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서평] 생태주의자 예수 2003년 05월 13일
작성자
창조질서의 창문은 열려야 한다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프란츠 알트 지음 손성현 옮김
<<생태주의자 예수>>(나무심는사람, 2003)


생명은 선택이 아니라 당위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 땀방울이 쏟아진다. 세 걸음을 내딛고 한 번 절하는 이들의 비장한 몸짓 앞에서 우리는 말을 잊는다. 새만금에서 출발하여 서울을 향하고 있는 그들의 행렬은 이천 년 전 나사렛의 한 젊은이의 십자가 행렬을 연상시킨다. 인간의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빚어낸 죽음과 죽임의 현실은 관절염에 걸린 무릎의 아픔보다 더 크기에 그들은 엎드리고 또 엎드린다. 몸으로 견딘 아픔만큼 세상이 생명의 신비와 아름다움에 눈 뜰 수만 있다면 죽어도 좋은 것이다. 서울은 더 이상 대중가요 가사처럼 종이 울리고 꽃이 피고 새들의 노래가 아름답게 들려오고 사람들이 환히 웃는 '아름다운 서울'이 아니다. 음산한 욕망의 숨결이 턱에까지 차 오른 '스올'일 뿐이다. 그 행렬이 묻혀온 원시의 갯내음이 '스올' 주민들의 영혼 깊은 곳에도 스며들 수 있을까? 그래서 잃어버린 생명에 대한 파릇파릇한 감수성을 되살릴 수 있을까?

북한의 핵문제가 국제사회에서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있는 지금, 우리는 바다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소식에 한숨부터 내쉰다. 대만이 '비핵국가추진법'의 초안을 의결하고, 더 이상 핵발전소를 짓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기존의 발전소도 해체하기로 했다 한다. 부럽기만 하다. 그들의 선택은 원자력이 값싸고 안전한 에너지원이라는 당국자들의 장담이 허언임을 비웃듯 드러내고 있다. 미국이 이라크를 상대로 벌였던 침략전쟁이 석유를 얻기 위한 전쟁임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화석연료가 고갈되어 가면서 이제 세계는 이념 때문이 아니라, 자원 때문에 전쟁을 벌이게 된 것이다. 그만큼 세상이 흉포해진 것이다. 오존층이 파괴되고, 온실효과로 지구가 따뜻해지면서 해수면이 상승하고, 수많은 생물종이 파괴되고 있고, 우리 문명이라는 것이 지구를 몇 번이나 파괴하고도 남는 핵무기 위에 세운 것임을 생각하면서 한숨을 내쉬는 이들은 많다. 하지만 대개는 정신적 무기력에 사로잡혀 있다.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이다. 사실은 돌이키고 싶지 않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돌이킴이 요구할 대가가 만만치 않음을 알기 때문이다. 브레히트의 말처럼 우리는 자기가 올라앉은 나뭇가지를 톱질하는 사람들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생태계의 회복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당위의 문제이다. 그것도 매우 시급한 문제이다. 그런데 이것은 정치나 경제 혹은 기술의 문제이기 이전에 세계관의 문제이다. 우리가 새로워지지 않는다면 생태계의 회복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길은 있는가? 『생태주의자 예수』의 저자 프란츠 알트는 '있다'고 대답한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는 그 길을 '예수'에게서 찾는다. 저자는 지금의 지구촌의 특색을 '넘치는 돈'과 '박약한 정신'으로 표현하면서 생태 일일 뉴스를 이렇게 간추리고 있다. 우리가 이 글을 읽고 있는 오늘 하루 동안 우리는,

·100가지 종류의 동식물을 멸종시키고
·20,000헥타르(약6천5십만 평)의 사막을 만들어내고
·8,600만 톤의 비옥한 땅을 침식시켜 파괴하고
·1억 톤의 온실가스를 배출하고 있다.

참 대단한 인간 아닌가? 창조의 면류관을 자임하는 인간은 기실 창조세계의 재앙이 되고 만 것이다. 타락이란 바로 이런 현실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겠는가. 세계가 하나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지 못하는 인간은 윤똑똑이에 불과하다. 인간의 탐욕이 빚어낸 생태계의 신음소리는, 인간의 영혼이 병들었음을 나타내는 하나의 지표이다. "생태위기를 본질적으로 치유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영적인 깊이가 필요하다. 지식과 오성悟性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오성을 넘어서는 것만으로는 이성理性에 도달하지 못한다. 새로운 생태적 지혜만이 우리 안에 있는 좀더 나은 자아를 일깨울 수 있다. 새로운 생태적 지혜는 오래된 종교적 앎에 뿌리를 두고 있다."(59)


예수는 어떤 면에서 대안적 가치일 수 있는가?

프란츠 알트는 그 '오래된 미래'로 예수를 지목한다. 예수는 '고행, 희생, 포기의 대가大家가 아니다'(106). 교회와 신학은 그를 속죄신학의 틀 속에 가둬두었지만, 그래서 금관에 갇힌 채 침묵을 강요당하고 있지만, 예수는 행복의 메시지를 전하는 행복의 사자이다. 그가 전하는 행복의 메시지는 이것이다.

"신뢰하라! 두려움을 버려라!
신뢰의 치유 능력을 신뢰하라―신뢰를 신뢰하라!
너희 모두는 하늘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를 받는 존재다!
하나님의 협력자가 되라! 그것을 기뻐하라!
위기와 실수로부터 배워라!"(106)

저자는 '더 많이 신뢰하라'는 예수의 거듭된 요청에 주목하면서, 두려움이 아니라 신뢰가 밝은 미래로 나아가는 지침일 수 있다고 말한다. 예수가 우리에게 가져온 새로운 삶은 우리 안에 있는 또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신적인 것에 열려 있는 삶이다. 저자는 하늘 아버지의 창조세계를 끝없이 신뢰했던 예수를 '생태적 예수'라 부른다(38).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따라서 하나님과 우리들 속에 있는 신적인 것에 대해 더 깊은 신뢰와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사랑 없음에 굴하지 않고 사랑하기, 희망 없음에 꺾이지 않고 계속 희망하기, 모든 불신을 거슬러 신뢰하기, 모든 파괴에 맞서 창조질서의 보존을 위해 함께 일하기"(118)를 생의 목표로 삼은 사람들이다.

하나님에 대한, 그리고 생명에 대한 근본적인 신뢰를 회복한 사람은 자기 확장의 욕구에 시달리지 않는다. 전쟁을 기획하고 명령하는 사람들, 육식공룡처럼 모든 것을 삼키려드는 악마화된 문명의 이면에는 생명에 대한 불신과 두려움이 있다. 정의의 가면 뒤에 숨어 탐욕을 채우려는 세력이나 그들을 지원하는 기독교 원리주의자들은 예수의 핵심을 폐기처분하고 말았다. 머리와 가슴, 남성적 에너지와 여성적 에너지의 조화와 균형 속에 살았던 '최초의 새로운 남자'인 예수는 우리를 구체적인 삶의 실천으로 부른다.


맞서 싸우는 사람들

생태계의 회복을 꿈꾸는 예수적 삶의 실천은 일종의 투쟁이다. 물론 상대의 멸절을 의도하는 투쟁이 아니라, '그'도 살리고 '나'도 살리려는 투쟁이기에 그것은 야스퍼스의 말대로 '사랑하면서의 싸움'이다. 그 싸움의 제일선에서 맞닥뜨리는 것은 기존의 삶의 패턴을 유지하려는 기득권 세력들이다. 특히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대안적 삶을 방해하는 에너지 독점 세력들이다. 또 그들과 만수산 드렁칡처럼 이해관계로 얽혀있는 거대 은행과 돈에 놀아나는 학자들 그리고 정치가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태양열이나 바람 혹은 물을 이용한 에너지 개발을 현실성이 없다는 이유로 반대한다. "태양 전류는 저장이 안 된다든지, 재생 가능한 에너지의 효율성이 아직 기대에 못 미친다든지, 에너지의 밀도가 너무 작다든지"(199) 하는 것이 그들의 논리이다. 물론 그들은 '그러면 어떤 대안이 있느냐?'는 물음에는 답하지 않는다. 그들은 미래 세대의 몫을 가로채 자기 배를 채우는 일에 별로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돈이나 권력보다 더 강한 것은 깨어 있는 사람(202)이다. 가속화의 파괴성을 딛고 일어나 느림의 창조성을 좇는 사람들(342)의 어처구니없어 보이는 꿈이 세상을 구원한다. 저자는 그런 꿈이 어떻게 현실이 되고 있는지를 이 책의 3장부터 8장까지 조목조목 보여주고 있다. 태양, 바람, 그리고 물이 왜 거의 유일한 대체에너지일 수밖에 없는지, 또 그런 것에 일찍이 눈 뜬 이들의 삶이 어떻게 변화되고 있는지, 생태적 교통정책과 수자원정책, 농경정책은 어떻게 가능한지를 그는 열정적으로 그려 보여주고 있다. 물론 곳곳에 그가 인용하는 성경구절들은 다소 견강부회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분은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신다"는 말씀에서 태양에너지로 전환해야 할 타당성을 찾고,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는 말씀에서 바람에너지로 전환해야 할 이유를 찾는 것은 매우 생뚱스럽다. 하지만 그의 주장을 미소를 띤 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그의 진정에 지피는 경험을 하게 된다. 예수는 그에게 관념도 아니고, 신앙의 대상으로 저편에 좌정하고 있는 존재도 아니다. 그는 대안 그 자체이며 우리가 생명을 위해 택할 수 있는 소중한 전략이다.


진정한 번영의 길

저자는 나사렛 청년의 생태적 휴머니즘이야말로 행복한 21세기를 위한 가장 인간적인 비전이라고 주장한다(397).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물질적 번영은 선이라는 '시장의 우상'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불필요한 욕망을 자극하여 불행을 확대재생산하는 소비사회의 충실한 신민이 될 것을 요구하는 현실에 대해서 '아니오'라고 말해야 한다. 교회는 우상파괴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마른 뼈의 골짜기에 생기를 불어오게 했던 에스겔처럼, 이 죽음과 죽임의 세계에 생태적 영성의 바람을 불어오게 할 책임이 있다. 소외된 노동의 덫에 걸려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일의 즐거움을 돌려주어야 한다. 진정한 번영은 생태주의의 균형을 회복하는 것임을 알려야 한다.

2,600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슈바르츠발트의 쇤아우는 독일 전체에 알려질 정도로 획기적인 전력 혁명이 일어났다. 쇤아우는 에너지 독점 세력의 엄청난 위협을 받으면서도 재생에너지로의 전환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냄으로써 에너지 생산과 에너지 공급을 민주화했다. "교회당 지붕에는 거대한 태양열 장치가 설치되었고, 사람들은 그것을 쇤아우의 '창조질서의 창문'이라 부른다."(206) 나는 꿈꾼다. 이 땅 도처에 있는 교회마다 쇤아우의 '창조질서의 창문'이 열리기를. 그래서 세상에 생태학적 감수성과 새로운 생의 활력을 공급할 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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