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죽음 앞에서 삶 맛보기 2001년 03월 22일
작성자
죽음 앞에서 삶 맛보기
-파울로 코엘료의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


동굴 속 깊은 곳, 땅에 반쯤 몸이 파묻힌 채 날아오르려 안간힘을 다하는 신화 속 인물에 관해 읽으면서 가슴이 서늘해진 적이 있다. 그게 어찌 신화인가? 우리의 꼬락서니에 대한 절묘한 은유이지. 그날 나는 깨끔찮은 마음에 뻐근해진 어깻죽지를 어지간히 주물러댄 것 같다. 삶은 아무리 살아도 미궁이다. 지도조차 없는 미궁을 서성이면서 우리는, 아니 나는 삶에 관한 한 어리보기임을 자인할 수밖에 없다. 포도원 밖에서 신 침이나 흘리는 여우처럼 우리는 가보지 못한 길을 애써 외면하면서 하루하루 살아간다. 거리를 보라. 사람들의 이목 때문에 한번도 '나'를 살아보지 못한 채 왼쪽 날개도 잘라내고 오른쪽 날개도 잘라내고, 마음에 금제의 팻말을 섭새긴 사람들, 자승자박(自繩自縛)의 무리들이 물결처럼 흐르고 있지 않은가?

사람들 속에서 해골을 보는 헤르만 헤세의 눈을 탓할 것 없다. 제대로 살아본 적이 없으니 우리는 제대로 죽음을 맞이하기도 어렵다. 어느 날 삶에 지친 한 아가씨가 죽기로 결심했다.

1997년 11월 21일, 베로니카는 드디어 목숨을 끊을 순간이 왔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세들어 살고 있는 수녀원의 방을 구석구석 청소하고, 난방을 끈 다음, 이빨을 닦았다. 그리고 침대에 누웠다.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는 이렇게 시작된다. 베로니카가 죽기로 결심한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삶이 너무 뻔하다는 것, "젊음 다음에 어김없이 찾아와 돌이킬 수 없는 흔적을 남기는 노쇠와 질병들, 그리고 사라져가는 친구들." 더 이상 살아봤자 얻을 건 아무 것도 없다. 다른 하나는 세상이 점점 나빠지고 있다는 것, 그럼에도 자기는 그런 상황을 막을 도리가 없다는 것, 따라서 자기는 쓸모 없는 존재라는 슬픈 자각이다. 등잔은 있지만 불꽃의 펄럭임은 없는(타고르) 인생, 베로니카에게 죽음은 자유인 동시에 영원한 망각이었다.

하지만 베로니카는 죽지 못했다. 눈을 떴을 때 그는 극심한 통증을 느꼈다. "통증은 지상의 특징" 아닌가. "아! 이 지상의 고통! 그것은 유니크한 것이다. 혼동이 불가능할 정도로." 베로니카가 깨어난 곳은 정신병자 수용소인 '빌레트'였다. 살아났으니 살아야 하나? 베로니카는 곰곰히 생각해본다. 일상으로 복귀는 여전히 무의미하다. '나'를 거듭거듭 유보하며 사람들의 기대에 따라 '적응'하며 사는 것은 사는 게 아니다. 베로니카는 아직 죽을 용기와 기회가 있을 때 빨리 끝내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다. 죽음은 여전히 매혹적인 자태로 베로니카 앞에 있다.

그렇지만 일순간에 상황이 변하고 만다. 약물 과다 복용으로 말미암은 심실 회저(신체 조직의 일부가 썩어 기능을 잃는 병)로 길어야 일 주일밖에는 더 살 수 없음을 통보받은 것이다. 한 순간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날짜가 정해진 죽음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죽음을 기다린다는 것, 그처럼 고통스러운 일이 있을까? 베로니카는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두려움이 베로니카로 하여금 주변을 둘러보게 한다. 미친 사람들뿐이다. 그들 대부분은 자기 속에 유폐되어 있다. 만성적인 우울증이 이미 나았지만 "다른 사람이 강요하는 방식이 아니라 내가 꿈꾸는 대로 내 삶을 살고" 싶어서 빌레트에 남기로 했다고 말하는 제드카, 보다 자유롭게 자신의 욕망들을 실현하기 위해 미친 척하는 사람들의 모임인 "형제 클럽", 권위주의적이고 속기(俗氣)가 넘치는 아버지, 그의 꿈의 날개를 부러뜨린 현실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정신분열증을 위장하고 있는 에뒤아르, 욕지기나는 부조리한 세상사로부터 은퇴하기 위해 패닉 증상을 호소하며 빌레트에 남아있는 마리아, 그들은 다 자기 속에 갇힌 사람들, 스스로 날개를 접은 사람들이다. 마리아는 그런 인물들에 자신을 비춰보며 증오를 느낀다.

베로니카는 모든 것을, 특히 자기 속의 수없이 많은 베로니카들, 매력적이고, 끼로 넘치고, 호기심 많고, 용기 있고, 언제든 위험을 무릅쓸 준비가 되어 있는 그 베로니카들을 발견하지 못한 채 살아온 삶의 방식을 증오했다.

고통이 지상의 특징이라면, 증오는 살아있음의 특징 아닌가? 베로니카는 자신에게 쏟아진 사랑조차 증오했다. 그 사랑은 그녀를 죄책감으로 채워놓았고, 자기가 꿈꾸는 모든 것을 포기하는 한이 있어도 그 사랑의 기대를 충족시키고 싶다는 욕망을 그녀 속에 불어넣었기 때문이다. 사랑조차 자기 날개를 자르는 가위 구실을 했음을 알았을 때 베로니카는 자기 감정에 충실하기로 한다. 지금까지 자기 스스로에게 용납하지 않았던 일들을 해보기로 한 것이다. 며칠 남지 않은 생이니까. 자기를 무시했던 노인의 뺨을 때리고, 마음의 움직임에 따라 피아노를 연주하고, 에뒤아르가 보는 앞에서 자위 행위를 하기도 한다. 욕망의 고삐를 풀어놓았을 때 베로니카는 비로소 삶의 맨 얼굴을 본 듯 했다. "너에게 살날이 이틀밖에 남지 않았다 하더라도, 네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알지 못한 채 삶을 마감해서는 안 된다"는 마리아의 말이 베로니카의 생에 불을 질렀다. 베로니카는 자기 삶이 영원하다고 믿었을 때 항상 미루어왔던 일들을 다 해보고 싶어한다. 그것이 무엇이든. 그리고 자신을 송두리째 내던지고 싶어한다. 그것이 죽음이라 해도.

한 마리의 제비가 봄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지만 봄에 대한 기대는 일깨운다지 않던가? 죽음의 목전에서 생명의 뜨거움에 활활 타오르는 베로니카의 존재는 인간의 동토인 '빌레트'에 생명의 봄바람을 불러일으킨다. 부조리한 생으로부터 스스로 은퇴하고자 했던 마리아는 "모험에서 마주치는 위험이 천 일 동안의 안녕과 안락만큼의 가치가 있다는 걸" 알았다는 메시지를 남기고 빌레트를 떠났고, 에뒤아르는 잃어버렸던 꿈을 회복하고 자기 유폐의 성에서 뛰쳐나가려 한다. 골치 아픈 세상의 모든 문제를 향해, 혹은 진부하기 이를 데 없는 삶을 향해 위험을 무릅쓰고 돌진하려는 것이다. 생명, 생명이 탄생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생명의 주인인 신은 어디에 계신 것인가?

신이란 무엇인가? 세상이 구원받아야 한다면, 구원이란 무엇인가? 아무것도 아니었다. 여기 있는―그리고 바깥에 있는―모든 사람들이 고유의 삶을 살아가며 다른 사람들도 나름의 삶을 살게 내버려둔다면, 신은 매순간 속에, 후추알 하나하나 속에, 땅에 떨어져서는 바로 녹아버리는 눈송이 하나하나 속에 내포되어 있을 것이다. 신은 바로 거기에 있었다. 하지만 삶이 곧 신앙 행위라는 사실은 그냥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단순해 보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계속 신을 찾을 필요가 있다고 믿었다.

신은 생명이 있는 곳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다. 이따금 심장의 발작으로 고통스러워하지만, 죽음의 눈앞에서 살아있음의 의미를 오롯이 드러내는 베로니카의 존재는 신의 전령이 아니겠는가? 정신병에 대한 연구 논문을 완성하기 위해 베로니카에게 죽음이 임박했다고 속인 채 그를 관찰해온 빌레트의 원장 이고르, 그의 논문 마지막 장의 제목은 '죽음에 대한 자각은 우리를 더 치열하게 살도록 자극한다'이다. 죽음의 눈앞에서 삶을 맛본다는 것, 그것은 축복인가 저주인가? 스스로 답할 일이다. 하지만 하루를 살더라도 자유로운 공기를 호흡하기 위해 에뒤아르와 더불어 빌레트를 탈출한 베로니카가 아침에 눈을 떴을 때 한 말은 너무나 새삼스럽다.

"기적이야. 하루를 또 살 수 있어."
목록편집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