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새로봄: 산상수훈(5) 2002년 08월 13일
작성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배부를 것이다.


"지난 해 동안 잘 버텨주던 화초가 드디어 완전히 말라죽었습니다.
화분에 새 화초를 심으려고 죽은 화초를 뽑아냈습니다. 그런데…놀랍게도 화분은 죽은 화초의 뿌리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말 없던 저 작은 생명이 살고자, 살아 남고자 화분의 흙과 물을 다 먹고 몸부림친 것이었습니다.
진심으로 미안합니다. 生命에게."


기독교환경운동연대가 발행하는 소식지에 나오는 '거친돌'씨의 반성문이다. 이 반성문을 대하는 순간, 목이 말랐다. 물병을 더듬어 물 한 모금을 삼키고 나니 또 죄스러웠다. 우리 사는 꼴이 늘 이 모양이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물과 필요한 양분을 찾아 힘을 다해 흙을 더듬는 뿌리의 욕망은 매우 근원적이다. 청마는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을 통해 '소리 없는 아우성'을 들었지만 우리는 물을 찾는 뿌리의 안간힘을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 듣는다. 햇빛을 향해 일제히 고개를 돌리는 여린 잎들의 아우성도 마찬가지이다. 세상은 '나는 목마르다'는 외침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런데 이성적 존재라는 사람의 목마름은 너무나 근원적이어서 한 잔의 물로는 해갈되지 않는다. 햇빛 속에 있어도, 그늘 속에 있어도 마찬가지이다. 코헬렛은 "모든 강물은 바다로 흘러가도, 바다는 넘치지 않는다"(전1:7) 했다. 넘치지 않는 바다처럼 우리 속의 목마름은 해소될 줄 모르는 심연이다.


마땅히 있어야 할 질서

70년대 억압적인 정권 아래서 울울한 가슴을 풀길 없었던 젊은이들에게 세상은 절벽이었다.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봐도 보이는 건 모두가 돌아앉았네." 미칠 노릇이었다. 마주 봄이 생명의 본성일진대, 현실은 모두 돌아앉아 있는 것이다. 탈출구 없는 현실에 목이 타 어떤 이들은 동해바다로 고래를 잡으러 가고, 어떤 이들은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를 외쳤던 것이다. 목마름이나 주림은 결핍의 상태이다. 결핍은 불편함이고, 불쾌함이다. 그런데 예수는 주리고 목마른 자가 행복하다고 말한다. 이것은 정신적 사기 혹은 노예의 도덕을 부추김인가? 아니다. 예수는 모든 주림과 목마름이 행복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오직 주림과 목마름이 '義'에 걸릴 때에만 그것은 행복이라고 했다.

그런데 성경에서 '의'라는 말은 다양한 의미의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어서 이해하기가 매우 어렵다. '의'를 뜻하는 그리스어 '디카이오쉬네dikaiosyne'는 '디케dike'라는 말에서 왔다. 그리스 신화에서 디케는 정의의 신으로 나타난다. 그는 최고신인 제우스와 법과 규칙의 신인 테미스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사람들의 모듬살이에 꼭 필요한 미학적·윤리적 질서와 조화를 지켜내는 것을 소명으로 삼고 있다. 그는 세상에 마땅히 있어야 할(所當然) 질서와 조화를 깨뜨리는 사람을 찾아가 그를 처벌한다. 자기 한계를 지키려 하지 않는 오만(hybris)과 폴리스적 삶의 규범을 고의로 범하는 행동은 '공기의 옷을 입고 울면서 돌아다니는' 디케에 대한 초대장인 셈이다. 디케의 화해할 수 없는 적은 '폭력'이다. 물리적인 폭력뿐만 아니라, 자기가 가진 지위·지식·경험·종교를 가지고 자기 의사를 타인에게 강제하는 일체의 행동이 다 그렇다.


일상화된 폭력과 충격의 표백

따라서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은 세상에 가득 차 있는 폭력에 대해 자각하고 있는 상태이며, 그런 현실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열정에 사로잡힌 상태이다. 우리 는 폭력이 일상화된 세상에 살고 있다. 가정에서부터 사회, 심지어는 교회에서조차 폭력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있다. 그래서인가? 현대인들은 폭력에 대해 둔감하다. 이것이 무섭다. 작고한 시인 김수영의 「罪와 罰」이라는 시는 "남에게 犧牲을 당할만한/충분한 각오를 가진 사람만이/殺人을 한다"고 말하고는 둘째 연에서 전혀 엉뚱한 상황을 그려보인다.

그러나 우산대로
여편네를 때려눕혔을 때
우리들의 옆에서는
어린놈이 울었고
비오는 거리에는
四十명가량의 醉客들이
모여들었고
집에 돌아와서
제일 마음에 꺼리는 것이
아는 사람이
이 캄캄한 犯行의 現場을
보았는가 하는 일이었다.
―아니 그보다도 먼저
아까운 것이
지우산을 現場에 버리고 온 일이었다

의초롭던 가족끼리의 외출이 폭력으로 귀결된 이유를 우리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남편은 아내 때문에 화가 났다. 가슴속에 부글부글 들끓던 미움이 살의로까지 발전한다. 마침내 이성의 통제력이 소홀해진 틈을 타서 남편은 들고 있던 우산대로 아내를 두들겨 팬다. 아내는 질척거리는 바닥에 쓰러진다. 생급스러운 일에 놀란 아이는 울고, 술꾼들은 좋은 구경거리가 났다고 몰려든다. 그러나 첫밗의 서슬은 어디로 가고 남편은 허둥지둥 현장을 피해 달아난다. 기껏 간다는 게 집이다. 집에 가서 생각하니 슬그머니 걱정이 된다. 아내나 자식에 대한 염려가 아니다. 혹시라도 몰려들었던 사람 가운데 나를 아는 사람이 있지는 않았을까? 곰곰이 기억을 더듬는데 또 다른 생각이 슬그머니 떠오른다. 아끼던 우산을 현장에 두고 왔다는 아쉬움이 그것이다.

남편에 대한 도덕적인 판단은 유보하자. 시는 도덕적인 교훈이 아니니까. 이 시는 견딜 수 없는 아픔과 두려움이 어떻게 흐릿해지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시간은 견딜 수 없는 충격조차 표백하여 견딜만한 것으로 만들어준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혹은 행하는 폭력에 우리가 어떻게 적응해가고 있는지를 시인은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세상에 만연한 폭력을 보면서도 목마르지 않다. 주문을 외워 귀신을 쫓듯 우리는 '세상은 원래 다 그러니까'라는 말로 의에 대한 주림과 목마름을 몰아낸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살아간다. 우리 속에 있는 폭력의 뿌리를 보지 않겠다는 이 도리질과 결별하지 않고는, 자신의 속물스러움에 눈뜨지 않고는 영혼의 헛헛함은 가실 수 없다. 자기 속에 깃든 폭력성의 뿌리를 거듭거듭 잘라내고, 그래도 때마다 고개를 드는 녀석을 바라보며 하나님 앞에 엎드려 '어찌 해야 합니까' 절규하는 자라야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라 할 것이고, 그런 이라야 신의 성찬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행위가 완전한 사람이 아니라 옳음에 대한 목마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하나님은 '옳다' 인정하신다. 이것이 우리가 경험하는 신적 배부름이다.


이중적인 책임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그에게 부여된 이중적인 책임을 회피하지 않는다. 하나님 앞에서의 책임과 동료 인간들 사이에서의 책임이 그것이다. 우리는 강퍅해진 마음들이 활보하는 세상에서 두루 원만하여 남들과 부딪침이 없는 사람을 보면 '저 사람은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 칭찬한다. 그는 물론 착하고 좋은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그를 보고 '옳은 사람'이라 해도 좋을까? 신독愼獨을 중시하는 동양의 윤리에서 홀로 옳은 사람이 왜 없을까마는, 성경이 말하는 '옳은 사람' 즉 '의인'은 항상 마주 서 있는 사람이다. 신 앞에, 그리고 이웃 곁에. 그 속에서 의인은 마땅히 있어야 할 조화와 질서를 지키기 위해 애쓰며 살아간다. '의義'라는 한자어는 '의미'라는 뜻과 '도덕성'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하나님 앞에 바로 선 삶이야말로 의미있는 생이고, 그런 삶은 동료 이웃들과의 깊은 유대와 질서를 가능케 한다. 너의 불행이 나의 불행과 무관하지 않고, 너의 슬픔과 나의 슬픔이 만수산 드렁칡처럼 얽혀있음을 알기에 '옳은 사람'은 그 문제를 풀기 위해 늘 목마르다. 사람은 '홀로'가 아니라 '서로 함께'이기에 말이다.

'세상은 본래 난세니까', 이것은 옳은 사람의 말이 아니다. 옳은 사람은 신적 코스모스를 깨뜨리는 현실에 대해 '아니'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그보다 먼저 자기 자신을 향해 '아니'라고 말한다. 세상을 뒤덮고 있는 어둠은 본질적으로 자기 속의 어둠과 다르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다. 마땅히 그러해야 할 질서와 조화를 잃은 세상을 꿰뚫어보고, 바름을 찾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는 사람은 행복한가? 우리의 경험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려는 데, 예수님은 그렇다고 말한다. 갈림길이다. 화분 속의 뿌리는 안간힘을 다하다 물 한 방울 얻지 못한 채 타 죽고 말았다. 예수도 그랬다. 그러나 그것은 마지막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었다. 이것이 복음이다. 어느 길을 걸을 것인가? (김기석 목사 ∥ 청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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