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새로봄: 산상수훈(9) 2002년 11월 15일
작성자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땅함의 길

처세술의 마법을 괄호 치기로 설명하는 철학자가 있다. '출세주의교'를 신봉하는 것처럼 보이는 많은 사람들이 출세를 위해서 인생의 소중한 다른 가치들에 괄호를 쳐버린다는 것이다. 건강, 사랑, 우정, 자유, 의, 공생, 생태계 보존 등에 한눈을 팔다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 주변부로 떠밀리고 만다는 강박관념이 그런 괄호 치기 전략의 심리적 배경이다. 복잡다단한 삶의 어느 부분에 '당분간'이라는 단서를 붙여 괄호를 치고 나면 삶은 한결 수월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문제는 삶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이다. 괄호 속에 갇힌 줄 알았던 이런 저런 가치들이 불쑥불쑥 고개를 내밀고 자기의 존재를 주장하기 때문이다. 괄호 치기가 용인되고, 암묵적으로 권장되는 세상은 인간성의 사막이 되고 만다. 그 속에 '우리'는 없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서로-함께'의 존재로 보았는데, 서로-함께의 끈이 느슨해진 세상, '우리'는 없고 '나'만 돋을새김으로 도드라지는 세상은 살맛나는 세상이라 말할 수 없다.

잘 살기 위해(?) '괄호 치기' 전략을 능숙하게 구사하는 이들에게 "의를 위해 박해를 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는 예수의 말은 컴퓨터 화면에 간혹 떠오르는 우주문자와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아무리 무시하려고 해도 그 말씀은 우리에게서 떨어져나가지 않는다. '의'는 사람됨의 근본이고, 하늘의 명령이기 때문이다. 그늘 속에 들어가면 그림자가 사라진 것처럼 보여도, 그늘을 벗어나는 순간 그림자는 다시 드러나게 마련이다. 사람이 아무리 괄호 치기의 명수라 해도 그가 사람인 한 '의'를 완전히 벗어 던질 수는 없다. 주자는 '의'를 마음의 제재(心之制)요, 일의 마땅함(事之宜)이라 했다.

그러면 '의'의 내용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것은 바닥에 사는 사람들을 생각하고 그들을 아끼는 것이 아니겠는가.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차마 버리지 못하는 마음, 그래서 그 양을 찾아 위험과 어둠을 마다하지 않고 산길로 접어드는 마음 말이다. 이 마음이 스러진 현실이기에 우리는 문명의 뾰족한 끝에서 인간의 황혼을 노래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모든 관심이 '이해관계'에 집중되는 세상에서 '의'를 추구하는 사람은 왠지 모르게 대하기 불편한 별종처럼 여겨진다. 그것도 나의 '이해관계'와 직접적으로 부딪치지 않는 경우에 그렇다는 말이지 일단 나의 이익과 부딪치게 되면 문제는 달라진다. 그는 대적이 되는 것이다. 선거를 앞두고 이합집산하는 철새 정치인들을 보면 분통이 터지지만, 그들을 향해 돌을 들 것도 없다. 그들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속에 우리 얼굴이 드러나니 말이다.

꿩잡는 게 매라고, 결과가 수단을 정당화하는 세상에서 과정과 절차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으로 취급받는다. 누구도 '힘이 곧 정의'라고 말하지는 않지만 누구도 그 말을 부정하지 않는 현실에서 힘없는 이들 편에 서서 말하는 사람은 위험한 사람으로 낙인찍힌다. 그들을 위해 예비된 것은 모욕과 박해와 비웃음뿐이다. 그래서인가? 우리 시대에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사람이 줄어들고 있다. 예수 정신의 담지자인 교회조차도 의를 위해 박해를 받으려 하지 않는다. 현실이 천리(天理)를 따라 마땅하게 돌아가기 때문이라면 얼마나 좋으랴!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마땅함의 길은 가뭇없이 망각되고, 욕망의 길만이 도드라진 형편이다. 바야흐로 '비루함이 인생 중에 높아지는 때에 악인이 처처에 횡행하는'(시12:8) 시대이다. 잗다랗게 변해버린 사람들의 마음을 인해 예수는 지금도 한숨을 내쉬고 계시지는 않은가?


칼리아예프의 길, 예수의 길

알베르 까뮈는 『정의의 사람들』이라는 희곡에서 하나님을 상정하지 않으면서도 인류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등장시키고 있다. 그들은 러시아 민중들을 억압하고 있는 대공(大公)을 정의의 이름으로 살해하는 테러리스트들이다. 단 한 사람이라도 노예상태 속에 있다면 자유라는 것도 감옥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에서 행동에 나섰지만, 증오를 통해 획득할 수 있는 자유는 없다는 자각 때문에 그들은 번민한다. 그런데도 그들은 정의라는 대의를 위해 고난의 쓴잔을 마신다. 하나님의 정의가 시행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에서 그들은 스스로 역사 변혁의 주체가 되려는 것이다.

칼리아예프: 단지, 사람들은 모욕을 당하기 때문에 마시는 겁니다. 더 이상 마실 필요가 없는 시대가 반드시 올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가난뱅이든 신사든, 아무도 수치심이 없을 거구요. 우리는 모두 형제가 될 것이고, 정의가 우리의 마음을 투명하게 하게 만들 것입니다. 내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까?

포 카: 알지. 그곳은 하나님의 나라거든.

칼리아예프: 그런 말은 할 필요가 없어요, 동지. 하나님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정의만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이해 못하겠어요? 성 드리트리의 전설을 아십니까?

포 카: 몰라.

칼리아예프: 초원에서 성(聖) 드미트리와 하나님이 만나기로 약속했지요. 그래서 그는 바쁘게 가고 있었는데, 마차가 진흙에 빠져서 쩔쩔매고 있는 한 농부를 만났습니다. 그래서 성 드리트리는 그 농부를 도와주었지요. 그런데 진흙이 너무 깊었고, 마차도 깊게 빠져 있어서 그것을 빼내느라 시간이 한 시간이나 걸렸어요. 그 일이 끝나고 드미트리가 약속 장소로 가 보았을 때는, 하나님은 벌써 가 버리고 없었습니다.

포 카: 그래서?

칼리아예프: 그때부터 진흙탕에 빠진 마차와 도와줄 동포들이 너무 많아서, 항상 약속에 늦게 도착하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알베르 까뮈, 『정의의 사람들』중에서)


칼리아예프에게 하나님은 무능력하고 무책임하고 무정한 존재이다. 그렇기에 그는 스스로 역사의 제단 앞에 자기를 바친다. 생을 언제나 경이롭게 바라보고, 인생과 아름다움을 사랑하면서도 세상에 만연한 불의와 압제에 물리치기 위해 죽음의 길을 택한 칼리아예프는 최후 진술에서 이렇게 말한다. "죽음이 눈물로 피로 물든 이 세계에 대한 나의 숭고할 저항이 될 것이다."

그런데 정말 하나님은 드미트리를 기다려주지 않는 속좁은 존재인가? 오히려 그의 마음 속에 헌신의 열정을 심어주는 존재는 아닌가? 칼리아예프의 숭고한 저항을 무신론적이라 해서 내치실 분인가? 칼을 갈아 날을 세우듯 시대의 아픔에 자기 마음을 갈아 무딘 마음을 벼리는 사람들, 동시대의 눈물과 한숨을 함께 아파하고 불의한 세상을 바꾸기 위해 애태우면서 고난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간 사람들, 그들은 그저 저물녘의 노을처럼 덧없이 스러지고 말 것인가? 나는 테러리스트들의 폭력을 찬미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역사의 어둠을 향해 온몸을 내던져 작은 빛이나마 만들려던 이들의 열정이 다 잊혀지고, 사람됨이 사소(些少)의 함정에 빠져버린 이 시대를 아파하는 것이다.

죽음과 손을 잡고 살았기에 "내가 세상을 이겼다" 할 수 있었던 예수,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침묵 앞에 엎드렸던 예수, 버림받음의 고통으로 목이 말랐던 예수는 어둠 너머에 있는 빛을 보았고, 죽음 너머의 생명을 보았고, 무한한 허공 저편에 있는 대주재 하나님을 보았다. 그렇기에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고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형 에서를 피해 달아나다가 황량한 들판에서 돌베개를 베고 잠들었던 야곱이 바로 그곳에서 하늘의 문을 보았던 것처럼, 칼리아예프가 넘어진 그 자리에서 예수는 하늘의 문을 보았다. 예수의 이름 때문에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 것을 기뻐하면서 공회를 떠났던 사도들, 돌을 손에 들고 증오와 멸시로 식식거리는 이들 앞에서 열린 하늘을 보고 기뻐했던 스데반은 죽음의 벼랑 끝에서 하늘의 길을 본 사람들이다.


말씀에 괄호를 치지 말라

겨울 산을 거닐면서 졸가리만 남은 나무를 바라보면 마음이 서늘해진다. 마른 나뭇잎을 하나 둘 버리면서 겨울나기를 준비하는 나무는 허장성세에 길들여진 우리의 부박함을 꾸짖는 듯하다. 여름이 지나면 가을이 오고 가을이 가면 겨울이 온다. 역사의 겨울이 되면 우리는 별 수 없이 하늘 앞에 우리의 실상을 남김없이 드러내게 된다. 때가 가까웠다. 행여 예수 정신이라는 밑절미가 무너진 교회의 모습을 만천하에 드러내야 하는 부끄러운 순간이 속히 오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어 등골로 찬기가 흐른다. 우리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말씀에 일쑤 괄호를 치는 동안, 하나님의 영이 빠져나갔던 예루살렘 성전(겔10:18-19)처럼 한국 교회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시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초조하기만 하다. 처음 듣는 말씀인 것처럼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보자.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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