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새로봄: 산상수훈(7) 2002년 09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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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 이렇게 써놓고 보니 갑자기 머리가 텅 빈 것 같다. 어떤 말도, 어떤 사람도 떠오르지 않는다. 다만 오예에 찌든 나의 영혼이 홍수에 떠밀려 온 부유물처럼 너절하구나 하는 생각뿐이다. 북한산에서 내려오다가 잠시 멈춰서 바라본 능선 위의 하늘, 그 서러운 쪽빛이 문득 떠오른다. 왜 그 쪽빛 하늘을 보며 서럽다는 느낌이 들었을까? 마땅히 있어야 할 곳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나왔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그때 나는 사람들이 산을 찾는 것은 어쩌면 자기 마음을 찾기 위해서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가쁜 숨을 내쉬며 달려온 나날은 청정했던 본래의 마음에 욕망의 더께를 입히지 않았는가. 닦아야 한다. 마음을 닦지 않고는 하늘을 볼 수도 없고, 담아낼 수도 없다. 스물 네 살의 윤동주는「참회록」이라는 시에서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부끄러워하며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고 다짐한다.

마음 닦음, 그것은 우선 반성에서 비롯된다. 반성이란 자기 행위를 거울에 비추어보는 것이다. 돈벌이에 생을 건 사람은 이익이라는 거울 앞에 자기를 세운다. 권력에 중독된 사람은 지배의 거울 앞에 자기를 세운다. 자아에 사로잡힌 이들은 공명심의 거울 앞에 서기를 좋아한다. 모습은 달라도 그들은 한 뿌리에서 나왔다. 그들의 시조는 '나르시스'이다. 그들은 자아라는 폐쇄회로 속에서 배회할 뿐 자기 밖으로는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한다. 참된 반성이란 주체가 본래의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가는 과정이다. "내가 반성 속에서 나에게 되돌아가는 것은 사사로운 나를 버리고 '누구의 나에게도 통할 수 있는 참 나', 즉 보편적 자아, 보편적 주체성으로서의 참된 나를 찾기 위해서이다."(김상봉, 『나르시스의 꿈』, 313쪽) 역설적이지만 자기를 버릴 때 자기에게 돌아가는 길이 열린다. 애굽에서 가져온 음식이 끊어졌을 때 하늘의 만나가 내린 것과 같은 이치이다. 하지만 자기를 버린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나로부터의 탈주

유충들은 몇 번의 허물벗기를 통해 나비가 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사사로운 자아로부터 벗어나 참된 자기를 찾으려는 사람은 자아라는 두꺼운 허물을 벗고 또 벗어야 한다. 자아의 허물벗기, 그것은 '너'를 보살피고 섬기기 위해 '나'로부터 탈주를 감행할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하지만 자아는 탈주하려는 몸과 마음을 중력보다 더 강한 힘으로 잡아채 욕망의 구덩이에 처박아 버린다. 강도 만난 사람을 보면서도 그저 지나친 제사장과 레위인들은 자아의 중력에서 벗어나지 못한 가련한 자들이다. 넘어지고 또 넘어져도 거듭거듭 탈주를 감행하면서 우리 영혼은 튼실한 근육을 얻게 된다. 욕망의 인력을 벗어나 '너'에게로 갈 수 있는 힘은 그처럼 노력하는 자에게 주어진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사람은 기쁨으로 단을 가지고 돌아온다"(시126:6) 하지 않던가. 사랑은 '너' 속에서 '나'를 포기하는 용기이다. 울면서라도 그 길을 가는 사람은 조금씩 맑아지게 마련이다.

하지만 사랑 속에서 나를 온전히 연소시키지 못하면 그을음이 남게 된다. 격정과 분노가 그것이다. 나의 진정을 진정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않는 이들에 대한 분노와 서운함은 우리 영혼에 돋아나던 날갯죽지를 부러뜨린다.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투덜거리고, 악한 자들이 너무 많다고 비분강개하다보면 영혼은 무거워져 더 이상 날 수 없다. 짙은 구름이 비로 쏟아져 내리듯 보상을 바라는 마음이 덧쌓이면 우리 마음은 추락한다. 예수께서 "네가 점심이나 만찬을 베풀 때에, 네 친구나 네 형제나 네 친척과 부유한 이웃 사람들을 부르지 말아라. 그렇게 하면 그들도 너를 도로 초대하여 네게 되갚아, 네 은공이 없어질 것이다"(눅14:12) 하신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위해 한 좋은 일은 하나님께 드리는 소중한 예물이다. 우리의 행동 하나 하나를 하나님께 바치는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우리 삶은 조금씩 깨끗해질 것이다. 금알갱이를 얻으려고 강가에 앉아 모래를 거르는 사람처럼, 섬김과 사랑의 수고와 평화 만들기의 체로 일상을 거르는 사람들은 자기 속에 있는 보화를 보게 될 것이다.


눈물을 주소서

그러나 아무리 반성의 입김을 쐬고 행위의 행주로 닦아보아도 지워지지 않는 더러움이 있다. 독실한 바리새인 사울을 괴롭혔던 그 부박한 실존의 한계, 벗겨지지 않는 비늘, 뛰어난 수사학자 어거스틴을 절망케 했던 존재의 어둠, 경건한 수사 루터를 놓아주지 않던 그 두려움, 인류의 가슴에 새겨져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가인의 표…죄의 더러움은 씻겨지지 않는다. 그 어쩔 수 없는 한계에 부딪친 사람들은 울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눈물이, 그 애태움이 인간을 정화한다. 눈물은 무방비상태임을 드러낸다. 눈물은 돌처럼 굳어진 마음을 녹여 부드럽게 만든다.


―눈물을 주소서―
오늘의 우리는 눈물이 다 말랐습니다. 눈물 없는 곳에 못된 것들만 무성하여 있습니다. 눈물은 살균력(殺菌力)이 있습니다. 원망, 불평, 이기(利己) 등은 전염병균과 같아서 자신을 죽이고, 또 남의 가슴에 살촉을 박아 죽게 하는 악독한 병균입니다.
이 모든 균들은 눈물로써 죽일 수 있습니다. 동정의 눈물이 쏟아질 때, 뜨거운 사랑의 눈물이 쏟아질 때, 남을 원망하는 것이나 시기, 불평, 이기행위 등, 모든 불선(不善)의 병균은 다 죽어 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따스하고 온유하고 미쁜 새 마음을 내어 줍니다. 마치 상처의 소독을 한 후에 새 살이 돋아 나오듯이!
―이용도, 「눈물을 주소서」부분


다윗은 밤마다 침상을 눈물로 적셨다. 예레미야는 무너지고 있는 나라를 바라보며 눈물로 지새웠다. 막달라 마리아는 눈물로 주님의 발을 적셨다. 베드로는 새벽 닭울음소리에 통곡의 눈물을 흘렸다. 바울은 성도들이 십자가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눈물로 기도했다. 이들이 흘린 눈물이 성경을 관통하여 예수의 눈물과 합류한다. 예언자들을 죽이고 평화의 길을 알지 못하는 예루살렘을 보며 울고, 벗 나사로의 무덤 앞에 서서 흘리던 그 눈물과 말이다. 그 눈물이 강이 되어 사람들의 더러운 것을 씻기고 무덤을 가로막은 돌문을 녹이고 죽어가는 생명을 되살린다.

그런데 세상을 위해 흘린 예수의 눈물의 결정은 십자가이다. 인간의 무자비한 폭력성과 한없는 고귀함이 결합된 모순의 자리, 그곳에서 흘린 예수의 피는 하나님의 눈물이다. '나'를 위해 흘리는 하나님의 눈물은 우리 속의 더러운 것들을 닦아낸다. 손으로 발로 닦아도 지워지지 않던 어둠의 더께를 흔적도 없이 지운다. 그리고 청신한 아침 햇살 같은 기쁨을 안겨준다. 그 기쁨 속에서 새로운 영혼이 탄생한다. 과도하고 이지러진 욕망을 여읜 영혼, 자신의 본질과 하나된 영혼,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투명하게 드러내는 영혼, 깨끗한 영혼이 태어난다. 그는 돈과 권세 그리고 명예가 아침 햇살에 속절없이 스러지는 안개임을 안다. 그렇기는 그는 오직 하나만을 구한다. 하나님!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가?

그는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을 영혼의 눈으로 본다. 세상이 온통 하나님으로 충만함을 본다. 무심코 피어나는 들의 꽃, 공중을 나는 새들, 흔들리는 갈대, 이웃의 기쁨과 슬픔 그리고 눈물 속에서도 하나님을 본다. 때로는 흐뭇하게 웃는 하나님의 얼굴을, 때로는 시름에 잠겨 울고 계신 하나님을. 그는 하나님이 웃으실 때 함께 웃고, 하나님이 우실 때 함께 운다. 그는 하나님과의 깊은 일치 속에서 살아간다. "나의 것은 모두 아버지의 것이고, 아버지의 것은 모두 나의 것입니다"(요17:10b). 예수의 이 말은 마음이 깨끗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빌립이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하고 부탁했을 때 예수는 제자의 무지를 안타까워하며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다."(요14:9) 우리 신앙생활의 목표는 바로 이 말을 하는 데 있다. 신앙생활이란 우리의 삶이, 그리고 존재가 그분을 온새미로 드러내는 데까지 맑아지고 깊어지고 넓어지기를 기도(祈禱)하고, 전심으로 기도(企圖)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마음은 아직도 어둡다. 하여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음성으로 노래한다.


신이여, 깨어 있는 사람들은
매일 밤 언제나 그렇습니다.
끝없이 걸어가지만 당신을 찾지 못합니다.
그들이 장님의 발걸음으로
어둠을 밟는 소리가 들립니까?
달팽이처럼 아래로 나 있는 계단 위에서
그들이 기도하는 소리가 들립니까?
검은 돌 위로 쓰러지는 소리가 들립니까?
당신은 그들이 우는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울고 있으니까요.

(김기석 목사 ∥ 청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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