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허물벗기와 날개달기 2001년 12월 01일
작성자
허물벗기와 날개달기
(시현실 원고)


처방은
우듬지와 우듬지 사이의 하늘 깊은 구멍
드문 별자리 찾듯 눈맞는 구멍
애인 삼는 일이라고!
―[처방]에서

세상은 병들었다. 귀를 기울여보면 질주하는 시간의 굉음을 뚫고 온갖 것들의 신음소리가 들려온다. 조화로운 세상의 꿈은 어쩌면 '없는 곳', 즉 유토피아에 대한 허망한 집착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는 음울한 자각이 우리를 아프게 한다. 그렇다면 시간 속을 걸어가는 일은 영혼의 갈증을 축일 물 한 모금 없이 척박한 세상을 건너는 일이 된다. 하늘은 점점 멀어지고 땅은 점점 어두워간다. 희망은 없는가? 있다. 멀어지는 하늘 저편에 별빛이 아스라히 빛나기 시작하고, 어두워가는 땅의 한복판에서 꿈이 무르익는다.

절망스럽기에 희망을 말하고, 어둡기에 밝음을 말한다. 이것은 서글픈 자기 위안이 아니다. 영혼에 드리워진 절망과 어둠은 오히려 벌거벗은 '참 나'의 자리로 우리를 인도하는 길이 되기도 한다. 예언자가 그러하듯이 시인은 '보는 자'(seer)이다. 절망과 어둠의 눈을 응시하다가, 어느 결에 눈빛이 유현(幽玄)해지면서 일상적 세계 이면의 질서와 눈이 맞는 순간 그의 입에서는 '아' 하는 찬탄이 울려나온다. 그 찬탄은 우리 삶의 접혀진 부분이 펼쳐지면서 나는 소리요, 색채이다. 그 찬탄이 형상화된 것이 시이다. 시인은 그리하여 꿈꾸는 자가 된다. 그는 이 세계에 살면서 이 세계 너머의 세계를 보고 있으므로 칙칙하고 요란한 세상에 '하늘빛 고요'를 끌어들인다.

고진하의 시선은 "우듬지와 우듬지 사이의 하늘 깊은 구멍"에 머물러 있다. 시인이 발을 딛고 있는 세상은 여전히 어지럽다.

치매에 걸린 세상은
죽음도 붕괴도 잊고 멈추지 못하는 기관차처럼
죽음의 속도로
어디론가 미친 듯이 달려가는데
―[어머니의 총기]에서

도시인들은 "25,000볼트에 실린 高壓의 시간"([고압의 시간]) 속에서 창백한 생존을 이어가고, "푸들거리는 내장을 송두리째 긁어내고 집이나 솜/ 혹은 방부제 따위를 가득 채운, 잘 길들여진 행복"([껍질만으로 눈부시다, 후투티)에 탐닉한다. 이것은 망각에의 열망이다. 주체로서 서려는 욕망은 애저녁에 접어버리고 가속화된 시간에 등떠밀려 살아가는 삶속에 '나'는 없다. 많은 다리로 뻘뻘 기어가는 그리마를 보면서 시인은 슬픔을 느낀다. 삶의 속도가 빨라질수록 혼(魂)의 퇴화도 가속화되기에([그리마를 보면 세월이 느껴진다]). 그렇기에 세상은, 사람살이의 마당은 '빈들'이다. 희망도 없고, 사람도 없고, 내일도 없으니 말이다([빈들]). 하지만 시인은 그 빈들에서 오히려 부재하는 것에로 돌아선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길이며, 삶의 근원으로의 이행이다. 시인은 빈들을 견디는 것이야말로 자기의 삶을 세우는 일임을 알아차린 것이다.

이제 고통과 절망의 원인이 된 세상은 더 이상 그의 삶을 볼모로 잡고, 굴종을 강제하는 '타자적인 세계'가 아니다. 오히려 그곳은 딛고 일어서야 하는 '설 땅'이요, 삶의 비의와 통하는 문인 것이다. 세상에 문 아닌 것이 없다. 열린 눈으로 보기만 하면 세상은 활짝 열린 문이다. 그런데 그 문은 귀를 기울임으로 열 수 있다. 고진하가 사물들의 세계, 동물들의 세계를 엿보거나 엿듣는 것은 그 때문이다. 칼 야스퍼스의 표현을 빌자면 그는 세상에서 만나는 모든 것속에 담겨있는 '초월자의 암호'를 해독하고 싶어한다. 그것은 어쩌면 발터 벤야민이 말하는 '아담의 언어'를 발견하려는 욕망인지도 모르겠다. 모든 존재자들의 내면에 깃들인 신의 언어를 명명하는 것 말이다.

시인에게 세상은 더 이상 죽어있는 사물들의 세계가 아니다. 세상은 인간에 의해 규정되고 조작되고 해석되기를 기다리는 타자들의 세계가 아니라, 내 앞에 마주 서서 말건네오고, 때로는 거울 속에 있는 자아 이미지를 깨뜨리는 역동적인 실체이다. 문제는 세상의 내밀한 속삭임에 귀를 기울일수록 이명증처럼 참된 소리 듣기를 방해하는 것이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오래된 삶의, 그리고 사유의 관성이 그것이다. 그것을 벗지 않고는 참된 소리를 들을 수 없다. 허물벗기가 시인의 꿈이 된 건 그 때문이다.

시인의 허물벗기는 이중적이다. 첫째는 말의 허물벗기이다. 왜곡된 말, 권력으로 화한 말, 껍질만 남은 말, 정처없이 떠도는 말, 온갖 존재자들 사이의 소통을 가능케 하는 원초적 언어에 덧씌워진 말을 비워내지 않고는 참 말에 가 닿을 수 없기 때문이다. 시인은 속엣것들을 말끔히 비워내고 엎어져 있으면서도 여전히 배부른 항아리([默言의 날])를 바라보면서 우리가 부리는 말의 덧없음을 아파한다. 욕망으로 분식된 일체의 말을 버리고 찾아간 수도원이 '얼음 수도원'인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할 수 있다. 시인이 사물들의 세계에 집착하는 까닭은 어쩌면 말없는 것들 속에서 참 말을 엿듣기 원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히브리 시인은 사람의 말이 지양된 침묵 속에서 우주의 소리를 듣는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시19:2-4). 고진하는 꿈꾼다. "하늘의 말을 담아내는 맑은 영소(靈沼)가 되기를". 하지만 그는 지금까지 "해와 달과 별들, 새들,/푸른 갈대들이 내 안의 물거울 위에 썼다가 지워버린/경이(驚異)의 글자들"([범종소리])을 읽지 못했다. 왜? 아직 자아가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시인의 허물벗기는 존재의 허물벗기로 나갈 수밖에 없다. 흐르는 물이 사물을 비춰낼 수 없듯이 욕망으로 들끓는 마음은 하늘의 소리를 울려낼 수 없지 않은가? 시인은 해방을 꿈꾸지만 해방은 순간은 계시처럼 가끔 다가올 뿐이다. 그래도 그 순간은 소중하다. 팍팍한 시간의 강을 건널 징검다리가 되기 때문이다. 비릿한 옛 존재의 인력으로부터 해방되는 순간 "내가 읽을 새 경전(經典)은 바로 나"([범종소리])가 된다. 진정한 주체로의 복귀인 셈이다. 죽음은 따라서 새로운 생명과 통하는 문이 된다. 시인은 거미줄에 걸려 더듬이와 몸통을 다 파먹히고 찢긴 날개만 남은 흰줄표범나비가 슬어놓는 노란 알들을 보며 숙연함을 느낀다. 시인으로 하여금 "죽음을 받아들이는 힘으로/푸른 햇살 아래 밀어내놓은 신생(新生)의 꿈들!"([흰줄표범나비, 죽음을 받아들이는 힘으로])이라는 조사를 읊게 만든 것은 죽음이 전제되지 않은 새로움이란 없다는 깨달음이다.

돌아오는 길에 보니,
부서진 사체는 화석처럼 굳어지며
풀풀 먼지를 피워 올리고 있다.
산책, 오늘 내가 읽은
산이라는 책 한 페이지가 찢어져
소지(燒紙)로 화한 셈이다.
햇살에 인화되어 피어오르는
소지 속으로,
뱀눈나비 한 마리 나풀나풀 날아간다.
―[꽃뱀 화석]에서

산을 오르다가 시인은 허물을 벗고 있는 뱀과 만난다. 그리고 하산길에 뱀의 허물만을 본다. 온 몸을 땅에 붙이고 구불텅구불텅 기어다니며 대지의 비밀에 귀를 기울이다가 홀연히 허물을 벗고 사라진 뱀, 시인은 그 뱀이 뱀눈나비가 되어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을 본다. 눈부신 비약이다. 수평이 수직으로 곧추세워지는 순간이다. 시간이 영원을 입는 순간이다. 살갗에서 일어나는 꺼풀도 '허물'이지만, 영혼에서 일어나는 꺼풀도 '허물'이다. 신처럼 되겠다는 인간의 과욕, 곧 하마르티아가 우리의 영혼에 덧씌워졌기에 우리는 가볍게 하늘과 내통하지 못한다. 날아오르지 못한다. 시인은 여전히 이 땅에 있다. 땅에 서서 하늘을 본다. 하늘은 자유 아닌가? 그가 <새 보러 가자!>고 우리를 꼬드기는 것은 자유에의 그리움 때문이다.

허물벗음, 그것은 고통이다. 하지만 벗고 벗고 또 벗은 자리, 그 상처로부터 날개가 돋는다. "제 몸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에 질식되어/밀봉된 항아리 속에서 숯"이 될 때 화목은 비로소 미사의 원료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숯의 미사]). 그런데 그 고통은 누구에게도 양도할 수 없다. 오로지 홀로 견디어야 한다.

나는 소금인 적이 없다.
그대 입으로 들어가는 밥이나 국에 간맞추기를 원하면
그대 집의 소금항아리를 열라.

나는 빛인 적이 없다.
해의 기생식물 해바라기처럼 나에게 기대어
그대 안의 어둠을 몰아내려 하지 말라.

세상이 오해하듯, 나는
세상의 중심(中心)인 적이 없다.
자꾸 날 맴돌며 그대의 중심이 되어달라고
떼쓰지 말라.
―[예수]에서

참으로 통렬하다. 남의 언어로 말하고, 남의 가슴으로 느끼고, 남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남의 깨달음을 훔치려는 타락한 실존들을 향해 시인은 조롱기조차 없이 말한다. '그대 집의 소금항아리를 열라.' 우리는 여기서 새로운 시적, 신앙적 주체의 탄생을 본다. 그는 스스로 중심이 되려 한다. 하지만 타자들을 주변화하는 절대적 중심을 탐하지 않기에 강박적이지 않다. 중심을 탐하지 않기에 이 시적 주체는 기존의 세계가 세워놓은 울타리를 넘어 범람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 종교와 종교 사이, 사람과 사물 사이, 사물과 사물, 이념과 이념 사이를 갈라놓던 분리의 담이 무너지고 유연한 흐름이 형성된다. 그런데 그 흐름은 곧장 초월의 바다에 이르는가? 아니다. 시인은 범람하는 사유의 물줄기를 다시금 자기의 세계 속에 거두어들인다. 그런데 그 세계는 이미 하늘과 맞닿은 세계이다. 작은 '나'가 지양되고 더 큰 '나'로 탈바꿈한 자의 새 세계이다.


저는 죽었습니다. 이제
당신 안에서
새로운 신뢰를 얻길 원합니다.
낡은 시간의 옷을 벗기고 당신이
갈아 입혀준 새 옷이, 영원한 현재이길 원합니다.
―[하늘빛 고요]에서

'영원한 현재'를 꿈꾸며 '우듬지와 우듬지 사이의 하늘 깊은 구멍'을 향하고 있는 시인은 지금 막 허물을 벗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이게 웬 심술인가? 나는 그가 너무 쉽게 허물을 벗지 못하기를 빌고 있다. 가끔은 하늘 깊은 구멍을 향하고 있던 눈길을 거두어 비린내나고 땀내나는 여항(閭巷)의 삶을 들여다 보기를 비는 것이다. 시인이 더 오래 '진흙의 시간'을 견디고, 세상과 불화하고, 더 많이 상처입었을 때 선물처럼 그의 영혼에 날개가 돋아났으면 좋겠다. 그때쯤이면 시인은 '밥'이 되어 구수해지신 어머니([밥])처럼 이 척박한 땅에 구수한 시의 밥 한 상을 올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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