지 않던가. 나는 제8계명을 이렇게 읽는다. "누구를 대하든 그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대하라. 네 앞에 마주 서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메시지를 가지고 우리 앞에 있는 것이다. 지배하려 하지 말고, 사랑으로 얼싸안으라."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 인간이 최초로 발설한 문장이 사랑고백이라는 사실은 언어의 본질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맺어주는 것임을 보여준다. 소통으로서의 언어는 모든 개인이 그리고 공동체가 서있는 신뢰의 토대이다. 하지만 타락 이후의 언어는 자기 배반의 언어로 변질되었다. 책임회피와 책임전가의 언어가 타인에 대한 위협의 언어로, 그리고 다른 '말'을 허용하지 않는 독점적인 언어로 역진화해갔다. 우리의 현대사만 보더라도 불의한 권력이 선한 말을 선점하여 타락시킴으로써, 말이 가교가 되지 못하고 벽이 되도록 하지 않았던가?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계명은 법정에서의 충실한 증언을 요구하고 있다. 이웃간에 생긴 분쟁의 경우 실체적 진실을 찾는데 가장 중요한 수단은 역시 증언이었다. 하지만 증인들이 편견이나 개인적인 감정 혹은 뇌물에 의해 거짓증언을 할 경우 진실은 드러나지 않게 마련이다. 그런데 거짓증거의 가장 직접적인 피해자는 사회적 약자인 경우가 많다. 헤시오도스는 <노동과 나날>에서 정의의 여신 디케의 일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재판관들이 뇌물을 받고 부당한 판결로 법을 날조하고 정의의 여신 디케를 왜곡하면 큰일이 벌어진다. 그러면 디케는 비통해하며 안개에 둘러싸인 채 도시와 사람들이 사는 곳이면 어디든지 일일이 찾아다니며, 자신을 배척하고 부당하게 왜곡하는 사람들을 색출하여 재앙을 내린다." 랑그와 빠홀의 분열이라든지,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분열을 말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말이 제값을 잃고 떠돌고 있음을 느끼고 있다. 집을 떠난 말들이 깃들 곳을 찾아 유령처럼 배회하는 세상은 신뢰의 토대가 무너진 사회이다. 말의 순수성을 찾아가는 것, 어쩌면 그것이 우리 사회를 바로 세우는 첩경인지도 모른다. 거짓증언, 아첨과 거짓말, 말의 독점을 포기하는 순간 우리 삶은 맑아진다. 나는 제9계명을 이렇게 읽는다. "남을 해치기 위해 거짓말을 하지 말아라. 진실의 키와 성의의 체로 거짓과 편견과 이기와 탐욕을 거르면서 살라."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탐심은 우상숭배(골3:5)라는 말은 인간의 심연을 꿰뚫는 말이다. 재산을 다 팔고, 딸들까지 팔고도 허기증을 달랠 길 없어 자기 팔을 잘라먹었다는 신화의 인물 에릭직톤은 바로 현대인들의 초상이 아닌가? 건조기 초원의 물웅덩이를 온통 차지한 채 저 혼자 물을 마시고, 그 안에 들어앉아 진흙 목욕까지 즐기는 코끼리처럼 우리 욕망은 언제나 타자를 배제한다. 하지만 욕망은 항상 매개된 욕망이라 한다. 우리가 뭔가를 욕망하는 것은 필요에 의한 것이라기 보다는 욕망을 매개하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르네 지라르)이다. 문제는 봄이다. 눈을 들어 선악과를 보았던 인류의 첫 사람들처럼 욕망은 봄에서 촉발된다. 보지 말아야 할 것, 듣지 말아야 할 것에 마음을 빼앗기는 순간 영혼은 침묵한다. 그리고 남을 위한 여백이 사라진다.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에겐 이웃이 없다. 경쟁하는 타인이 있을 뿐이다. 세상에 평화가 없는 것은 테러리스트들 때문이 아니고 그들을 테러리스트가 되도록 만든 이들 때문이다. 자기 몫 이상의 몫을 누리고 살고자 하는 욕망이 평화의 적이다. '뱀'은 오늘 소비의 마술 동산에서 '광고'의 의상을 입고 출몰하고 있다. 교활한 광고는 상품에 '교양인'이라는 부가가치까지 덧칠하여 사람을 현혹한다. 이 유혹에 넘어가는 순간 사람은 '소비자'로 전락하고 만다. 그들은 '소유하라'는 오직 한 음성에만 반응하며 산다. 하지만 소유가 늘어나는 순간 존재는 줄어든다. 가난을 미화할 생각은 없지만 부를 예찬할 생각도 없다. 마음이 청결해야 하나님을 본다 하는 데, 마음의 청결은 생활의 청빈과 분리할 수 없다. 목사도 부유해지면 생각이 달라진다. 사람은 생각하는 대로 살지 못한다. 사는 대로 생각한다. 두렵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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