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말의 신뢰성이 회복되어야 2003년 07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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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신뢰성이 회복되어야

말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다리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은 서로를 향해 내미는 화해의 몸짓이다. 말다운 말은 완전하게 동화될 수 없는 타자들을 서로 매개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말에 대한 상호 신뢰이다. 하지만 지금 공적 분야에서 우리의 말살이는 어떠한가? 누군가에게 타격을 가하거나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 발설된 독한 말들, 허위에 찬 말들이 조자룡의 칼처럼 난무하고 있다. 독한 말은 또 다른 독한 말을 부른다. 사람은 태어날 때에 그 입안에 도끼를 가지고 나온다지 않던가. 어리석은 자는 말을 함부로 함으로써 그 도끼로 자신을 찍고 만다.

입이 거친 전직 대통령의 독설에 흥분한 여당 대변인이 구강청정제와 초등학교 도덕교과서를 그에게 보냈다 한다. 참 슬픈 현실이다. 우리의 정치문화의 수준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 같기 때문이다. 생각이 서로 다르고,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사람들 사이에 '소통의 통로'를 만들어야 할 책임이 있는 사회 지도층들이 오히려 '불통'의 벽을 쌓는 것처럼 보이니 딱한 노릇이다. 차라리 그들의 말을 듣지 않고 살았으면 좋겠다. 독한 말을 확대 재생산해내는 정당의 대변인 제도도 문제이지만, 정치인들의 말 같지 않은 말을 미주알고주알 국민들에게 고하는 언론도 책임이 크다. 일부 언론은 서로 다른 이해 당사자들 사이에 싸움을 부추기며 즐기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말은 침묵의 배경이 없으면 깊이가 없다'는 막스 피까르의 말은 그래서 더욱 절실하게 다가온다. 말의 깊이와 원근법이 사라지고 즉자적으로 쏟아지는 말들은 사람들을 가깝게 하기는커녕 더욱 멀어지게 한다.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인터넷을 통해 우리가 접하는 말들을 사람들은 크게 신뢰하지 않는다. 그 말들이 정확한 사실에 근거하지 않을 때가 많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은폐와 폭로와 조작 그리고 변명으로 이어지다가 급기야는 유야무야 스러지고 마는 말들을 우리는 수없이 보아왔다.

권위주의 시대부터 우리는 말의 행간을 살피는 버릇을 들여왔다. 어쩌면 이것은 매체를 통한 속임수와 의식의 조작에 응하지 않겠다는 주체성의 발로일 수도 있다. 하지만 발설된 말에 대한 신뢰를 거두는 순간부터 우리는 외딴 섬에 갇힌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많았다. 거짓증언을 금지하는 십계명의 아홉 번째 계명은 결국 말의 신뢰성이 무너지면 사회의 토대가 근본적으로 흔들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가르치기 위함이 아닌가 싶다.

어떤 경우에도 참된 말을 하겠다는 결의가 필요하다. 합리적인 말보다 큰 소리가 득세하는 세상을 타락한 세상이라고 개탄하면서, 그 말들이 뒤엉키고 있는 삶의 현장을 외면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실체를 잃어버린 말의 본딧값을 되찾기 위해 지금부터라도 애써야 한다. 누군가를 비난하고 관계를 훼손하기 위해 무기로 채택된 독한 말들이 더 이상 우리 사이를 횡행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큰 소리보다 작은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존중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국민소득 2만 달러의 꿈보다 더 시급한 것은 말의 본래성과 신뢰성을 회복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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