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새로봄: 산상수훈(6) 2002년 08월 13일
작성자
자비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비롭게 대하실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

사흘을 굶은 소년의 눈에 보인 것은 가판에 먹음직하게 놓여있는 찐빵이었다. 그는 허겁지겁 그 빵을 집어 입에 넣었다. 도덕감이나 두려움은 작동하지 않았다. 그때 주인은 재빨리 달려나와 소년의 뺨을 후려치며, 손가락을 넣어 소년의 입에서 빵을 빼내 땅에 버렸다. 소년은 입안에 고인 군침을 눈물과 함께 삼켰다. 그리고 소년은 자라 작은 공장의 사장이 되었고, 지금은 불우한 노인들에게 매일 점심을 대접한다. 배고픔의 고통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사람은 성자가 될 수도 있고, 악마가 될 수도 있다. 지존파를 결성했던 청년들은 자기들의 파탄을 사회의 책임으로 전가했다. 그런데 청계천에서 막노동으로 살아가는 또래의 청년은 그들은 자기 삶을 낭비한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같은 조건 속에서도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는 말과 함께.

사람은 삶의 조건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지만, 그런 삶의 조건을 대하는 태도는 자유롭게 택할 수 있다. 여기에 인간 존엄성의 뿌리가 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기독교의 가르침을 노예의 도덕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미운 놈 미워하고, 싫은 놈 싫어하며 사는 것이 사람답다고 말한다. 은결든 마음을 숨긴 채 어색한 미소를 짓고 살지 말고, 자기 감정에 솔직하라고 우리를 죄어친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그것은 사람답다는 말의 퇴행적 남용이 아닐까? 사람이 가장 사람다울 때가 언제일까? 이런 물음에 대한 대답은 어렵다. 딱히 정답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자기 나름의 편견을 드러내보일 용기를 내야 한다. '생각 없음', 혹은 '입장 없음' 보다는 자기의 편견을 드러내보임이 정직할 때가 있다.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면 질정(叱正)의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용기를 내서 말한다.

사람이 가장 사람다울 때는 누군가를 돌보고 있을 때이다. 아기를 품에 안고 젖을 물린 어머니의 모습은 아름답다. 신음하는 환자의 손을 잡고 안타까워하는 가족들의 모습은 거룩하기까지 하다. 그 속에는 어떤 삿된 것도 없기 때문이다. 배고픈 나그네를 위해 밥상을 차리는 사람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세계의 문이 열리고 있음을 본다. 마더 테레사는 캘커타 거리에서 죽어가는 한 환자를 데려다가 그가 평안히 임종하도록 돌보아 주었던 경험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세상에 대한 원망에 가득 차 있던 그는 점차 표정이 풀렸고 결국에는 따뜻한 미소로 테레사를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한다. 자기 삶과 화해를 이룬 것이다. 테레사는 그의 미소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이라 했다. 값없이 주어지는 사랑만이 사람 속에 잠들어있는 아름다움의 꽃을 피워낸다. 그는 겨울 같은 세상에 봄을 전하는 전령들이다. 자비의 눈으로 사람과 세상을 보면서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려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불행을 약탈하려는 강박적인 욕구'(파스칼 브뤼크네르)에 사로잡힌 환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사람다운 사람일뿐이다.

현대인들의 불행은 공감의 능력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불행들을 실시간으로 접하며 살아간다. 그때마다 영혼이 상처를 입는다면 살아갈 수 없음을 잘 알기에 우리는 방어기제를 만들어낸다. 냉담함이 그것이다. 그것은 더 이상 세상의 불행에 의해 상처입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그러나 그 순간 우리는 '자기'라는 폐쇄회로 속에 확고히 갇혀버리고 만다. 달빛조차 비치지 않는 어두운 내면 속에서, 욕망의 곰팡내에 진저리를 치며, 가시지 않는 목마름에 쫓겨 어딘지도 모를 곳을 향해 질주한다. 아무도 서로를 향해 걷지 않는 쟈코메티의 조각작품 '광장'의 인물들처럼, 우리는 어딘가를 향해 가지만 누구를 향해 가지는 않는다. 모두가 그렇다는 말은 물론 아니다. 우리 시대의 보편적인 정신이 그렇다는 말이다. 사랑의 담론은 넘치지만, 그 방향은 자기를 향해 있기 일쑤이다.

그 오징어 부부는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부둥켜안고 서로 목을 조르는 버릇이 있다
―최승호, 「오징어·3」 전문


자비한 사람은 복이 있다

자비한 사람은 봄의 도래를 알리는 전령이다. 햇살은 부드럽고, 눈석임물이 계곡을 질주하고, 연초록색 잎들이 돋아나고, 새들은 하늘을 날아 누비고, 꽃망울 터지는 소리에 사람들의 닫힌 가슴 절로 열릴 때, 우리는 흥겨워진다. 자비한 사람은 여름의 무성함과 가을의 조락과 겨울의 한기를 모르지 않지만 그럼에도 가슴에 봄을 간직한 채 살아간다. 그와 만난 이는 누구나 영혼의 깊은 겨울잠에서 깨어나 살아있음을 경축한다.

자비한 사람은 그래서 예수를 닮은 사람이다. '예수는 모든 사람을 시인이게 하는 시인'이라 한 것이 칼릴 지브란이던가? 예수와 만난 이들, 가슴으로 만난 이들, 존재 전체로 만난 이들은 봄이 되었다. 시몬이 베드로가 되고, 창녀는 성녀가 되었다. 자기를 살라 사랑의 불을 지피는 예수와 만난 사람은 자기 속에 있는 아름다운 꽃과 만났다. 어쩌면 첫 만남이었는지 모른다. 진정한 사랑은 겨울에도 꽃을 피운다.

프란치스꼬와 글라라는 아주 신성한 우정을 나누고 있었지만, 사람들은 이들의 관계에 대해 불순한 말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프란치스꼬는 어느 날 글라라를 불러 잠시 떨어져 있어야 하겠다고 말했다. 한참을 침묵하고 있던 글라라는 힘겹게 말을 꺼냈다. "사부님, 우리가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여름이 다시 와서 장미꽃들이 필 때"라고 프란치스꼬가 대답했다. 그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눈으로 덮인 산야에 별안간 오색 꽃들이 수천 송이 피어나는 것 같았다. 글라라는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곧 허리를 굽혀 장미꽃 다발을 만들어서는 프란치스꼬에게 주었다.

이 이야기에서 울려나는 원초적 언어를 듣는가? 사랑이 있는 곳에 꽃은 피어난다. 세상이 알 수 없는 적대감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은가? 거리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의 눈빛이 사납다고 느끼는가? 그렇다면 눈빛을 순후하게 하고 다시 한번 바라보라. 세상에 있는 모든 생명들은 모딜리아니의 목긴 여인들처럼 사랑에 목말라하고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우리가 쓰고 있는 가면을 한 겹만 벗겨내면 거기 사랑에 굶주려 파리해진 존재가 있다. 싸늘한 눈빛, 정감없는 말씨, 거부하는 몸짓에 지레 주눅들어 피어보지도 못한 채 안으로만 움츠리고 있는 '꽃'이 있다. 봄을 기다리고 있는 '꽃' 말이다.

자비한 사람은 늘 아파하는 사람이다. 그는 미군 장갑차에 깔려죽은 여중생들 때문에 울고, 수해를 만난 이웃들 때문에 운다. 가속화되는 무기경쟁을 보며 울고, 서로를 깎아내리지 못해 안달인 정치인들을 보며 운다. 외로움과 죄의식에 갇혀 살고 있는 이들 때문에 울고, 허리를 절단 당하는 북한산의 아픔 때문에 운다. 그저 울기만 하나? 아니다. 자비한 사람은 그런 현실을 바로잡기 위해 자기를 역사의 제단 위에 제물로 내놓는다. 스스로 제물이 되어 자신을 바치신 대제사장 예수처럼. 그는 언제까지라도 아픔을 겪는 이들 곁에 머물면서, 그 아픔을 함께 견디고, 그 더디고 지난한 개화의 과정을 말없이 지켜보며, 때로는 그를 지키기 위해 투쟁한다. 그는 결코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다른 이들의 목을 조르지 않는다. 세상에는 자기의 생각으로, 권위로, 삶의 방식으로, 종교적 신념으로 다른 이의 목을 조르는 이들이 참 많다. 혹시 나도 그 중의 하나가 아닐까 돌아볼 일이다. 숨이 막혀 버둥거리는 사람에게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보다 더 악마적인 일이 또 있을까?

자비한 사람은 지옥 같은 세상살이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생명의 기억을 일깨우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일깨우는 사람이다. 그리하여 인생의 창세기를 새롭게 쓰도록 하는 사람이다.

지옥에 청정한
나무 한 그루만
잎새 하나만 있다면
그것은 하늘
생명의 기억,
나무처럼 잎새처럼
팔을 벌리고
창세기를
창세기를
다시 시작하리라.
―김지하, 「지옥에」 전문


하나님이 그들을 자비롭게 대하실 것이다

자비한 사람은 복이 있다. 사람들 속에서 피어나는 꽃을 보는 것보다 더 큰복이 있겠는가? 피조물들의 신음소리가 찬미로 바뀌는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는 것보다 더 큰복이 있겠는가? 자비한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자비한 마음으로 세상과 만나는 것보다 더 큰복이 있겠는가? 하지만 자비한 이들에게는 더 큰복이 남아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비롭게 대하시는 복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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