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잘 놀아봅시다 2000년 10월 27일
작성자
잘 놀아봅시다
-기독교 문화 포럼 개원 축사

기독교 문화 포럼의 마당 열림을 축하합니다. 제가 굳이 마당이라는 표현을 쓴 까닭은 마당은 인간사의 모든 일들이 벌어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마당은 어린 시절 사방치기, 땅따먹기, 자치기를 하던 놀이의 공간이고, 타작마당이 되기도 하고, 관혼상제가 치뤄지는 의식의 성전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마당가에는 각종 풀꽃들이 조화롭게 피어났다가 지고, 퇴비 썩는 냄새도 적당히 섞여드는 그야말로 삶의 마당이었습니다. 마당은 또 길과 이어져있어 오고감의 출발점이자 도착점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모임은 우리가 잃어버린 혹은 잊고 있는 마당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모임의 발의자인 고진하 형은 가끔 나를 보면 화두처럼 한마디를 던지곤 했습니다. "너 좀 놀아라." 김지하 시인의 표현대로 '일하라고 악쓰는 세상에서' 좀 놀며 살라는 이야기가 얼마나 좋았던지요? 물론 그렇다고 지금 제가 잘 놀고 있다고 말씀드릴 순 없습니다. 그러니 그의 말은 창조력이 없는 빈말이 되었습니다. 하나 되게 하시는 우리 님께서는 '빛이 있으라' 하시면 빛이 생겨났는데, 이차적 창조자인 그의 말은 아무 것도 생산하지 못한 셈이지요. 물론 내게 한정된 일입니다만. 하지만 지금도 "너 좀 놀아라" 하는 이야기가 제 속에 남아있는 것을 보면 그의 말이 속절없이 죽은 말은 아닌 모양입니다. 언젠가 때가 되면 싹이 트겠지요. 어쩌면 지금이 그 시작인지도 모르겠구요.

얼마 전 고진하 형은 '기독교 문화 연구소'를 시작한다면서 거창한 계획을 늘어놓았습니다. 나는 내심 불쾌했어요. 나보고는 놀라더니, 일터를 물러 나온 후 왜 그렇게 조급해하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제 반응은 그저 시큰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진하 형이 이제 철이 좀 든 것 같아요. 대대적으로 할 일이 아님을 이제 좀 알게 된 것일까요? 그래서 모임 이름을 기독교 문화 포럼으로 바꾸고, 일 년에 두세 차례 모여 한판 잘 어울려보는 것으로 목표를 바꾼 것 아닐까요?

기독교 문화 포럼은 단정하게 정돈된 모임이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문화가 인간 살이의 다양한 모습이라면 삶이 복잡하고 모호하듯이 문화도 복잡하고 잡다하고 모호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이 모임은 어떤 예술 이념을 중심으로 모인 것이 아니라, 서로 그리워하던 이들이 모처럼 만나 정담을 나누고,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고, 자기의 창조적 작업을 조금씩 드러내는 나눔의 자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가끔 산에 갑니다. 가소로운 수준이기는 하지만 암벽 등반도 합니다. 그런데 암벽 등반을 하는 데는 몇 가지 꼭 필요한 요소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 요소가 이 포럼에도 어느 정도 적용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첫째, 암벽 등반은 함께 산을 타는 파트너들에 대한 고도의 신뢰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선등자의 생명은 후등자가 확보해주고, 후등자의 생명은 선등자가 확보해주는 것이지요. 파트너를 믿을 수 없다면 암벽타기를 포기해야지요. 산을 오르면서 배우는 것은 사람에 대한 신뢰이고 고마움입니다. 그리고 협력의 아름다움입니다. 저는 이 자리에 모인 우리들이 서로 다른 삶의 정황 속에서 살고 있지만 서로의 삶을 지탱해줄 뿐 아니라 협력하여 세상의 아름다움을 만들어낼 수 있음을 믿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의심하고 무시하고 경쟁하는 일에 익숙합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신뢰하고 인정하고 협력하는 일을 위해 부름받았습니다.

둘째, 암벽 등반은 정확한 등반 순서를 익히는 일이 필요합니다. 자기 멋대로 오르다가는 실족의 위험이 있습니다. 왼 발을 먼저 올려야 할지 오른발을 먼저 올려야 할지 순서를 알아야 합니다. 물론 실패의 경험을 통해 배울 수도 있습니다만 그러기 위해서 치루어야 할 대가가 너무 클 때도 있습니다. 순서를 익히기 위해서는 그 바위를 잘 아는 선생이 필요합니다. 그 바위가 살아있는지 죽었는지, 홀드와 스탠스가 어디에 있는지…. 물론 처음으로 길 없는 곳에서 길을 찾는 이의 시도가 장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것의 가치는 말할 수 없이 큽니다. 하지만 우리는 남들이 가지 않은 곳만 오를 수는 없습니다. 겸허하게 배울 수 있어야 길 찾는 이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이 마음을 열고 각 분야에서 나름대로 앞서 나아간 이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 우리 삶의 지평은 한결 넓어지지 않겠습니까?

셋째, 암벽 등반을 하려면 고도의 균형 감각이 필요합니다. 바위에 매달렸다가 조금만 부주의하면 아주 치명적인 어려움을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균형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고도의 집중력을 필요로 합니다. 한쪽을 밀면서 다른 쪽은 당겨준다든지, 한쪽에 힘을 집중하면서 다른 방향으로 체중을 싣는다든지 균형잡기를 익혀야 안전하게 산을 오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문화는 균형을 잃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지나치게 대중적이거나, 엘리트주의적이거나. 어느 쪽이든 문화적 편식은 위험합니다. 지혜를 나타내는 그리스어 '소프로쉬네' 또는 '소피아'라는 말에는 모두 균형이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지요? 기원전 6세기의 현자 알크마이온은 몸의 균형을 깨고 병을 일으키는 상태를 '파탄'이라 했는데, 파탄을 뜻하는 단어 '모나르키아'는 '한 쪽의 지배'를 뜻한답니다. 이 모임은 문화에 있어서 한 쪽의 지배나 독주를 경계하고, 기우뚱한 중심을 찾아가는 열린 광장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넷째, 암벽 등반을 하려면 때로는 과감성이 필요합니다. 바위에 붙어 있다가 갑자기 겁을 먹거나 주저하는 것보다 위험한 일은 없습니다. 앞으로 나갈 수도 없고, 뒤로 물러설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갈수록 기운은 빠지고, 두려움은 더욱 확고히 그를 사로잡습니다. 의미있는 문화 텍스트를 만들려는 사람들은 다소 불온해 보여도 과감하게 앞으로 나갈 용기를 내야 합니다. 머뭇거리다가 이도저도 아닌 어중간에 머무는 것은 참 착잡한 일입니다. 문화 생산자들이 다 전위적이어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물론 전위(avant-garde)라는 말은 '앞장서서 지킨다'는 뜻입니다. 무엇을 지키는 것인지는 모르겠군요. 하지만 전위가 앞장서 나아가 길을 만드는 것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다면 이 모임은 다소 전위적이어도 괜찮을 듯싶기도 합니다.

잡설이 길어졌습니다. 목사의 불치병입니다. 용서하십시오. 아무쪼록 나는 이 모임이 참 신명난 문화의 난장이 되기를 바랍니다. 못난 놈들은 얼굴만 봐도 흥겹더라고 만나면 그저 즐거워 일상의 낡은 옷들을 훨훨 벗어버리고 알몸으로 만나는 자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한번 잘 놀아보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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