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서럽고 고단한 삶이라 해도 2003년 08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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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럽고 고단한 삶이라 해도

제 건강을 염려하는 형의 전화를 받을 때마다 한편으로는 미안해지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고마운 생각이 들곤 해요. "네 몸은 네 것이 아니라, 우주의 것 아니냐!"고 꾸짖으신 말씀 늘 기억하며 살께요. 하지만 기쁘고 즐거운 일보다는 슬프고 아픈 일에 더 많이 반응하며 사는 삶인지라 제 몸을 챙긴다는 게 그리 쉽지는 않아요. 이게 아니지, 하면서도 고통 쪽으로 몸을 기울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저의 버릇인 모양이에요. 올 여름은 제게 참 고단한 시간이었어요. 함께 정을 나누었던 교우들 몇 분이 세상을 떠나셨어요. 속절없이 세상을 떠나는 교우들을 배웅하는 것도 힘겨웠지만, 그보다는 사랑하는 이들을 떠나보내면서 속으로 눈물을 삼키는 가족들의 억제된 슬픔이 더욱 아리게 느껴졌어요. 그런 슬픔에 전염된 것일까요?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듣다가도, 슈만의 피아노 트리오를 듣다가도, 맥없이 내리는 빗방울들을 헤아리다가도, 방안에 있는 액자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도 시간 속을 여행하는 모든 살아있는 것들에 대한 연민의 마음이 불쑥 솟구치곤 해서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할 때도 있었어요. 모든 것이 소멸의 운명 속에 있다는 생각 때문인지 모두가 다 딱해 보여요. 지나친 감상인가요?

세상에 시간을 벗어난 존재가 어디 있겠어요. 그러나 그 중에서도 시간을 의식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은 어쩌면 슬픔의 운명을 타고 난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인간은 죽음에 이르는 존재"라 한 것이 하이데거이지요? 저는 이 구절을 보면서 철학자라는 사람들이 참 시시한 소리를 하는구나 생각했던 때도 있었어요. 사람은 언젠가는 죽게 마련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실이 어디 있겠어요. 하지만 하이데거의 이 말은 인간이란 죽음이라는 한계상황을 의식하면서 '삶의 의미'를 찾는 존재라는 뜻일 겁니다. 저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존재의 신비를 강하게 의식했던 것 같아요. 비오는 여름날 오후가 되면 습관처럼 뒤란으로 나 있는 쪽문을 열고 초가지붕을 타고 내리는 낙숫물을 바라보며 존재론적인 질문을 던지곤 했어요. '나는 왜 중섭이가 아니고 나인가?' '내가 중섭이네 집에 태어났다면 중섭이처럼 말하고 생각할까?' '내가 만일 없다면 엄마는 지금과 같은 똑같은 분일까?' 대여섯 살 무렵의 기억인 듯 싶은데, 지금 생각해도 참 신비해요. 중섭이는 제일 친했던 옆집 친구였는데, 나는 그 친구를 배경으로 해서 나의 있음을 깨달았던 셈이지요. 내가 이 세상에 없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라웠던지요. 나중에 성경을 보면서 나의 경험이 보편적인 경험임을 알았어요.


내가 있다는 놀라움, 하신 일의 놀라움, 이 모든 신비들, 그저 당신께 감사합니다. 당신은 이 몸을 속속들이 다 아십니다.(시139:14)


별들의 바탕이 어둠인 것과 마찬가지로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없음의 바탕에서 바라볼 때 제대로 보이게 마련이지요. 소멸이 있기에 불멸에 대한 꿈도 있는 것이겠지요. 따라서 삶을 제대로 조망할 수 있는 자리는 죽음인지도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우리는 실용적인 것에 대해서는 쉴새없이 말하지만, 정작 중요한 죽음의 문제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곤 하지요. 어쩌면 이것이 우리 문화의 천박성의 뿌리인지도 모르겠어요. 형은 '천국에는 아라비아 숫자가 없다'고 했지요? 저는 그것을 모든 가치를 수치로 계량화하고, 가치에 순위를 매기는 서열화의 반생명성을 지적한 말씀으로 받아들였어요. 계량화, 서열화 사회에서 죽음의 자리는 없겠지요?

자연스런 죽음조차 기휘하는 세상인데,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들은 점점 늘고 있어요. 어느 교장 선생의 자살, 성적을 비관한 어느 학생의 자살과 그 뒤를 따른 아버지의 자살, 생활고를 못 이겨 어린 자녀 셋과 동반자살을 택한 어느 여인의 죽음, 참 기가 막힐 노릇이에요. 특히 그 여인이 죽기 며칠 전에 교회에 다니는 이웃집 할머니에게 "교회에 가면 마음이 편해요?" 하고 물었다는 보도를 보면서 더욱 마음이 아팠어요. 현대아산 정몽헌 회장의 자살은 그야말로 충격이었지요. 저는 이 사회가 자살을 부추기고 있다는 생각에 현기증을 느꼈어요. 사회학자들은 우리 사회의 자살을 아노미적 자살로 설명하더군요. 자기의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수단은 막혀 있고, 사회는 모순으로 가득 차 도무지 정의를 기대할 수 없다는 회의감에 사로잡힐 때 사람들은 자살을 선택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스스로에게 죽음을 부과함으로써 부정적인 방법으로나마 사회에 대해 보복을 하는 것이지요. 그래요, 포르노그라피적 세상, 곧 욕망을 확대재생산 하지만 그 욕망의 충족이 기쁨을 주기보다는 새로운 공허감을 자아내는 이 세상이 죽음을 부추기고 있어요.

해결? 그런 게 있을까요? 자살은 죄라고, 죽을 힘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의 상식적이고 지당하신 말씀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 말은 자살의 자리에 몰린 사람들에게 아무런 힘이 될 수 없을 거예요. 자살을 택하는 사람들은 어쩌면 자기들의 땅에서 유배당한 사람들이 아닌가 싶어요. 설 땅을 잃은 거지요. "교회에 가면 마음이 편해요?"라는 질문은 설 땅을 잃은 자의 눌함(訥喊)이 아닐까요? 우리가 믿는 자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누군가의 '설 땅'이 되어주는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젊은 날, 정의 없는 세상에 대한 회의에 빠져 사람들과의 소통의 통로를 끊으려 했던 내게 형이 넉넉하고 아늑한 '설 땅'이 되어 주었던 것처럼 말이에요. 하지만 '설 땅'을 밖에서 찾는 한 우리는 언제나 지치고 낙심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외부에 있는 '설 땅'은 유빙(流氷)처럼 떠다니게 마련이니까요. 스스로 자기 속에 옹골진 '설 땅'을 마련해야 해요. 그것을 주체성이라 해도 좋겠고, 삶의 의미라 해도 상관이 없을 거예요.

프랑스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집 없는 이들의 아버지인 피에르 신부래요. 두 번째가 축구선수인 지네딘 지단이구요. 저는 피에르 신부의 책을 읽다가 눈이 번쩍 떠지는 경험을 했어요. 그가 엠마우스 운동(집 없는 사람들과 소외자들을 돕기 위한 빈민구호 공동체)을 시작하게 된 것은 자살을 기도했던 한 사내와의 만남이 계기가 되었대요. 그 사내는 인생의 막장에 몰려 죽음만을 생각하고 있던 차에 피에르 신부와 만났어요. 그는 자기가 살아온 이야기를 신부에게 다 털어놓았지요. 피에르 신부는 사내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후에, 그의 절망에 깊이 공감했어요. 그러면서도 자기로서는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실토를 했어요. 그러고는 자기가 수도사가 되려고 유산을 포기한 이야기며, 비참한 상황 속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집을 짓느라고 자기의 모든 것을 투입한 이야기를 들려준 후에 정말 엉뚱하게도 그에게 이렇게 말했대요.


"당신을 위해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없군요. 한데 당신은 죽기를 원하니 거치적거릴 게 아무 것도 없지 않습니까. 집이 다 지어지기만을 기다리는 어머니들을 생각해서라도 이 집짓기가 빨리 끝날 수 있도록 죽기 전에 나를 좀 도와주지 않겠소?"(피에르, 『단순한 기쁨』, 34쪽)


조르주라는 그 사내는 그러겠다고 답하고는 곧 피에르의 집짓기 현장에서 일을 시작했어요. 나중에 그는 이렇게 말했대요. "신부님께서 제게 돈이든 집이든 일이든 그저 베푸셨더라면 아마도 저는 다시 자살을 시도했을 겁니다. 제게 필요한 것은 살아갈 방편이 아니라 살아야 할 이유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후에도 가난한 사람들과 절망한 사람들을 도우며 살았대요. 절망자가 구원자가 된 것이지요. '살아갈 이유'야말로 우리의 '설 땅'이 아닐까요? 왜 사는지를 아는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다지요? 수가성 우물가에서 한 여인의 가슴속에 희망의 샘물이 솟구치게 하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기억나네요.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4:34) 내가 이 세상에 보냄을 받았다는 사실에 대한 확고한 인식이야말로 우리 삶이 절망의 심연으로 밀려가지 않도록 해주는 닻이 아닐까 싶어요. 우리는 어떤 소명을 가지고 이 세상에 왔을까요? 물론 이 대답은 스스로 찾아야 해요. 모두에게 적용되는 보편적인 해답은 어쩌면 없는지도 몰라요. 그래서 우리 실존은 늘 흔들리면서 중심을 잡아가는 것이겠지요. 인생의 의미 혹은 소명에 대한 명증한 답이 없다면 남는 것은 허무인가요? 어쩌면 인생은 그런 질문 속에서 존립하는 것이 아닐까요?

형도 좋아하는 랍비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은 인간은 누구나 '원본'으로 태어났다고 했어요. 문제는 우리가 '복사본'의 삶을 택한다는 것이지요. 남과 구별되기를 원하면서도, 같아지지 않으면 불안해지는 우리들의 모순된 모습을 이보다 적절하게 드러낸 말은 없는 것 같아요. '나는 원본이다.' 나 자신에 대해 절망하고, 세상에 대해 절망하다가도 이 우주 가운데 나와 똑같은 존재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내고는 경이감에 사로잡히곤 해요. 반지름만 7,000만 광년이 된다는 이 우주 가운데 내가 있다는 사실이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겠어요. '나는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아니구나. 나는 나 아닌 어느 누구도 줄 수 없는 선물을 가지고 이 세상에 왔구나.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신 것은 뭔가 목적이 있구나. 내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았다는 사실은 결국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할 존재라는 뜻이구나.' 목적에 대해 말하면 코웃음부터 치고 보는 사람들이 있지만, 저는 모든 개별자의 삶에는 분명히 어떤 보편적인 목적이 있다고 믿어요. 설마 형도 웃고 계시지는 않겠지요?

내 삶이 아무리 시시해 보여도 그걸 긍정할 줄 아는 내적 힘이 필요한 것 같아요. 연암 박지원이 남긴 문장 가운데 이런 게 있어요.


"본 바가 적은 자는 백로를 보고서 까마귀를 비웃고, 오리를 보고서 학을 위태롭게 여긴다. 사물은 절로 괴이할 것이 없건만 자기가 공연히 화를 내고, 한 가지만 같지 않아도 온통 만물을 의심한다. 아! 저 까마귀를 보면 깃털이 그보다 더 검은 것은 없다. 그러다가 홀연 유금빛으로 무리지고, 다시 석록빛을 반짝인다. 해가 비치면 자줏빛이 떠오르고, 눈이 어른어른하더니 비췻빛이 된다."(박지원, 「菱洋詩集序」)


본디 정해진 빛깔이 없는데 우리가 먼저 마음으로 빛깔을 정하고는 검다느니 희다느니 하면서 차별의 상을 만들고는 하지요. 게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남들이 덧입혀준 색깔을 나의 본디 모습인 줄 알고 우쭐거리거나 터무니없는 자기 비하에 빠지기도 일쑤이지요. 변덕스럽기 이를 데 없는 사람의 마음에 중요한 것은 나의 '능력'이나 '모습'이 아니라, 내가 누구를 향하고 있나 일 거예요. 까마귀 깃털 같은 우리라 해도, 하나님의 은총의 빛을 만나면 영롱한 생명으로 거듭날 수 있을지 누가 알아요. 헨리 뉴엔 신부가 장애우들의 공동체인 라르슈에 머물 때 남기신 일기를 읽다가 이런 구절을 만났어요.


"네 스스로를 판단하지 말라. 너 자신을 단죄하지 말라. 너 자신을 배척하지 말라. 네 마음의 가장 깊고 가장 은밀한 구석구석까지 내 사랑이 비쳐들어 너의 아름다움을 들추어내게 하라. 내 자비의 빛이 비치면 네가 이제껏 망각하고 있던 네 아름다움이 또 다시 네 눈앞에 떠오르리라. 어서 내게 오너라. 내가 네 눈물을 씻어주고 네 귀에다 입을 바싹대고 속삭여주리라. '나는 너를 사랑하노라, 나는 너를 사랑하노라, 나는 너를 사랑하노라' 하고." (헨리 뉴엔, 『새벽으로 가는 길』)


우리는 어쩌면 우리 자신의 아름다움을 한번도 보지 못했는지도 몰라요. 아무도 우리를 보고 아름답다고 말해주지 않았으니까요. 나는 예수님께서 투박한 갈릴리의 어부 시몬에게서 반석 곧 '베드로'를 보아내셨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뛰어요. 타락한 세상의 눈길들은 서로의 허물 찾기에 익숙하지만, 예수님의 눈길은 각 사람 속에 깊이 감추어진 작은 가능성을 크게 보신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용기가 나요. 나를 향한 주님의 시선도 그러하리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순간, 잿빛으로 보이던 삶은 돌연 화창한 삶으로 바뀌곤 해요.

하나님 앞에 서는 순간 우리는 왜 모세처럼, 아브라함처럼, 어거스틴처럼 살지 못했느냐는 질문을 받지 않는대요. 그런 질문은 사실 잘못된 것이지요. 나는 나일 뿐이니까요. 우리가 염려해야 하는 것은 남처럼 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나로서 살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요? 다양한 꽃들이 피어나 조화를 이루는 정원처럼 자기 몫의 삶을 온새미로 살아낼 때 우리는 비로소 이 땅에 온 뜻을 이룰 수 있겠지요? 때때로 형이 살아가는 모습을 부러워 할 때도 있었어요. 수렁처럼 질척이는 일상 속에 매여 옴짝달싹 못하는 내 처지에서 보면, 매인 데 없이 가뿐한 형의 보행법이 여간 부러운 게 아니거든요. 하지만 그것은 하릴없는 대안동경이겠지요? 시간 속을 여행하는 우리 삶의 기본 조건이 불안이라는데, 비애 없는 삶이 어디 있겠어요. 내 삶의 현실을 사랑해야지요. '지금 여기서'의 삶을 충만하게 살지 못하고, 행복을 자꾸 유보하는 한 우리는 투덜거리다가 생을 마칠지도 모르잖아요. 삶의 틈서리를 더듬는 우리 영혼의 촉수가 예민하다면, 고통이나 아픔 속에서도 기쁨과 감사를 찾아내는 일이 불가능한 일만은 아닐 거예요.

물론 내가 나로서 살아가는 일이 타인과의 관계 단절을 의미하지는 않을 거예요. 바람에 넘어진 벼가 서로에게 기대며 일어서듯이, 사람은 서로의 생을 지탱해주는 버팀목이 되어야겠어요. 그러고 보니 사람 '인' 자가 두 사람이 서로 기대고 서있는 모양이라는 게 참 신기하네요. 형은 내게 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셨어요. 일상의 덫에 치여 비틀거릴 때마다 형의 느릿느릿하고 다정한 음성을 듣고 나면 새 힘이 나곤 했지요. 형의 말 말고, 형의 음성은 '별 거 아니야. 너무 심각해 하지마' 하고 말했어요. 나는 그렇게 들었어요. 우리가 겪는 고통이 자못 심해도 삶이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그 고통을 함께 나누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일 거예요. 요즘 들어 고통을 나누는 능력이 곧 인간됨의 깊이라는 확신이 생겼어요. 예수님은 '참 인간이며 참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기독교의 전통은 바로 이런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요? 히브리서는 그것을 감동적으로 드러내줘요.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4:15)

주님의 손길이 머무는 곳마다 생명의 파랑바람이 일었던 것처럼 우리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우리의 눈길이 미치는 곳마다 생명의 신바람이 일어났으면 좋겠어요. 처서를 앞둔 교회 마당가에 뒤늦게 피어난 하얀 옥잠화를 보면서 하나님의 때를 생각했어요. 저마다 때가 있는 것을, 너무 서두를 것도 없고, 너무 게으름 피울 것도 없고, 자기 생각과 몸의 속도대로 여유롭게 살아야겠어요. 자기 속도를 잃으면 삶의 아름다움을 맛볼 수 없을 테니까요. 기대와 현실 사이의 부조화가 아무리 깊어도, 스스로가 아무리 낯설게 여겨져도, 산 자의 땅에 있다는 것은 분명 멋진 일이니까요. 기쁨과 즐거움, 그리고 슬픔과 고통이 뒤섞인 우리 삶의 잔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맛보고 가야겠지요? 어쩌면 쓴맛이야말로 우리 존재를 한껏 고양시키는 묘약인지도 모르지요. 형, 올해도 잘 무르익으시기 바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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