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새로봄:산상수훈(8) 2002년 10월 23일
작성자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기의 자녀라고 부르실 것이다.


반문명의 그림자 속에서

스산한 초가을 바람을 옷섶을 열어 맞으며 밤하늘을 우러러본다. 감나무 가지 사이로 별 몇 개가 보이고, 사위는 적막하다. 적막하기에 쓸쓸하다. 문득 유대 광야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이 떠오른다. 추위에 몸을 움츠린 채 부옇게 밝아올 아침을 기다리던 그들은 문득 감미로운 노랫소리를 들었다.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큰 평화가 그들 속에 깃들였다. 이윽고 그들은 한 소리를 분명히 들었다.


더없이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로다(눅2:14)


잠 못 이루고 감나무 밑을 서성거리던 내게 이런 노래는 들려오지 않았다. 먹장구름처럼 내 마음을 뒤덮은 것은 미국 상하 양원에서 이라크에 대한 미국의 선제공격을 승인하는 결정을 내렸다는 어처구니없는 소식이었다. 역사는 지금 퇴행하고 있다. 역사를 자유의 확대과정이라고 말한 이가 누구던가? 도대체 누구의 자유, 누구를 위한 자유란 말인가?

평화의 제전이라는 아시안 게임을 보면서 사람들은 금메달에 열광하지만, 나는 자꾸만 다른 곳에 눈길이 머문다. 아시안 게임에서 조국에 사상 첫 번째 메달을 안겨주었다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도 내일은 기약할 수 없다고 쓸쓸히 말하는 팔레스타인의 권투선수 아부케섹 모니르, 폐허로 변한 조국에 희망을 안겨주기 위해 출전한 태권도 경기에서 동메달을 따내고는 조국의 국기가 게양되는 모습을 지켜보며 눈물을 흘리던 자마니 로야와 임원들. 그들의 이름을 굳이 명토 박아 말하는 이유는 그들이야말로 역사이고 희망의 씨앗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가녀린 희망의 씨앗들은 발아해 꽃으로 피어날 것인가? 사막에 꽃이 피어 향내를 풍기리라는 예언자들의 꿈은 이루어질 것인가? 전망이 밝은 것은 아니지만 나는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는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마음에 드리우는 그늘조차 부정할 수는 없다. 문명이란 인간에게 인간의 본분이 무엇인지를 일어주는 행동 양식이라는 데, 오늘 반문명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진 지구촌의 모습이 너무나 확연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문명의 얼굴을 한 야만이 도처에서 삼킬 자를 찾고 있다. 굶주림과 질병에 시달리면서 부자의 문간에 앉아있는 나사로들의 신음소리가 도처에서 들려온다. 그 소리가 풍요의 신을 찬미하는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섞여 괴기스러운 불협화음을 이루고 있다. 세상은 안녕하신가? 그렇지 않다. 일부 과격한 테러리스트들 때문인가? 아니다. 밥이 고루 나누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나눔을 통해 열리는 평화

밥은 하늘입니다.
하늘을 혼자 못 가지듯이
밥은 서로 나눠 먹는 것
밥은 하늘입니다.
하늘의 별을 함께 보듯이
밥은 여럿이 같이 먹는 것
밥이 입으로 들어갈 때에
하늘을 몸 속에 모시는 것
밥은 하늘입니다.
아아 밥은
모두 서로 나눠 먹는 것
―김지하,「밥」전문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우선 밥을 나누어 먹을 줄 아는 사람이다. 남의 배고픈 사정을 헤아릴 줄 아는 사람이라야 참 사람이다. 하늘에서 내린 만나를 다른 이들의 몫으로 남겨 놓는 마음(출16:21), 배가 고파도 다른 지체들을 위해 기다려 줄줄 아는 마음(고전11:33), 산 짐승들의 겨울나기를 위해 밤과 도토리를 남겨두는 마음, 바로 그것이 하늘의 마음이고 평화의 문을 여는 마음이다.

또 다시 문제는 욕망이다. 동양의 아귀(餓鬼)와 서양의 에리직톤이 공모하여 무저갱의 문을 열었음인가? 사람들은 '더 많이', '더 빨리', '더 편리하게', '더 화끈하게'를 외치며 거리를 달린다. 정치인, 문화인, 종교인 할 것 없이 세상의 속도전에 내몰리고 있다. 사람의 마음은 어느 결에 경마장이 되어 앞을 다투는 말들이 일으키는 소음과 먼지로 어지럽다. 그래서인가? 파시스트적인 속도에 어질머리를 느끼는 사람들은 평화와 느림을 갈구한다. 그런데 문제는 '평화'와 '느림'조차 자본주의 시장의 인기상품으로 생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달라이 라마와 틱낫한의 책이 불티나듯 팔리고, 영성에 관련된 프로그램들이 상한가를 기록하고 있다. 물론 그들이 제공하는 한 방울의 생수를 따라 평화의 근원으로 소급해갈 수도 있다. 하지만 '돈'(資)이 '본'(本)이 되는 세상의 질서에 순응하면서 그 길을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돈'과 '힘'이 지배하는 세상에 평화는 없다. 뒤집힌 '본'(本)과 '말'(末)의 관계가 다시 뒤집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좋은 방법은 나눔의 실천이다. 히브리의 지혜자는 "가난한 사람을 조롱하는 것은 그를 지으신 분을 모욕하는 것"(잠17:5)이라 했다. 예수는 배고픈 사람을 먹이고, 목마른 사람에게 물을 주고, 헐벗은 사람을 입히는 것이 곧 당신을 영접함이라고 말했다. 길게 말할 것 없다. 자기를 내어줄 줄 아는 사람이라야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다.

그들은 '가진 것'을 나누는 데 그치지 않고, 평화를 위한 행동에 '자기'를 바친다. 때로는 폭력에 대항하기 위해 시련을 겪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폭력을 수단으로 택하지 않는다. 폭력을 수단으로 택하는 순간 패배는 기정사실이 됨을 알기 때문이다. 원수조차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과 실천, 아힘사(不殺生)와 사티하그라하(眞理把持)를 굳게 붙잡고 있던 간디의 실천은 어리석어 보인다. 하지만 그 어리석음 속에 세상 변혁의 뇌관이 내장되어 있음을 우리는 보았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이미 본 사람들이었고 믿음의 사람들이었다. 미움보다는 사랑이, 정죄보다는 용서가, 폭력보다는 비폭력이, 어둠보다는 빛이 더 근원적인 것임을 믿었기에 그들은 폭력적인 현실 속에서도 자기를 잃지 않을 수 있었다. 신앙적 낙관주의에 뿌리를 내리지 않은 평화의 기도(企圖)는 지속성을 띠기 어렵다. 들끓고 있는 덧없는 사념들이 고요해지고, 눈에 보이진 않지만 지고하신 하나님이 곁에 머무심을 분명히 느낄 때 우리는 스며드는 듯한 평화를 맛보게 되고, 그 맛에 사로잡힌 자라야 세상에서 평화를 이룰 수 있다. 하지만 그는 '내가 평화를 이룬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다만 하나의 계기에 지나지 않음을 알기에 설사 자기를 통해 평화가 이루어졌다 해도 그것에 자기의 이름을 붙이려 하지 않고, 그 일을 성취하신 이에게 감사드린다. 그가 사람들 속에 감추어져있는 사랑과 따뜻함을 불러낼 수 있는 것은 자기의 욕망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단언할 수 있다. 힘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평화는 없다. 힘으로 사람들을 굴복시킬 수도 있고, 자기들의 의사를 관철시킬 수도 있다. 압도적인 힘에 근거해 주변을 복속시켰던 팍스 로마나, 또 지금 미국이 기도하고 있는 팍스 아메리카나는 허구의 신화에 불과하다. 그것은 영적인 바벨론이고, 무너질 수밖에 없는 바벨탑이다. 진정한 평화는 나눔과 섬김, 그리고 사랑과 희생을 통해 이룩될 수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평화를 믿는다. 평화의 조짐이 보이지 않아 애타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우리는 낙심하지 않는다. 그분이 시작하셨으니 그분이 완성하실 것임을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헤아리고 낙심하라고 보냄을 받은 것이 아니라, 평화의 씨앗을 심으라고 보냄을 받았다. 세상이 비웃는다 해도 무슨 상관인가. 수피교도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시사해주는 바가 많다.


한 여인이 꿈을 꾸었는데 시장에 가서 새로 문을 연 가게에 들어갔다. 그 가게 주인은 다름아닌 신이었다. 무엇을 파느냐고 묻자 신은 "당신의 가슴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팝니다"라고 대답했다. 여인은 인간이 바랄 수 있는 최고의 것을 사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말했다. "마음의 평화와 사랑과 행복과 지혜, 그리고 두려움으로부터의 자유를 주세요." 신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가게를 잘못 찾으신 것 같군요, 부인. 이 가게에선 열매를 팔지 않습니다. 오직 씨앗만을 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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