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새로봄: 산상수훈(1) 2002년 03월 0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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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그에게 나아왔다."(마5:1)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사람들은 왜 산에 오르는가? "산이 거기에 있으니까!" 이것은 산악인의 말이다. "그곳에 길이 있으니까." 이것은 길을 찾는 구도자의 말이다. 길을 찾는다는 것은 길을 잃었다는 말이고, 길을 잃었다는 것은 본래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다는 말이다. 신은 나무 뒤에 숨어있는 남자를 찾아와 '네가 어디 있느냐?' 물으셨는데, 그 물음은 그의 몸이 처해있는 지리적 공간을 물은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이것은 질문이 아니라 '너 있어야 할 자리를 떠났구나' 하는 책망인 것이다.

우리가 발을 딛고 서있는 예토(穢土)에서 인격의 통합성을 유지하고 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어쩌면 인생은 물결에 밀려 허둥대다가 겨우 몸을 추스리려는 순간 또 다른 파도가 몰려와 중심을 무너뜨리곤 하는 고통의 바다인지도 모른다. 하구에 떠밀려오는 죽은 생선이나마 먼저 차지하려고 끼룩거리며 아귀다툼을 벌이는 리차드 바크의 갈매기떼 속에는 인정하기 싫지만 나도 있고 당신도 있다. 삶은 그처럼 진부하다. '지지고 볶는다'는 말로 표현하려니 혀끝이 아릿하다.

예수께서 보신 '무리'는 바로 우리들이다. 말장난이지만 '무리'는 '리'(理)가 없는 사람들이다. 아니, 그 말은 너무 단정적이다. '리'를 따지고 살기에는 너무나 땅의 현실에 매여있는 사람들이다. 예수는 왜 그들을 보고 산에 오르시는가? '거리'를 만들기 위해서이다. '거리'가 없으면 볼 수 없다. 높은 곳에 오르면 사람은 시인이 된다. 산문적 현실의 인력이 느슨해지는 순간 그의 속에서 운율이 솟아오른다.

산길을 걸으면 먼저 호흡이 가빠진다. 그리고 깊어진다. 일상의 인력이 느슨해지면서 귀는 더욱 예민해진다. 숲의 수런거림, 새들의 속삭임, 햇살의 밀어, 바람이 전하는 말이 비로소 들린다. 히브리의 한 시인이 '낮은 낮에게 말씀을 전해 주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알려 준다'(시19:2) 했던 그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시샤팡마에 올랐던 어느 산악인의 고백처럼 높이 오를수록 마음은 더욱 낮아진다. 내가 해냈다는 생각은 사라지고, 내가 산의 품에 받아들여졌다는 안도감이 고마움이 되어 나타난다. 높은 곳에 오르면 왜 눈물이 나는가? 눈길이 트이기 때문이다. 대청봉에 올라야 내외설악이 두루 보이고, 산의 발치까지 밀려오는 동해바다가 한눈에 보인다. 그리고 나의 작음과 더불어 우주를 품고 있는 나의 큼도 또한 보인다. 꼭 물리적인 산에 올라야 하는가? 아니다. 사막이 우리 마음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산은 우리 가슴속에도 있다.


가까이 갈수록 자꾸 내빼버리는 산이어서
아예 서울 변두리 내 방과
내 마음속 깊은 고향에
지리산을 옮겨다 모셔놓았다
날마다 오르내리고 밤마다 취해서
꿈속에서도 눈구덩이에 묻혀 허위적거림이여


이성부 시인의 「지리산」이라는 시다. 다가갈수록 멀어지는 산이기에 마음 깊은 곳에 지리산을 옮겨다 모시는 마음, 그리고 날마다 그 산에 오르기 위해 애쓰는 마음이 눈에 잡힐 듯 선하다.

예수께서 오르신 산을 찾기 위해 굳이 팔레스타인까지 달려갈 것은 없다. 우리 마음 속에 우뚝 서있는 산, 정성으로만, 근기로만 오를 수 있는 그 '참'의 산을 오르려고 마음을 오로지 할 때, 우리는 우리보다 앞서 그 길을 가셨고, 마침내 산이 되신 예수를 만날 것이다.


"제자들이 그에게 나아왔다."

산길을 마다하지 않고 예수를 따라 나선 이들, 한 말씀에 목이 마른 사람들, 그들을 가리켜 제자라 한다. 제자는 자기의 부족함을 안다. 자기의 부족함을 안다는 점에서 그는 지혜롭다. 아직 자기 속에서 깨달음의 샘물이 솟구쳐나오는 경험을 하지 못했을 뿐이다. 속알이 터져나오는 후련함을 맛보지 못한 사람이다. 사막에 사는 식물의 뿌리가 물기를 찾아 어두운 땅속을 혼신의 힘으로 더듬듯이,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 한 말씀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을 간직한 이가 제자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은 많지만, 예수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은 많지 않다. 제자란 스승이 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니까. 스승인 예수가 하신 일은 현대인들에게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다. 남의 발을 닦아주고, 강도 만난 이의 이웃이 되어주고, 의를 위해 핍박받는 것은 관념 속에서는 '아멘'이지만, 막상 현실 속에서는 '노멘'이다. 한국교회에서 예수는, 그리고 말씀은 이처럼 소외되고 있다. "예수는 없다"고 사자후를 터뜨렸던 어느 진보적인 신학자의 외침은 과격하긴 하지만 우리의 허실을 드러내는 활인검이다.

남의 동네 이야기이긴 하지만 돌아가신 성철 스님은 자신을 만나려면 먼저 삼천 배를 올려야 한다고 했다. 여기에는 에누리가 없다. 만남의 조건치고는 좀 별스럽다. 말이 쉬워 삼천 번이지, 그게 보통 결심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삼천 배를 시도하다가 중도에 작파해 버린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별 생각이 다 들었을 것이다. '한 말씀 들으려고 내가 꼭 이짓을 해야 하나.' '내가 괜한 짓을 하고 있지.' 육체의 기운이 다해 더 견딜 수 없을 때, '내 한번 끝장을 보리라' 하는 오기가 사람들을 부추긴다. 그러다가 오기라는 독기도 빠지고 나면 내가 절을 하는 건지, 절이 나인지도 모를 무심에 빠지고, 그 다음에는 평안이 온다 한다. 마침내 몸과 마음이 부드러워진 것이다. 그 마음 밭에 던져진 말씀은 결코 하찮은 것이 아니다. 그는 이미 제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묵정밭에서 알곡이 자랄 수는 없다. 갈아 엎어진 마음, 부드러운 마음, 자아의 껍질이 깨어진 마음이라야 말씀의 알곡이 맺힌다.


"정의를 뿌리고 사랑의 열매를 거두어라. 지금은 너희가 주를 찾을 때이다. 묵은 땅을 갈아 엎어라. 나 주가 너희에게 가서 정의를 비처럼 내려 주겠다."(호10:12)


오늘 교회로 향하는 이들의 마음은 어떠한가? 예배 시간에 지각을 하지 않으면 다행이고, 지각을 하고도, 급한 약속 때문에 마음이 팔려 예배 중에도 연신 시계를 할깃거리다가, 축도가 끝나기도 전에 휑하니 예배당을 빠져나가는 이들이 많다. 아니면 다리를 꼬고 앉아 목사를 바라보며 '어디 나를 한번 감동시켜봐' 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이들도 많다. 그도 아니라면 자기만이 참된 길을 안다는 몽상가들의 감언이설에 넘어가 영혼의 감옥에 스스로를 유폐시킨 채 살아가는 수인들도 많다. 괴테는『타우리스의 이피게니에』에서 토아스의 입을 빌어 말한다. "인간은 노예근성에 젖어 있어서 자유를 박탈당하면 쉽사리 순종하는 법을 배운다." 많은 신자들이 스스로 생각하는 주체이기를 포기하고, 즉자적으로 주어지는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믿음이라 생각한다. 그들은 천수답을 닮았다. 비가 오면 흡족해 하지만, 가물면 타들어간다. 자기 속에서 샘물이 솟아오르지 않는 한 그 마음은 늘 푸석거릴 수밖에 없다. 예수는 외치신다.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이 말한 바와 같이, 그의 배에서 생수가 강물처럼 흘러나올 것이다."(요7:38)


예수에게 나아가 그분에게 배우고, 그분을 닮으려고, 모든 것을 다 버려두고 그를 따르는 제자들이 있는가? 왜 우리는, 그리고 나는 예수를 믿노라 하면서도 예수의 제자가 되려 하지 않는가? 옛사람은 심지(心地)를 밝히지 못했으면 천리를 멀다하지 않고 스승을 찾아가 길을 물었다 한다. 이미 스승을 얻었으면 곧 지팡이를 꺾어버리고 바랑을 높이 걸어두고 오랫동안 그를 가까이 하였다 한다(운서주굉). 얍복강가의 야곱은 환도뼈가 부러지면서도 천사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를 든든히 붙잡고 있는가? 예수의 혼으로 거듭나기 원해 나를 버린 사람이라야 제자이다. 할 수만 있다면 그분의 모든 것을 배우고 싶다. 걸음걸이, 앉음새, 음식을 드시는 모습, 사람들을 바라보는 눈빛, 말씀하실 때의 어조, 기도하실 때의 자세, 홀로 계실 때의 표정……이것은 주체성이나 개별성의 포기가 아니다. 오히려 택선고집(擇善固執) 하려는 결의이다. 예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내 것이라 생각했던 것을 버려야 한다. 나의 입장, 나의 체면, 나의 견해, 나의 경험, 사량분별하는 마음까지도. 갈릴리 어부들이 그물과 배를 버려두고 예수를 따랐다는 말은 하기 좋은 옛날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 진행형으로 재해석되어야 한다. 예수 앞에 나온 제자들은 더 이상 호기심에 사로잡힌 무리들이 아니다.

우리 앞에 두 길이 있다. 무리로 살아가는 넓은 길과 제자로 살아가는 좁은 길이다. 예수는 영혼의 산으로 우리 앞에 계시다. 그 산을 오르기 위해 온새미로 힘을 쓸 때 우리는 어느덧 산이 될 것이다. 품이 넓은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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