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새로봄: 산상수훈(2) 2002년 03월 14일
작성자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온다(간디). 그러면 누가 행복한가? 행복한 사람만이 행복하다. 행복한 사람, 그는 자기 속에 행복의 샘을 마련하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는 세상의 신비에 놀랄 줄 알고, 살아있음의 근원적 슬픔을 모르진 않지만, 그 슬픔 속에서도 해맑은 웃음을 지을 수 있다. 시련이 닥쳐와도 그 속에서 자기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옳은 일을 발견하는 눈이 열려 있다. 누군가에게 받는 작은 도움도 크게 감사한다.

그러면 밖에서 오는 행복은 없는가? 있다. 바라던 일이 이루어질 때, 누군가의 따스한 눈길을 받고 있을 때, 우리는 행복을 맛본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 우리 곁에 머물다가 그림자처럼 스러지고 만다. 그 행복은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땅바닥에 떨어져 뒹구는 꽃잎처럼 우리 속에 어질증만 일으키고, 더 큰 상실에 아파하게 만든다. 욕망은 무한하고, 채워짐은 유한하다. 채워짐에서 행복을 맛보려는 이들에게 행복은 늘 손에 닿지 않는 저편에 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입을 여신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군더더기 하나 없이 깔끔한 말씀이다. 맑은 하늘을 배경으로 보는 푸른 솔잎처럼 청신하다. 이 말에 무슨 구구한 설명이 필요할까? 그저 그 말씀과 만나면 그만이지. 하지만 말의 덧없음을 알면서도 주절거릴 수밖에 없는 이 속기(俗氣), 어찌할꼬.

그런데 마음의 가난이라니 이게 대체 어떤 경지를 말하는 것인가? 아직 그 자리에 서보지 않았으니 말하기 난감하다. 어쩌면 그것은 '숭고함'에 스쳐서 세상의 모든 것과 '하나'가 될 수 있는 마음이 아닐까? 마음이 가난하지 않으면 '하나'가 될 수 없다. 우리는 누구를 만나든, 무엇을 만나든 습관적으로 각(角)을 만든다. 슬쩍 어깨를 견주어 보고 자기의 태도를 결정한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대상과 만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타자화' 한 후 그의 이미지를 소비한다. 우리와 마주 서 있는 대상들은 살아 숨쉬는 인격이 아니라, 좋음과 싫음, 아름다움과 추함, 쓸모 있음과 쓸모 없음, 유력과 무력의 문법소들에 따라 분류된 객체일 뿐이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의 지옥인지도 모른다. 스스로를 유폐할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가두고야 마는.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그러한 지옥으로부터 벗어난 상태를 일컫는다. 하지만 어떻게? 때로 우리 마음이 가난해질 때가 있다. 눈앞에 보이는 세계 전체가 왠지 정겹고 아련하여 알 수 없는 평화가 깃들 때, 보이지 않는 끈이 나와 세상을 이어주고 있음을 직감할 때, '나'도 없고 '너'도 없는 원융의 순간 말이다. 문제는 그런 순간에 지속이 없다는 것이다. 자그마한 소리에도 우리의 위태로운 평화는 금이 가고, 잿빛 현실만이 냉혹하게 지배권을 주장한다. 이게 우리이다.

우리 마음의 창고에는 타자들을 공격할 수 있는 재래식 무기가 산처럼 쌓여있다. 칼을 보면 찌르고 싶은 것이 본능이라 하던가. 우리는 이따금 '교만'의 칼을 들기도 하고, '적의'의 창을 꺼내들기도 한다. 물론 '열등감'의 방패 뒤로 숨기도 하지만. 그런 무기들을 쓸어내지 않고는 마음의 가난이란 언감생심(焉敢生心)이다. 그렇기에 마음의 가난은 쉽게 얻을 수 없다. 우리는 언제 터질는지 모르는 휴화산을 마음에 간직하고 살아간다. 교양과 체면으로 순치시키려 노력하고 있긴 하지만 언제라도 불러 일으켜 남을 할퀼 수 있는 발톱을 숨기고 살아간다. 아침마다 자기별에 있는 화산을 청소하고, 바오밥나무의 뿌리를 뽑아내야 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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