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희망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2003년 09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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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어느 때든 힘겹지 않은 때가 없었지만 지금은 정말 난감한 시대이다. 어둡고 음산한 기운이 모든 이들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다. 창조 이전의 혼돈을 만든 것이 정치인들이었다는 항간의 농담처럼 어쩌면 그것은 정치의 난맥상이 빚어낸 무거움인지도 모른다. 당리당략이란 말도 정치인들의 이합집산을 설명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경제는 나날이 어려워져 간다. 이미 마이너스 금리 시대가 시작되었다. 청년들은 열리지 않는 세상의 문 앞에서 절망하고, 장년들은 더 나은 미래를 기획할 수 없는 불안정함 속에서 우울하다. 사람은 밥만 먹고사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먹고산다는 데, 그 의미는 다가설수록 멀어지는 카프카의 '성'과 같다.

이라크 파병 문제를 둘러싼 논쟁이 소모적으로 전재되고 있다. 살육의 전쟁터에 우리 젊은이들을 보낼 수 없다는 이들과, 국익을 위해 파병해야 한다는 이들의 생각이 충돌하고 있다. 그런데 정부와 언론은 파병을 어느 정도 기정사실화하고 있는 듯하다. 우리는 '국익'이라는 말에 담긴 자괴감을 떨치기 어렵다. 압도적인 미국의 힘 앞에서 '아니오'라고 말할 수 없는 우리의 처지가 참담하게 떠오르기 때문이다. 어쩌면 굴욕적인 현실을 국익으로 포장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사실 그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의식의 식민주의이다. 민족적 주체성 없이 타자에 의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려는 것 말이다.

정보화 강국을 자처하지만, 그래서 어느 정도 지식산업의 기반이 닦여진 것도 사실이지만, 정보의 그물망 속에서 소통되는 정보의 질은 어떠한가? 분초 단위로 분절된 시간 속에서 태어난 언어들이 유령처럼 인터넷 공간을 떠돌고 있고, 음란한 영상들은 무시로 출몰한다. 그 언어들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기는커녕 가학의 도구가 되어 서로를 공격하고, 음란한 영상물들은 인간의 수성을 자극하기에 여념이 없다. 익명성 뒤에 숨어 배설되는 언어들은 창조적 현실을 낳을 힘이 없다. 사람들의 의식은 점점 파편화되고, 숨결은 거칠어진다.

종교인들조차 꿩 잡는 게 매라는 결과주의에 매달린 채 현실을 외면하는 것 같다. 양적 성장을 지상의 과제로 삼으면서 기성체제와 주류문화의 이면을 꿰뚫는 예언자적 시선은 흐려지고 말았다. 양심의 숫돌이어야 할 종교가 비판적 지성을 잠재우면서, 어느새 근대적 가치의 추종자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교를 '당신들의 천국'으로 바라보다가, 계기가 생길 때마다 말의 돌팔매를 마다하지 않는다. 물론 깨어있는 이들이 없지 않지만 그들의 음성은 거친 고함소리에 묻혀 잘 들려오지 않는다.

이제는 정말 정신을 차려야 한다. 인간다운 생존이 위협받고 있는 이 시대에 주류사회의 가치관을 전복하는 새로운 삶이 시작되어야 한다. '나눔', '섬김', '돌봄', '서로 함께'라는 해묵은 가치들이 새롭게 조명되고 실천되어야 한다. 작은 시작을 두려워 말아야 할 일이다. 천국을 겨자씨 한 알속에서 보아낸 분의 눈길로 세상을 보면 희망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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