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새로봄: 산상수훈(4) 2002년 05월 15일
작성자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땅을 차지할 것이다.


"그녀는 내게 신성한 존재이다. 그녀 앞에 나서면, 모든 욕정이 잔잔해지니 말이다. 그녀 곁에 있으면, 내 기분을 알 수가 없다. 마치 영혼이 내 모든 신경에서 거꾸로 돌아가는 듯하다. 로테에게는 자기 멜로디가 있다. 그녀는 피아노로 그 멜로디를, 천사같이 신비스런 힘으로 소박하고도 거룩하게 연주한다! 그것은 그녀가 좋아하는 가곡이다. 그 악보의 첫머리만 두드려도 내 모든 고통, 모든 혼란, 걷잡을 수 없는 괴로움이 깨끗이 사라지고 만다. (괴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있음' 자체가 하는 일

온유함을 생각하는 내게 왜 돌연 이 구절이 찾아온 것일까? "그녀 앞에 나서면, 모든 욕정이 잔잔해(진다)"는 말 때문이리라. 다른 곳에서 베르테르는 고백한다. "그녀가 나를 사랑하게 된 이후 <나>라는 인간이 얼마나 귀중한 존재가 되었는지 모른다." 이 대목만으로 보면 베르테르의 '그녀'는 적어도 상대를 열정의 포로로 만들지는 않는 것 같다. 오히려 깃들 곳을 찾아 이곳저곳 기웃거리는 욕정을 가라앉힌다. 주문을 외워서 한 일도 아니고, 탄복할만한 말솜씨로 그리 한 것도 아니다. 로테의 '있음' 자체가 한 일이다. 조금 호사스럽게 말하자면 하지 않음의 함이다. 그의 '있음'은 또한 그 앞에 마주 선 다른 존재를 귀중한 존재로 바꾸고 있다. 아무런 물리적, 정신적 강제도 없이 상대를 무장 해제하고 그의 존재를 고양시키는 이 힘, 나는 그것을 온유함이라고 생각한다.

저마다 지친 듯 권태로운 낯빛으로 걷는 사람들 틈에서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을 만나면 행복하다. 괜히 말이라도 건네고 싶다. 영악하지 않고 숫된 얼굴을 한 사람, 금방이라도 웃음을 터뜨릴 것 같은 사람, 초가 지붕 위에 떠오른 보름달처럼 원만한 미소를 짓고 있는 사람을 보면 굳어진 얼굴을 펴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상처받기 싫고, 복잡한 일에 연루되기 싫어 마음에 울타리를 치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의 벽을 허무는 여우(?)이다. 그런 이들을 만나면 마음이 넉넉해진다. 그들 속에는 머물 곳이 많기 때문이다. 그들은 세상을 넉넉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래서 각박하지 않다. 판서 오상吳祥이 시를 지었는데,


희황 적 즐거운 풍속 쓸어낸 듯 사라지니 羲皇樂俗今如掃
봄바람 술잔 사이에만 남아 있을 뿐일세. 只在春風杯酒間


상고 시대의 즐거운 풍속이 다 사라지고 비루해진 여항의 삶에 마음이 상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겨우 봄바람 맞으며 술 마시는 속에서나 그때의 즐거움을 찾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상진尙震이라는 이가 이 시를 읽더니 "말을 어찌 이리도 박절하게 하는가?" 하며 나무라고는 이렇게 고쳤다 한다.


희황 적 즐거운 풍속 지금껏 남았으니 羲皇樂俗今猶在
봄바람 술잔 사이를 살펴보게나.* 看取春風杯酒間


조삼모사朝三暮四의 고사처럼 내용은 달라진 것이 없어도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 따라 느낌은 사뭇 다르다. 상진의 눈길은 그윽하고 따뜻하다. 마치 초록 바람이 일 것 같지 않은가. 온유한 사람은 누구인가? 예수를 닮은 사람이다. 남의 눈에서 티끌을 찾으려는 욕망으로부터 자유롭고, 자기를 내세우려는 허망한 욕망의 부질없음을 아는 사람, 어둔 세상을 보고 야유하기보다는 그 속에 있는 희망의 단초를 보고 기뻐하는 사람, 투박한 갈릴리 어부의 가슴에 숨겨진 '반석'을 보는 사람, 모두가 탕녀라고 손가락질하는 여인에게서 '성녀'를 보는 사람, 자기 과시의 욕망을 버렸기에 어느 경우에나 호들갑스럽지 않은 사람, 예수는 그런 분이었다.

로테의 사랑은 베르테르를 귀중한 존재로 만들었다. 예수의 사랑은 수많은 '베르테르들'을 귀중한 존재로 만든다. 예수는 생명의 모태이고, 씨앗이 발아하는 땅 속이고, 알을 품고 있는 어미 새이다. 그 품은 지나치게 뜨겁지도 않고, 너무 차갑지도 않다. 언제부터인지 나는 목소리 큰 사람, 너무 열정적인 사람이 싫어졌다. 열정이 없는 삶의 권태로움을 모르지 않는다. 찬 샘과 같은 인격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열정적인 사람의 큰 소리는 때로 강박적이고, 지나친 열정은 폭력적임을 너무 오랫동안 경험해왔다.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내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계3:16). 라오디게아 교회가 받았던 책망 때문에 '미지근함'은 구토를 일으키는 악덕으로 취급받고 있지만 그래도 나는 미지근함을 용납하고 싶다.

어려웠던 시기, 젊은이들에게 회색분자라는 낙인은 젊음의 사망선고처럼 인식되었다. 하지만 회색을 용납하지 않는 흰색과 검은 색으로 이루어진 세상이 아름다웠던가? 과도한 열정은 충족되지 않은 부분을 남기게 마련이고, 연소되지 않고 남은 그 찌꺼기는 독성으로 변하곤 한다. 자기 확신에 가득 차서 자기와 다른 이들을 용납하지 못하는 정신의 파시즘은 우리 생활 곳곳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어떤 대상에 대한 탐욕적 집착, 질서에 대한 과도한 욕구, 이념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심, 종교적인 독선과 오만 등 가장 집요하면서도 선명해 보이는 이런 것들이 세상을 얼마나 음산하게 만들었던가. 그 속에서 생명은 질식할 뿐이다.


하류는 위대하다

시인 고은은 "하류는 위대하다"고 했다. 왜 상류가 아니고 하류인가? 물론 하류는 상류에 비해 탁하다. 이런 저런 지천과 합류하면서 온갖 잡다한 것들을 받아들여 자기 속에 품기 때문이다. 눈물의 실개천이 합류하고, 절망의 샛강이 흘러들고, 어둠 속에서 몰래 방류된 욕망이 흘러들어 유장한 흐름을 만든다. 상류가 맞갖잖게 여기는 탁한 물줄기조차 슬그머니 기어 들어와 한 몸으로 뒤섞인다. 누구도 남보다 앞서기 위해 경쟁하지 않고, 허영을 위한 자기 치장에 열을 올리지 않기에 하류는 편안하다. 남을 위한 여백이 많다. 큰 네모에는 각이 없다는 말이 있듯이 하류는 다른 이들과 예각을 이루는 직선의 사람보다는 둔각을 이루어 조화와 편안함을 만드는 곡선의 사람이 많다. 그런데 하류는 왜 위대한가? 온갖 잡것들이 흘러 들어와 혼탁해진 것 자체가 위대함은 아닐 터이다. 하류의 위대함은 바다에 가깝다는 사실에서 찾아야 한다. 자기를 흐르게 한 것이 바다임을 아는 하류만이 위대하다.

이제 비유를 거두자. 스스로 깨끗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다른 이들과 섞이려 하지 않는다. 어떻게든 그들과 자기를 구분함으로 우월적 지위를 확보하려 한다. 하지만 의인/죄인, 유대인/이방인, 남자/여자, 거룩함/속됨, 정결/부정, 신자/비신자를 구별하려는 집요한 노력에 찬물을 끼얹으면서, 그들 사이에 난 틈을 사랑으로 메우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다. 그러니 예수가 기득권자들의 눈에 '하류'의 사람으로 비추어졌을 것은 불문가지다. 하지만 그는 결코 더럽혀지지 않았다. 자기 속에 온갖 더러운 것들을 발효시키고, 곰삭히는 효모를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전이었다. 그가 격정 속에서 자기를 잃지 않고, 과도한 열정으로 다른 이들을 질식시키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자기를 위해서는 아무 것도 구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 나라만을 구했기 때문이다. 때로 예수가 과격해 보일 때도 있다. 그는 음탕하고, 희망이 없는 세계에 불을 던지러 왔다고 고백했고, 수면에 비친 자기 영상에 취해 있는 이들을 깨우기 위해 수면을 흐트러뜨리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깊이 취해있는 자들에게는 어정쩡한 애정보다는 충격이 필요함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온유하다. 그 모든 행위가 자기와 대면하고 있는 이들 속에 참 생명을 낳아주기 위한 몸짓이었으니 말이다.


설 땅이 되어주는 사람들

"온유한 사람이 땅을 차지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약속이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사람은 다른 이들을 위한 여백을 만들며 사는 사람이라는 말이겠다. 한 걸음 더 나아가면 다른 이들의 설 땅이 되어주는 사람들이야말로 하나님의 나라에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는 말이 아닐까 싶다. 아, 이 말씀 명료하기도 하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제 살 궁리만 하고, 남을 궁지로 몰아넣는 사람들은 좀 정신을 차려야겠다. 천국 가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무력해서 땅에서 내몰리고 있는 사람들의 설 땅이 되어주어야 한다.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이들의 손과 발이 되고, 말 못하는 이들의 입이 되고, 보지 못하는 이들의 눈이 되는 것, 그럴 힘이 없다면 그들 곁에 머물면서 기막힌 사연이라도 들어주는 것, 그것이 천국 가는 길이다.

차가운 담백함을 지니면서도 봄바람 같은 마음을 간직한 사람, 골기骨氣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품이 넉넉하여 다가온 사람과 흉금을 트고 지내는 사람, 뭔가를 한다고 주장하는 법이 없지만 그가 지나간 자리마다 새 생명이 움트게 하는 사람, 있음만으로도 세상을 훈훈하게 만드는 사람, 그가 땅을 차지할 온유한 사람이 아닌가? 그런데 나는? 그리고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김기석 목사 ∥ 청파교회)











* 정민 교수의 『한시미학산책』을 참조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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