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새로봄:산상수훈(10) 2002년 12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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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5:13, 14)


나를 향해 내미는 손

새벽바람이 차다. 습관처럼 멀리 북쪽 하늘을 바라본다. 달을 벗삼은 별 하나가 유난스레 눈망울을 빛낸다. 사람이 물위를 걷는 것이 기적이 아니라 땅 위를 걷는 것이 기적이라는 말을 되새기며, 한 걸음 한 걸음 마음을 다해 걷는다. 그런데 늘 고요하기만 했던 거리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어떤 중심을 향해 모여들 듯 이 골목 저 골목에서 사람들이 삼삼오오 걸어나온다. 콜록거리는 사람도 있고, 뭐라고 중얼거리는 사람도 있다. 새벽시장도 아닌데 웬 사람이 이렇게 많은가? 명상에 잠겨 걷곤 하던 새벽의 고요는 주차공간을 확보하려는 차들의 기세에 몰려 사라져버렸다. 일순 불편한 마음이 일어 사람들을 바라본다. 옆구리마다 성경책과 찬송가가 끼어 있다. 아, 알겠다. 인근의 대형교회가 벌이고 있는 특별새벽기도회 때문이구나. 사태를 알아차렸는데도, 고요를 빼앗긴 마음이 편치 않다. '이게 무슨 심보지' 하고 자책도 해보지만 마음의 어둠은 사라지지 않는다.

골판지 상자를 모아 팔아 생계를 이어가는 할머니는 주변의 소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상자를 추스르느라 분주하다. 큰길가로 나오자 새벽거리를 쓸던 환경미화원 아저씨가 언제나 그렇듯이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코끝에 콧물이 맺혀있다. 교회 근처에 있는 인력소개소 앞에는 벌써 여러 사람이 와서 소개소 문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다. 몸을 옹송그린 채 발로 담을 툭툭 차면서 추위와 사투를 벌이는 사람도 있다. 그들의 시선을 느끼면서 교회로 들어선다. 환하고 따뜻한 예배실에 들어서는데, 작지만 분명한 소리가 내 가슴을 툭 친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이 말씀이 왜 그리도 아프게 들려오는지 모르겠다. 관념 속에서 부유하며, 삶으로부터 점점 떠밀리고 있는 나의 무능을 노골적으로 지적하는 것 같기 때문이리라. 차라리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 되려고 애써라. 너희는 세상의 빛처럼 살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더라면 아픔이 이처럼 크지는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너희는 ∼이다"라는 표현이다. 내 마음을 아프게 뒤흔드는 것은 주어와 서술어의 불일치, 자기동일성의 부재, 당위와 현실 사이의 거리에 대한 자각이다.


비슷한 것은 가짜다

누가 세상의 소금이고 빛인가? 주어와 서술어를 일치시키려 몸부림치는 사람들, 현실의 인력을 뿌리치며 당위에 다가서는 이가 아닌가? 광화문 거리에서 눈물을 글썽이며 서성거리시는 예수님은 촛불 하나 밝혀들고 추운 거리를 메우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그리고 이 시대의 아픔과 모순을 짊어지고 넋으로 화해버린 어린 영혼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하시지 않을까? 시인 윤동주의 '나'는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時代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最後의 나'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한다(「쉽게 씌어진 詩」).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모는 손, 내가 나를 향해 내미는 손, 그 차갑고 슬픈 손을 잡아줄 따뜻한 손이 곧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는 존재 긍정이 아닌가.

소금은 늘 여여한 소금이지 경우에 따라 짠맛을 내지 않는다. 빛은 언제나 빛이지 사람을 가려 비치지 않는다. 세상에는 소금처럼 보이지만 소금이 아닌 이도 있고, 빛처럼 보이지만 빛이 아닌 사람도 있다. 모양은 닮았지만(形似) 실질은 다른 사람, 그리스도인의 외양은 갖췄지만 그리스도의 진정에는 이르지 못한 사람 말이다. 웨슬리는 그들을 가리켜 '절반의 기독교인'이라 했다. 절반의 기독교인은 기독교인이 아니다. 비슷한 것은 진짜가 아니지 않은가? 말투도 비슷하고 표정도 비슷하지만 실질은 그리스도와 닮지 않은 사람들이 많다. 남을 가리킬 것 없다. 내 꼬락서니를 보니 그렇다. 두루 해박한 듯하나 삶의 실질이 부실하구나. 일망무제로 펼쳐진 바닷물은 소금을 내장하고 있으나 아직 소금은 아니다. 염전에 갇혀 그 뽀얀 폭양 아래 몸을 뒤채면서 헛된 수분을 증발시키지 않고는 소금이 되지 않는다. 그 빛나는 결정체를 이룰 수 없다. 박이약지(博而約之)라, 폭넓은 섭렵(博)이 하나의 초점을 통해 집약(約) 되지 않는 한 어떠한 결실도 기약할 수 없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려는 이들에게 '자기 부정'을 요구했다. '자기 부정'을 통해 삶을 거르지 않는 한 소금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리라. 새만금 간척 현장에서, 북한산에서, 광화문에서, 그늘진 삶의 현장에서, 자기를 던져 생명을 지켜내는 박이약지의 소금들을 본다.


가슴에 봄을 가져오는 사람

자기도 모르는 새 소금이 된 사람들만이 빛의 알갱이가 되어 세상을 밝힌다. 초는 자기 몸을 태워 빛을 발하지만, 사람은 이웃에 대한 애태움을 통해 빛을 발한다는 말은 틀림없는 진실이다. 남루하고 질척거리는 세속의 삶 위에 우뚝 솟아 고고하게 빛나는 정신도 있다. 하지만 그들조차도 상처받은 이웃들을 어루만지기 위해 항간에 엎드린 이들에게서 발산되는 빛의 알갱이들보다 결코 더 밝다고 할 수 없다. 성탄절이라고 교회당 밖에 두른 빛의 띠도 참 빛은 아니다. 그 빛은 다른 이들의 마음을 환하게, 따사롭게 만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세상살이에 지쳐 싸늘하게 식어버린 가슴에 봄을 가져오는 사람, 있음만으로도 기쁨의 노래를 불러오는 사람, 사람 속에 깊게 숨겨진 아름다움에 눈뜨게 하는 사람, 그가 빛이다.

요한은 예수를 가리켜 '빛'이라 했다. 칼릴 지브란은 그리스 시인 루마누스의 입을 빌려 말한다.


그는 시인이었습니다. 그는 우리 눈을 대신해 보았고 우리 귀를 대신해 들었으며 우리가 말로 못하는 말을 그는 입술로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것을 그는 손가락으로 만졌습니다.
그의 심장 속으로부터는 이루 셀 수 없는 노래하는 새가 날아 북으로도 남으로도 갔고, 언덕의 조그마한 꽃들은 하늘을 향해 가는 그의 발걸음을 멈추었습니다.
여러 번 여러 번 나는 그가 허리를 구부려 풀잎을 만지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는 속으로 그가 이렇게 말씀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요 조그만 파란 것아, 너는 베잔의 참나무와 레바논의 백향목과 한가지로 나와 함께 내 나라에 있을 것이다."
그는 모든 사랑스러운 것들을 사랑했습니다. 어린이의 수줍어하는 얼굴, 남쪽에서 오는 유향과 몰약.(……)
참으로 그는 시인이었습니다. 그의 심정은 저 높은 곳을 뛰어넘은 지경에 가 있었고 그의 노래는 우리 귀에 불러주었지만 또 다른 귀를 위해서도 부른 것이었고, 거기서 생명은 언제나 젊고 시간은 언제나 새벽인 세계에 사는 사람에게도 불러준 것이었습니다.(칼릴 지브란, 『사람의 아들 예수』중에서)


불초(不肖)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책하는 우리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이 말은 해학도 비꼼도 과장도 허사도 아니다. 그렇다고 착각하지는 말자. 우리는 여전히 소금의 가능성일 뿐이고, 빛의 가능성일 뿐이다. 하지만 갈릴리 어부 시몬의 속에서 '베드로'를 보시고, 나다나엘에게서 '참 이스라엘'을 보시고, 창녀에게서 성녀를 보시는 분이 우리 속에서 빛과 소금을 보고 계시다. 그리고 조각가가 돌덩어리 속에서 형상을 이끌어내듯, 주님은 우리에게서 빛과 소금을 끌어내신다.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처럼, 그분은 우리 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삶의 결정체를 말씀으로 빚고 계시다. 마음을 열어 그 말씀과 만나면 우리는 이전의 사람일 수 없다.


빛과 소금의 보람

소금은 자기가 없어지면서 뭔가를 이루어낸다. 빛이 비치면 생명이 깨어난다. '의의 공효가 화평'이듯이 빛과 소금의 보람은 생명의 살림이다. 그런데 그것은 언제나 육체를 매개로 해서 나타난다. 하지만 슬프게도 우리 육체는 빛의 매개가 되기보다는 어둠의 매개가 되기 일쑤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현대인들에게 몸은 영원을 나르는 수레가 아니라 경배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많은 이들의 '몸교'의 신도가 되어 거리를 헤매고 있다. 그 몸은 항상 '나'에게로 회귀하는 몸이기에 몸교의 신자들은 자기 중심적이다. 자기 중심성에는 빛이 없다. 몸이 자기를 향할 때는 어둠이다. 하지만 몸이 타자를 향할 때, 누군가의 필요에 응답할 때, 그의 눈물을 닦아줄 때 몸은 빛이다. 비노바 바베는 "몸은 신의 들판을 경작하는 도구"라 했다.
어둠을 향해 온몸으로 부딪혀 나가다가 힘이 부칠 때마다 지고하신 분 앞에 서야 한다. 그분 앞에 서기만 하면, 그분은 해맑은 모습으로 우리 곁에 다가오시기 때문이다. 아하, 이제 알겠다. 우리가 빛이고 소금일 수 있는 것은 그분의 현전 앞에 오롯이 설 때뿐이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주님의 현존 안에서 아멘.

(김기석 목사 ∥ 청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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