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바다 위를 나는 나비 2003년 02월 17일
작성자
바다 위를 나는 나비


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흰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1930년대의 모더니스트 김기림의 시 <바다와 나비>의 일 연이다. 이 시는 엄혹한 세상과 마주선 낭만적 자아의 설렘과 좌절을 그리고 있다. 낭만적 자아는 바다를 '청(靑) 무우밭인가' 착각해서 물결에 내려앉으려다가 어린 날개를 짠물에 적시고는 맥이 풀려 돌아오는 나비로 표상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시의 한 부분만을 떼어내 의도적인 오독을 즐기고 싶다. 바다를 청무우밭으로 착각하는 인식의 조야함보다는, 수심을 모르기에 바다 위를 겁도 없이 날아보는 그 천진함이 부럽기만 하다. 몸으로 세상을 알기도 전에 학습된 두려움에 사로잡힌 채 기존의 질서가 쳐놓은 울타리 안에 즐거이 머무는 안일함, 역사의 여정에서 입은 상처의 기억 때문에 하늘을 향한 날갯짓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지리멸렬에 식상했기 때문이다.

갓 깨어난 노무현 정부라는 나비가 바다 위를 날려 한다. 21세기 초 한반도의 상황이라는 바다, 태풍을 예고하는 짠바람이 쉼 없이 불어오는 그 바다 위를 날아 마침내 평화와 통일의 해안에 도달할 수 있을까? 쉽지는 않을 것이다. 출발부터 그의 날개는 젖기 시작했다. 기존의 권력의 그물망 속에 안주하고 있던 이들은, 그 그물망의 외부에 눈길을 주고 있는 그의 태도를 불온하게 느낀다.

잘 짜여진 매트릭스의 세계는 개성적인 인간의 출현을 반기지 않게 마련이다. 그래서 어떻게든 그의 날개에 추를 달아놓으려 한다. 능력 있고 창조적인 사람들에 대한 계급적 적개심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수구적 언론은 그를 기존의 그물망 속에 안착시키려 갖은 시도를 다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시도는 어느 정도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그들은 그 나비가 결국에는 물결에 절어서 돌아올 것임을 확신하면서 속으로 웃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정신계의 전사가 되어야 할 종교인들 가운데에도 역사의 흐름을 되돌리려고 안간힘을 쓰는 이들이 있다. 가나안 땅은 사람을 삼키는 땅이라며 애굽으로의 귀환을 추진했던 이들은 아무도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었다. 폭풍이 예고된 바다 위로 날아오르는 나비를 본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사랑하고 믿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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