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태풍 루사의 물음 2002년 09월 0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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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 루사의 물음

페르시아의 왕 크세르크세스는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헬레스폰토스의 다리 공사를 벌이고 있었다. 헬라스를 침략하기 위한 전략의 일환이었다. 그것은 아주 힘겨운 공사였는데, 공사가 끝나 다리가 개통되자마자 폭풍이 불어와 막 완성된 다리가 모두 파괴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크세르크세스는 헬레스폰토스에 대해 크게 노하여, 가신들에게 바다에 대해 300대의 채찍형을 가하고 또한 족쇄 한 쌍을 바다 속으로 던져 넣으라고 명했다. 크세르크세스는 채찍형 집행인에게 명하여 다음과 같은 야만스럽고 불손한 말과 함께 바다에 대해 채찍형을 가하게 했다고 한다.

"이 짜고 쓴 물 놈아, 너의 주인님께서 네게 이런 벌을 가하게 하셨다. 너의 주인님께서는 너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으셨는데, 네놈 쪽에서 먼저 주인님께 활을 당겼기 때문이다."(헤로도토스의 『역사』제7권 중에서)

태풍 루사가 지나간 자리에 남은 것은 폐허와 실의에 잠긴 이들의 한숨뿐이었다. 망연자실 하늘을 바라보지만 하늘은 무심하기만 하다. 天地不仁이라더니 참으로 야속하고 무정도 하다. 크세르크세스처럼 채찍을 들어 태풍을 쳐야 할까? 하지만 현대인들은 그렇게 무지하지도 무모하지도 않다. 압도적인 재해 앞에서 우리는 그저 우리의 작음을 절감할 뿐이다. 그래도 인간은 참 위대하다. 마음에 쌓인 절망감을 도려내고, 수마가 할퀴고 지나간 삶의 터전에서 그 아픔의 흔적들을 걷어내고, 새 삶의 터전을 닦고 있으니 말이다. 팔을 걷어붙이고 복구작업에 동참하는 갸륵한 마음들이 참 아름답다. 땀에 젖은 얼굴도 아름답고, 온 몸에 묻은 진흙조차도 아름답다. 사람은 보살핌을 통해 사람이 된단다. '너'의 아픔에 공감할 줄 알아야 사람이다.

그런데 생각할수록 기가 막힌 것은 사람들이 내놓는 맹랑한 말들이다. 억울해도 하소연할 길이 없으니 희생양을 찾는 것은 인지상정이라 하겠지만, 그래도 자기들의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함부로 말을 내놓는 이들이 있다. 이 재해의 책임은 정치인 아무개에게 있다는 말이 그 중의 하나이다. 종교적인 편견에 바탕을 둔 해석은 차마 여기서 언급할 수도 없다. 너무도 부끄러운 말이기 때문이다.

빌라도가 많은 갈릴리 사람들을 살해했을 때, 그리고 실로암 탑이 무너져 열 여덟 명이 치여 죽었을 때, 민심은 흉흉했다. 그리고 그렇게 희생된 사람들은 뭔가 죄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사람들 사이에 암암리에 퍼지고 있었다. 그때 예수님은 단호히 '아니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하신 말씀은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눅13:3)였다. 그들의 불행을 그들의 탓으로 돌릴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삶을 돌아보는 거울로 삼아야 한다는 말씀이겠다.

지구가 앓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이 앓고 계시다. 왜? 우리가 암덩어리이기 때문이다. "피둥피둥 회충떼처럼 불어나며/이리저리 힘차게 회오리치는/온몸이 혓바닥뿐인 벌건 욕망들"(최승호, <몸> 부분). 인정하기 싫지만 이게 우리의 현실태이다. '더 빨리, 더 많이, 더 편리하게'를 행복의 조건으로 생각하고 살아가는 우리들이야말로 루사의 매트릭스이다. 지금 우리 삶을 바꾸지 않으면 루사는 또 온다. 그 거대한 공포를 바라보면서 욕망을 절제하는 것, 그것은 거룩한 삶의 이정표요, 샬롬의 세상을 향한 출발이다. 루사는 묻는다. '이제 어떻게 살 텐가?' 우리는 이제 삶으로 대답해야 한다. (김기석 목사 ∥ 청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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