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새로봄: 산상수훈(3) 2002년 04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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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퍼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위로하실 것이다.


슬픔도 복이 된다

슬퍼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니, 이 말은 아무래도 이해하기 쉽지 않다. 행복한 사람은 슬퍼하기보다는 기뻐한다. 이게 상식이다. 오랜 기다림 끝에 마침내 결혼식장에 들어서는 신랑 신부의 들뜬 표정은 슬픔이 아니라 기쁨의 표현이다. 산고 끝에 태어난 아기를 바라보는 엄마의 얼굴에 어리는 것은 슬픔이 아니라 말할 수 없는 사랑이다. 그렇다면 이 말씀을 행복하기 위해서는 슬퍼해야 한다고 단순하고 무식해서 환언해서는 안되겠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없겠지만.

돌아보면 슬픔은 우리 삶의 갈피마다 배어들어 그늘을 이루고 있다. 이별, 이루지 못한 꿈, 뜻하지 않은 생의 시련, 그리고 고요한 시간 어디선지 모르게 나타나 슬며시 우리를 사로잡는 불안……. 그런데 놀랍지 않은가? 사람마다 일단 피해보려고 하는 그런 삶의 계기들이야말로 우리 삶을 다채롭게 하고, 깊이를 만드니 말이다. 하나님 나라에서라면 모르되 어둠이 없는 밝음, 끝없이 이어지는 밝음은 고통이 아닐 수 없다. 어둠이 있어 밝음이 고마운 것이다. '너' 없는 '나'를 상상할 수 없듯이 슬픔을 배경으로 하지 않는 기쁨은 기쁨일 수 없다. 노아의 방주에는 부정한 짐승까지도 한 쌍씩 승선이 허락된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산이 높으면 계곡은 깊게 마련이다. 계곡은 산의 접힌 부분이고, 옛사람의 말대로 그 접힌 부분, 곧 거뭇한 골짜기에서 만물이 나온다. 이렇게 보면 슬픔도 복이 된다는 말은 결코 빈 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슬픔은 어떻게 복이 되는가?

연암 박지원의『열하일기』에는 그가 드넓은 요동벌과 상면할 때의 감격을 표현한 글이 있다. 그는 삼류하三流河를 건너, 냉정冷井에서 아침을 먹고 십여 리를 더 가다가, 어느 산자락을 벗어나면서 광활하게 열린 벌판과 마주하게 된다. 망망한 시계, 텅 비어 허허로운 풍경 앞에서 그는 잠시 말을 잊는다. 말을 세우고 사방을 돌아보던 연암은 자기도 모르게 손을 들어 이마에 얹고서 말한다. "좋은 울음터로다. 울 만하구나." 뚱딴지같은 소리다. 하지만 그 마음을 알 것도 같다. 연암은 단순하기에 한없이 넓은 그 풍경 앞에서, 작은 지평 속에 갇힌 채 아옹다옹 살아온 자기 존재의 작음을 절감했을 것이다. 별이 총총한 밤하늘을 바라보다가 저 끝 모를 어둠, 한없이 뒤로 물러서기만 하는 그 어둠에 마음을 빼앗겨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는 이들의 마음이 이러할 것이다. 게네사렛 호숫가에서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려 "주님, 나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눅5:8) 하고 고백했던 베드로의 마음이 이러 했을 것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연암은 울음에 대한 변설을 도저(到底)하게 풀어놓지만, 베드로는 엎드렸다는 점이겠지만. 나의 작음을 자각하는데서 비롯되는 입구도 출구도 없는 슬픔, 그렇기에 근원적이라 할 수 있을 그 슬픔은 우리를 피폐하게 만들기보다는 오히려 삶을 정화해준다. 자아와 어두운 욕망의 오예(汚穢)를 벗지 못한 채 부풀어올랐던 삶에 여백을 만들어 평안을 누리게 해준다.


영혼의 부동액

마종기 시인의「나무가 있는 풍경」은 슬픔과 눈물이 우리 삶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사랑하는 동생을 잃은 시름에 겨워하던 시인은 어느 날 예배 중에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네 옆에 있다'는 말씀을 듣는다. 성긴 눈발이 내리는 날이었다. 그는 옷깃을 여민 채 주위를 둘러본다.


누구요? 안 보이는 것은 아직도 안 보이고
잎과 열매 다 잃은 백양나무 하나가 울고 있습니다.
먼지 묻은 하느님의 사진을 닦고 있는 나무,
그래도 눈물은 영혼의 부동액이라구요?
눈물이 없으면 우리는 다 얼어버린다구요?
내가 몰입했던 단단한 뼈의 성문 열리고
울음 그치고 일어서는 내 백양나무 하나.


보이는 것이라고는 텅 빈 허공을 배경으로 노박이로 서있는 나무 한 그루뿐이다. 잎과 열매를 다 잃어버려 쓸쓸한 나무, 시인의 심상에 비친 나무는 울고 있다. 그런데 그 나무는 그저 울고 있는 게 아니다. 먼지 묻은 하느님의 사진, 눈에는 보이지 않는 그 사진을 눈물로 닦고 있는 것이다. 놀라운 시적 도약이다. 시인은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묻는다. '그래도 눈물은 영혼의 부동액이라구요?/눈물이 없으면 우리는 다 얼어버린다구요?' 이것은 물음이 아니라 진술이고 확인이다. 어쩌면 시인의 눈에 어리었을 그 눈물은 그를 한동안 가두었던 어두운 사념, 혹은 절망의 문을 열어젖뜨린다. 슬픔과 눈물은 세상의 인력을 약하게 만들고, 진심의 문을 여는 묘약이 아닌가. 시인은 자기 속에서 일어서는 뭐라 이름할 수 없는 힘을 느낀다. 뭐라 이름할 수 없기에 시인은 그것을 '내 백양나무 하나'라고 표현한다. 하나님의 사진을 닦고 있던 백양나무는 이제 외적 대상물, 저 밖에 서있는 무정물이 아니라 시인의 마음속에 세워진 '한 말씀'이다. 그 나무는 이미 울음을 그쳤다. 슬픔의 시효가 지났기 때문이 아니라, 슬픔과 눈물을 통해 새로운 위로의 세상을 보았기 때문이다. 함석헌 선생은 "눈에 눈물이 어리면 그 렌즈를 통해 하늘나라가 보인다" 했다. 어쩌면 시인은 하늘나라를 본 것일까?


울음, 새로운 생의 박명(薄明)

우리는 성경에서 이보다 더욱 처절한 울음소리를 듣는다.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 문밖에서 터져 나온 베드로의 오열이 그것이다. 깨달음은 현실보다 늘 늦게 오는 법. 베드로는 닭 울음소리를 듣고서야 "오늘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눅22:34) 하신 주님의 말씀이 떠올라 통곡한다. 결정적인 위기를 맞을 때 사람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겁쟁이가 된다 하지 않던가. 베드로는 죽는 자리에도 주님과 함께 가겠다 했던 자기의 큰 소리가 얼마나 허망한 것이었나를 절감하며 운다. 그의 곁에는 손을 잡아줄 친구조차 없다. 하지만 절대적 고독 속에서 터져나오는 울음이 자기를 새로운 생의 박명(薄明)으로 이끌 줄 그가 알았을까? 통곡은 한계에 대한 절감이고, 수치심을 받아들임이고, 자기가 어쩔 수 없이 나약한 한 인간임을 드러내는 표지이다. 그렇기에 울음은 단단한 끈이 되어 그를 예수에게 단단히 비끌어맨다. 눈물을 통해 그는 비로소 예수가 꿈꾸셨던 새로운 세상의 초석이 될 수 있었다.

또 우리는 어린 자식과 함께 주인의 집에서 내쫓겨 광야를 방황하던 하갈의 처절한 울음소리를 기억한다. 가져온 물과 음식은 떨어지고, 살 희망조차 사라져 지쳐 쓰러진 자식을 그저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는 어머니의 피맺힌 울음소리, 어디에서도 위로의 눈길이나 손길을 찾을 수 없어 더욱 처연한 그 울음소리, 그리고 엄마의 울음에 전염되어 슬피 우는 이스마엘의 울음소리. "하나님이 그 아이가 우는 소리를 들으셨다"(창21:17). 이 한마디로 족하다. 창세기의 기록자는 말의 경제성을 너무나 잘 아는 사람이다. 하나님이 들으셨다는 말보다 더 큰 위로와 희망은 없다. 이 말 한마디로 메말랐던 하갈의 마음에 물이 오른다. 그의 눈이 밝아져 샘을 발견했다는 말은 췌사일 뿐이다. 무력함의 심연에서 더 이상 자신에게 희망을 걸 수 없을 때, 하늘만 바라볼 때, 그때 하늘의 위로가 다가온다.


너를 위한 울음

그러나 이런 말조차 사치스럽게 여겨질 때가 많다. 우리 이웃들이 겪는 아픔은 인류의 고통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구체적이고 생생하다. 한가롭게 '생은 무상하니까' 라고 말하려는가? 기쁨과 슬픔도, 삶과 죽음도 본래 텅 빈 것이라 말하려는가? 우리 시대의 하갈들은 훨씬 더 열악한 생의 조건 속에서 살아간다. 거듭되는 전쟁으로 가족을 다 잃고 몸 안에 있는 눈물도 다 말라 희노애락의 표정조차 잃어버린 여인들, 굶주려 울다가 울 기력조차 잃어버린 채 텅 빈 시선으로 허공을 바라보는 아이들, 그들은 거울이 되어 우리를 비춰준다. 그 속에는 하나님이 주신 얼굴을 잃어버리고 사나운 이리와 탐욕스러운 돼지로 변해버린 우리의 모습이 보인다. '우리'라는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나'라고 하겠다.

인정의 폐허가 되어버린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길 가는 모든 나그네들이여, 이 일이 그대들과는 관계가 없는가?"(애1:12) 하고 물었던 예레미야의 외침이 쇠북소리처럼 울려온다. 길이 보이지 않는다. 위로도 없다. 어쩌면 고도(Godot)는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죽을 수도 없고, 외면할 수는 없다. 수치와 분노의 감정은 점차 연민으로 바뀐다. 그들의 고통이 나와 무관할 수 없다는 자각이 서서히 찾아온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두고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두고 울어라"(눅23:28) 하셨던 그 말씀이 또렷하게 떠오른다. 우리가 우리 이웃들을 위해 울 때,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 땀 흘릴 때, 정의에 대한 갈망 때문에 허덕일 때 우리는 예수의 십자가와 비로소 결합된다. 그 십자가를 통해 우리는 더 큰 생명에 가담하게 된다. 그것이야말로 복음적 위로, 곧 구원이 아닌가.

자기 연민을 환기시키는 값싼 슬픔 말고, 존재의 다른 차원을 여는 슬픔을 맛보는 사람들은 행복하다. 그들이 누구도 흔들 수 없는 궁극적 위로 속에서 살게 되기 때문이다.
(김기석 목사∥청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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