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2003년 당회 목회서신 2003년 12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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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한 해가 또 이렇게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긴 그림자를 남기며 서산으로 넘어가는 2003년의 태양을 바라보는 심정이 복잡합니다. 세월은 일정한 보폭으로 가고 있지만, 우리들은 뭔가에 쫓기듯 숨을 헐떡이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힘겹지 않은 순간이 없었지만 우리는 산 자의 땅에서 뒤를 돌아보고, 또 앞을 내다보며 이렇게 서 있습니다. 하지만 한 해의 끝자락에 선 우리 마음은 그리 흔흔(欣欣)하지 않습니다. 삶의 열매가 부실하기 때문입니다. 수능 성적표를 받아들고 누가 볼세라 겁먹은 표정으로 들여다보는 수험생들의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조금 더 열심히 멋지게 살고 싶었고, 좀 더 나누고 섬기며 살기를 원했고, 좀 더 정신의 여백이 많은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자아'의 주변을 맴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모든 순간이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지나갔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강인식 장로님이 뇌출혈로 쓰러지고, 노용래 집사님이 교통사고를 당하고, 교인들이 크고 작은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우리는 위기 속에 계신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요즘 들어 자꾸만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요8:16, 29)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이 말씀이 제 마음에 떠오를 때마다 하얀 백지 위에 또박또박 써 내려간 아버지의 편지를 받아들고 느꼈던 가슴 뭉클함이 되살아나곤 합니다. 지나온 모든 세월들 돌아보아도 그 어느 것 하나 주의 손길 안 미친 것 전혀 없네 Ⅱ. 올해는 참 많은 분들이 우리 곁을 떠나가셨습니다. 직접·간접으로 우리가 동참했던 장례식만 해도 14차례나 되었습니다. 죽음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라도 다가올 수 있는 가능태임을 우리는 두렵게 경험했습니다. 만남의 시간이 길든 짧든 모든 헤어짐은 남겨진 이들의 가슴에 슬픔의 자취를 남기게 마련입니다. 아직도 제 손을 잡으면서 눈물을 글썽이시는 분들을 대할 때마다 저는 말을 잊고 맙니다. 좋으신 하나님의 은총과 위로가 슬픔을 당한 모든 가족들과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그런데 교우들의 슬픔을 공유하는 체험을 통해 우리는 이전보다 더 큰사랑으로 맺어지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슬픔이 준 선물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누군가의 슬픔에 공감해 흘리는 눈물 한 방울이야말로 우리의 사람됨을 드러내는 징표라지요? 영화 <<터미네이터>>에서 인간과 모든 면에서 유사한 사이보그인 터미네이터가 마지막까지 이해할 수 없던 것이 바로 '눈물'이었습니다. 저는 우리들이 그런 슬픔에의 동참을 통해 타자의 고통에 예민하게 반응할 줄 아는 부드러운 영혼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새로 태어난 아기들도 여럿입니다. 아기들의 태어남은 한 가정의 경사이기도 하지만, 신앙 공동체의 경사이기도 합니다. 이 귀한 아기들을 믿음 안에서 잘 보살피고, 그들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어내기 위해 우리는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사랑 속에서 자란 아이라야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된다지요? Ⅲ. <아름다운 원로모임>을 진행하면서 가슴이 짠해짐을 느꼈습니다. 함께 여행을 하고, 이런 저런 작업을 하면서 엿본 원로들의 삶의 내력은, 오늘 우리가 이처럼 살게 된 것은 바로 이분들 덕분임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너는 센 머리 앞에 일어나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레19:32)는 말씀이 왜 사람다운 세상의 초석인지를 조금이나마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많은 교우들이 <일인 일 구좌 갖기 운동>에 동참하고 계십니다. 더 아름다운 세상,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의 꿈을 실현하기 애쓰는 시민운동단체와 봉사단체의 후원자가 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이들의 마땅한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교우들의 절반 정도가 동참하고 있지만 저는 새해에는 모든 이들이 동참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후원회원이 되는 데서 그치지 말고, 몸으로 봉사하려는 마음의 열정도 깊어지기를 바랍니다. 예쁜 교회 간판이 세워지고, 작은 화단에 철 따라 피어나는 꽃들을 즐기면서 우리는 조금씩 밝아지는 우리 공동체의 현재와 미래를 보았습니다. 너무 낙관적인 전망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 교회의 밝은 미래를 그려보는 이들이 많아질수록 우리 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잘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Ⅳ. 새해 우리 교회의 목표는 "평화의 씨앗을 심는 우리"(마5:9)로 정했습니다. 평화는 불화의 땅에 사는 우리 모두의 꿈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꿈입니다. 올해 초 이라크에서 벌어진 전쟁의 광풍은 평화를 염원하는 지구촌 사람들의 의식을 갈래갈래 찢어놓았습니다. 우리 사회 각 계층에서 다양하게 분출되고 있는 갈등들은 우리의 미래 위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습니다. 진보와 보수, 노동자와 사용자, 세대간의 갈등의 골은 점점 깊어가 접점을 찾기가 어려운 것처럼 보입니다. 평화의 길은 어디에 있을까요? 욕망이 관계의 매개항이 되는 곳에는 평화가 없습니다. 서로에 대한 존중과 이해 그리고 배려가 있을 때 우리는 평화의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평화는 기성품이 아닙니다. 그것은 항상 씨앗의 형태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겨자씨 한 알이 자라는 모습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가르쳐주신 예수님의 가르침이 우리에게 참 소중합니다. 전면적인 평화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서있는 삶의 자리에서 작은 평화를 만들어내는 사람은 결코 절망하는 법이 없습니다. 자식의 시린 손을 품에 넣어 녹여주시는 어머니의 마음처럼, 우리가 서로의 아픔을 덜어주려고 애쓰다보면 어느 결에 우리 삶은 평화의 기운으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요단강을 건넌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가 강에서 취한 돌을 세워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행위를 기념했듯이, 우리도 여기까지 우리를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함께 하신 하나님께서 평화를 향한 여정을 시작하는 우리와 동행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믿음으로 승리할 것입니다. 좋으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2003년 12월 14일 담임목사 김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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