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공지영의 수도원 기행>> 읽기 2002년 05월 0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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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영의 『수도원 기행』 읽기


그런데 내가 이미 도착한 당신 안에서 나는 당신을 찾기 위해 얼마나 더 가야 합니까! 나의 하느님, 다른 이는 아무도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내가 여쭐 수 있는 이는 오직 당신뿐입니다. 이 지상에 있는 어느 누구도 당신의 빛 속에서, 즉 당신의 어둠 속에서 길을 잃고 쩔쩔매고 있는 나를 이 구름 속으로 데리고 올 수가 없습니다.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당신의 기쁨인 고뇌를, 당신의 소유인 상실을, 당신께 도달함인 만사로부터의 격리를, 당신 안의 출생인 죽음을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그 어느 것도 내 스스로는 알지 못하며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내가 이것이 끝나기를 바란다는 것―이것이 시작되기를 바란다는 것―뿐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만사를 모순되게 하셨습니다. 당신은 나를 무인지(無人地)에 버려두셨습니다.
―토머스 머턴, 『칠층산』중에서


1.
밝은 대낮에도 깊은 우물에는 별이 비친다 한다. 그 아스라한 깊이, 어두워 적막한 그곳에 별이 떠있다. 이때 우물은 하늘이 된다. 사람들은 누구나 가슴속에 우물 하나를 간직하고 있다. 그런데 그 우물에 문제가 생겼다. 더 이상 하늘의 별이 보이지 않게 된 것이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우물은 온갖 오물로 가득 차 있고, 샘물은 더 이상 솟아오르지 않는다. 살아있는 것이라고는 장구벌레의 춤뿐이다. 변신을 기다리는 음습한 욕망 말이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나? 어둠과 고요함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닌가싶다. 밤이 되어도 도시의 불빛은 꺼지지 않는다. 소음은 우리 존재의 조건인양 확고히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지난 시절 등화관제로 도시가 온통 어둠에 잠겨있을 때 가난한 달동네 위로 둥싯 떠오르는 보름달을 보면서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던 어느 로맨티스트의 둥근 울음은 이제 더 이상 들려오지 않는다.

세상은 이제 어둡지 않다. 그리고 '있기' 보다는 '하기'에 길들여진 우리 몸과 마음은 더 이상 우리 속에 있는 어둠을 응시하지 않아도 된다. 인공의 불빛이 온 세상을 훤히 비추고 있으니까. 딴청부릴 생각 그만두고 세상의 북소리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앞으로 나가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이상하다. 많이 가져보아도, 많이 누려보아도 행복하지 않다. 파시스트적인 속도로 돌아가는 원심분리기 같은 세상에서 내 속의 어느 한 부분이 떨어져 나간 것 같다. 그래, 목마름이다. 속도가 더해 갈수록 어지럼증과 더불어 목마름은 깊어간다. 어디 이 갈증을 풀어줄 샘물이 없을까? 자기 속에서 샘물 긷기를 잊은 사람들은 남의 샘을 기웃거린다.


2.
『공지영의 수도원 기행』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사실은 우리가 결코 가벼이 보아 넘길 일이 아니다. 물론 황폐한 삶에 지친 듯 새된 목소리로 비명을 질러대던 작가의 참회록이라는 출판사의 광고와 그에 동조한 저널들의 그럴듯한 포장이 한 몫을 한 건 사실이다.


살아야 할 이유를 찾고 싶어 다시 일어날 때마다 상처를 가리기 위해 가면을 썼고,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없게 되었고, 그렇게 떠돌다가 나는 엎어져버린 것이었다. 내가 졌습니다! 항복합니다! 항복…합니다, 주님


책 겉 표지에 소개된 이 글귀는 자기 속의 목마름 때문에 애태우던 이들에게 얼마나 매혹적으로 들렸을 것인가. 사람은 때로 방촌(方寸)의 진실을 찾기 위해서, 막막한 지경에서 길을 찾기 위해, 산을 넘고 물을 건너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여행을 떠나는 것은 낯선 세계에 대한 막연한 동경 탓도 있지만, 낯선 풍경이나 사실 혹은 경험을 통해 자기를 돌아보기 위함이다. 여행이란 자기에게로 돌아가기 위해 걷는 에움길이라지 않던가. 세상살이가 쓰리고, 메마른 일상에 섟이 날 때, 우리는 남의 경험에 기대어 자기를 찾는 길에 나선다. 기행문을 읽는 마음은 아마 그런 것일 것이다.

그런데 '수도원 기행'이라니, 얼마나 멋진 테마인가. 나는 일의 효율성이나 이익추구에 대한 강박 없이 고요함 속에 머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대하면서, 기도와 일과 연구와 놀이가 맞물려 돌아가는 의례적인 시간, 곧 시적 시간의 회복을 꿈꾸며 이 책을 열었다. 그러나 이 책에는 수도원도 없었고, 우리가 보편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길'도 없었고, 회복된 시간의 평온도, 대안적인 삶에 대한 전망도 없었다. 어디에나 넘치는 것은 공지영뿐이었다. 자의식에 가득 찬 부박한 존재의 비틀거림에 대한 애상조의 회고, 구경꾼의 시선에 붙들린 삽화 몇 점, 숙성의 과정 없이 배설되는 개인적 체험의 편린들 말이다. 수도원은 공지영을 도드라지게 하기 위한 배경일 뿐 그 이상은 아니었다. 하긴 상당한 기간 동안 수도원에 머물면서 그 수도원적 삶의 리듬을 타보지 않고야 어찌 그 본질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출판사의 기획에 의해 시도된 여정이었으니 처음부터 한계가 분명할 수밖에 없기는 했다. 그 동안 세상을 향해 "나는 상처받았다"고 외치던 인기 작가가 "이제 항복입니다" 하고 신 앞에 엎드렸다는 사실만으로도 사람들의 시선을 끌만하다. 하지만 이 책을 읽은 느낌은 내 모습은 하나도 나오지 않는 남의 사진첩을 마지못해 들여다 본 것 같은 불쾌함이다.

수녀들의 환한 표정을 "복권이 당첨된 이모를 둔 조카의 얼굴처럼 밝았다"느니, "너무나 마음에 드는 사위에게 딸을 시집 보낸 친정엄마" 같았다는 표현이나, 그레고리안 성가를 판소리의 유럽판이라고 하는 즉물적 상상력, "너희들 안에 이미 천국이 있다"는 말의 히브리어(?) 뉘앙스 어쩌고 하는 착각은 그래도 웃어넘겨 줄 수 있다. 하지만 십자가에 달린 일개 도둑도 엄살을 부리지 않는데, 십자가 하나 지지 못할 만큼 나약한 하느님의 젊은 아들 운운 하는 대목이나, 예수의 성전 정화 사건을 두고 좌판들도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인데 해도 너무 했다는 식의 표현은 작가 자신의 표현대로 점입가경이다. 마그로지 여자 시토 봉쇄수도회에 있는 '웃는 예수상'을 보고 나서는, 그 조각상을 만든 사람은 미쳤거나 해탈했거나 둘 중의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한다. 거기에다 기독교 신자가 해탈하면 신을 만나는 데, 그 조각상의 작가는 고통의 극에서 그렇게 웃는 예수를 만났을지도 모른다는 추론까지 덧붙인다.


3.
하지만 조금 참을성을 가지고 작가의 정신적 여행을 따라가 보기로 하자. 어차피 수도원 생활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은 기대할 수 없으니까. 작가는 18년 동안 교회를 떠나 방황했던 시간을 가리켜 '거듭거듭 진실에 의해 갈기갈기 찢어지고' 싶었던 시간이라고 말한다. 그를 지금까지 살게 하고, 그렇기에 상처 입게 한 것은 결국 '진실'이었다는 말이다. 그가 수도원 기행을 떠난 것은 "모든 것을 잃고 모든 것이 캄캄해 진 후에야 비로소 필요했던 새 인생이 오는 법"이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그런데 조금 난감한 생각이 든다. 작가가 말하는 '진실'에 마주 세워지는 것은 '거짓'이겠다. 그렇다면 작가가 입은 상처는 진실이라는 멍에를 메고 거짓된 세상을 걸어가면서 생긴 멍엣상처인가? 다시 말해 '나'는 진실한 데 '세상'이 혹은 '너'가 거짓되기 때문에 입은 상처인가? 이런 질문은 결코 악의적인 것이 아니다. 작가는 하느님 앞으로 돌아온 까닭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그런데 나는 왜 유물론자였다가 18년 만에 신에게로 돌아와 이 기행을 하고 있을까, 나는 모른다. 다만, 한 가지는 안다. 나는 내 삶이 더 이상 내 것이 아님을 알았고, 그래서 나는 구덩이에 빠진 기분이었고 그러니 사방이 막혀버려서 하는 수 없이 하늘을 올려다보아야 했는데, 그때 거기 하느님이 나, 여기 언제나처럼 네 곁에 있다, 고 간절하게 말씀하셨다는 것밖에."


물론 이 문장만으로는 그에게 하나님을 보게 한 내면적 어둠이 무엇인지 분명히 짐작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책의 문맥을 살펴보면 부룩송아지가 갈아놓은 것 같은 이 문장이 함축하고 있는 뜻은 매우 단순하다. 살다살다 지쳐서 탕자처럼 돌아와 "내가 졌습니다! 항복합니다! 항복…합니다, 주님" 했더니 자비하신 하느님의 얼굴이 보이더라는 것이다. 은혜스럽다. 그런데 걱정스럽다. 방황하던 한 영혼의 귀향에 대해서 박수를 치지는 못할망정 재를 뿌리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런데도 헤살을 부리는 까닭은 그의 개인적 체험이 대중들 사이에서 유통될 때 상당히 심각한 폐해를 야기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뱀을 잡을 때는 어중간하게 잡으면 물린다지 않던가? 그의 체험은 사람들을 신앙의 깊은 곳으로 이끌기보다는 피상적이고 감상적인 길로 인도할 가능성이 커 보인다.

그는 '어둠'이 새 삶을 여는 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어둠'은 새 삶으로 이끄는 문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장식적 언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나르시시즘을 꿰뚫어 해체하는 어둠이 아니다. 공지영의 어둠은 나르시시즘을 감싸주는 고급 포장지처럼 보인다. 어쩌면 너무 성급한 판단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이 책에서 상처 입은 존재의 웅얼거림을 들을 뿐, 자기 속의 어둠에 대한 치열한 통찰이나, 빛에 의한 꿰뚫림, 혹은 해방에 대한 갈망을 찾아보기 어렵다. 신적 어둠 속에 머묾이란 십자가의 성 요한의 말처럼 "온전히 벗고, 비고, 없는 몸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지성과 감성과 의지 등 모든 것에 맛을 잃게 만드는 깊은 어둠만이 새 삶의 문으로 안내한다. 이때 어둠은 자의적인 선택이 아니라 항거할 수 없이 주어지는 조건인 것이다.

또 한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자기의 체험을 나누는 방식이다. 받아들여짐을 체험한 사람은 누구나 감격한다. 그리고 눈 밝은 사람이 된다.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인다. 하지만 조심해야 한다. 말하고 싶은 욕구를 눌러야 한다. 그리고 자기가 체험한 것을 고요함의 항아리에 담아 숙성시켜야 한다. 허심(虛心)의 체로 걸러야 한다. 다마스커스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난 바울이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간 까닭이 거기에 있다. 자꾸 말하고 싶을 때 자신을 타이르면서 늦출 줄 알아야 한다. 자신 속에 있는 모순과 성실하게 대질시키면서 그 체험의 깊은 곳을 보아야 한다. 그런데 작가는 너무 성급하다. 그는 녹음기에 대고 자기가 보고 느낀 것을 음성으로 기록하는 사람처럼 쓰고 있다. 그의 하나님은 마치 중세 연극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와 같다. 여행의 시작부터 끝까지 필요할 때마다 나타나 그의 길을 인도하고 예비하시는 분 말이다. 신앙이란 어둠은 모두 제거되고 밝음만 남는 것인가? 그렇다면 욥의 고뇌는 무엇이고, 탄식시편들의 외침은 무엇인가? 그래도 나는 하나님을 그렇게 체험했다고 말하려는가? 좋다. 인정한다. 하지만 알아 두라. 또 다른 어둠과 그늘이 삶에 드리울 수도 있다는 사실을.


4.
아르정탱 수도원에서 공지영은 좋은 질문을 했다. 여러 면에서 개성도 다르고 살아온 환경도 다른 수녀들이 어떻게 평화롭게 공존하는가, 그 비결은 무엇인가? 수녀들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쎄 떵 미라클". 그게 바로 기적이라는 뜻이란다. 공지영은 바로 이 지점에서 더 나아가지 않는다. '기적'이라는 단어에 거의 주술적으로 반응하는 것인가? 우리는 지금 어떻게 하면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면서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지 그런 지혜를 배워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수도원의 삶이 그 모델일 수 있다면, 성실한 관찰자는 그 삶의 비결을 철저히 살펴야 했다. 질서와 자유, 다양성과 통일성, 세상을 향한 개방성과 은거가 어떻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지, 그리고 그런 조화를 가능케 하는 가치는 무엇인지 말이다.

작가는 사람 사는 곳이 다 수도원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아무 것도 소유한 것 없이도 스스로 넉넉한 수도사들의 삶 앞에서 자기의 무거운 트렁크가 부끄러웠다고도 했다. 빈정거림 없이 말한다. 나는 공지영이 일상의 수도원에서 길어낸 진실의 샘물로 목을 축이고 싶다. 그의 트렁크는 가벼워지고, 사색은 깊어질 때 우리는 비로소 그의 수도원 기행이 영원을 향한 길떠남의 준비였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소망한다. 작가가 이미 도착한 그분 안에서 그분을 향해 더 큰 떠남이 있기를. 그리고 작가와 똑같은 삶의 길 위에 서있으나 여전히 무정한 하느님 때문에 상처를 입었던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난 후 더 큰 상처를 입지 않기를. (김기석 목사 ∥ 청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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