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권위주의의 옷을 벗으라 2003년 04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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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주의의 옷을 벗으라


권위는 주장함으로써 얻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권위를 내세우는 순간 그나마 유지되어 오던 그의 권위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 권위를 뜻하는 그리스 말 '엑수시아'는 그 말의 역설적 운명을 보여주고 있다. 진정한 권위는 '본질'(우시아)로부터(엑스) 나온다. 하지만 그릇된 권위는 '본질'에서 벗어남으로서 획득된다. 그런 의미에서 그릇된 권위는 주어진 것이 아니라 강요된 것이다. 그릇된 권위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권위주의의 갑옷을 입는다. 그는 그 갑옷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한다.

한 시골 초등학교 교장선생의 자살을 둘러싸고 보수적인 언론과 교원단체들은 벌떼처럼 일어나 전교조 때리기에 나섰다. 그들은 전교조가 마치 기존질서의 철저한 전복을 꾀하는 혁명 세력이나 되는 것처럼 야단이었다. 그러나 문제의 본질을 우리는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한다. 결국 그를 죽음에로 내몬 것은 우리의 일상 속에 깃든 미시적 권력의 욕망이다. 오랫동안 서열 사회의 틀 안에서 살아왔고, 사유해왔던 이들은 그 동안 당연시되어왔던 서열 관계의 해체를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폭력으로 받아들인다. 누구를 만나든 먼저 나이를 묻고 학번을 묻는 것이 일상화된 한국 사회에서 그 선험적인 틀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에게는 불온의 꼬리표가 붙게 마련이다.

국회 행자위와 문광위 소속 의원들이 젊은 장관들에게 보인 방자함은 우리 사회가 서있는 미성숙의 한 단면을 가감없이 드러내고 있다. 국회의원들은 장관들이 추진하는 정책보다는, 그동안의 관행대로 처신하지 않는 그들의 태도에 더 예민하고 반응하고 있다. 아랫자리에 있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자기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자 왠지 기분이 나쁜 것이다. '진리에 대한 헌신이 나를 정치로 끌고 들어갔다'고 말했던 간디의 자세를 기대하지는 않는다. 다만 변화하는 시대를 읽는 건전한 상식인의 눈이나마 갖추어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권위주의에 사로잡힌 혼미한 정신은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없으며, 스스로 만든 번뇌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도 없다. 이성과 합리성보다는 기분이 더 많은 것을 말하는 사회 시스템 속에서는 창의적인 정신이 발현될 여지가 거의 없다.

때는 바야흐로 청명·곡우를 지나 입하를 향해 달려가는 데, 권위주의의 갑옷을 입은 이들은 그 칙칙한 의상을 벗어 던질 생각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사정은 종교인들이라 해서 예외가 아니다. 나사렛 출신의 한 젊은이는 고향에서 환영을 받지 못했다. 서열 사회에 동화되기를 거부하는 영혼을 받아들일 여백이 그들에게 부족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는 교회 안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윤동주 시인의 기다림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치열한 자기 비움과 자기 성찰, 그리고 섬김의 실천을 통해 우리 영혼에 드리운 어둠, 한반도와 온 세계에 드리운 어둠을 조금씩 내모는 참 권위의 사람들이 그립다. (김기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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