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내 혼의 문신 2000년 08월 29일
작성자
내 혼의 문신

1.
귄터 그라스의 {양철북}에 나오는 소년 오스카가 앙증맞게 두들겨대는 양철북소리가 들려온다. 장엄한 군악대의 연주 사이를 뚫고 딸국질처럼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그러다가 마침내 군악대의 연주를 춤곡으로 바꾸어 버리는, 그래서 나찌의 선동장을 무도장으로 바꾸는, 광기에 사로잡혀 굳어있던 사람들의 표정에 미소를 돌려주고, 서로의 어깨를 부둥켜안고 왈츠를 추게 만들던…성적 쾌락에 탐닉하는 음란한 어머니, 정치적인 광기에 사로잡힌 아버지로 대표되는 성인들의 세계에 절망해 어른이 되는 것을 거부한 오스카, 오, 스카(scar), 오, 스, 카.

2.
신학교 시절 콜린 윌슨의 {아웃사이더}를 만난 것이 탈이었다. 나는 24살 젊은이의 저항적인 혼에 매료되었다. 아웃사이더는 기성의 사회질서에 안주하지 못하는 소외자이지만 그들이야말로 인류의 미래를 여는 열쇠를 가지고 있다는 그의 말은 주술과 같이 나를 사로잡았다. 나는 '아웃사이더교'의 충실한 신자가 되었다. 그 책이 전거로 사용하고 있는 책은 구할 수 있는 한 구해 읽었다. 그리고 즐겨 허무주의자가 되었다. 학교에서 배우는 신학적인 언설은 허무의 대해를 건너기에는 너무나 허약한 조각배였다. 학교에는 빛이 없었다. 나는 의식만큼은 까뮈의 '반항적 인간'이었고, 스스로 신성모독자가 되었다. 아, 얼치기의 세월이여! 최인훈 전집을 읽으면서 한껏 부풀은 나의 자의식은 '요즘 무슨 책을 읽냐?'는 물음에 최인훈 전집이라고 하면 '아, 최인호?' 하고 말하는 사람들에 대해 절망했다. 깊숙한 대화를 하다가도 자신이 기독교 신앙이 박아놓은 금제의 팻말을 부지중에 넘어섰음을 알고 황황히 철수해 경건한 신앙인의 자리로 돌아가는 동료들의 한계에 절망했다. 빛이 없었다. 나는 방황했다. '나는 성년의 숲을 어린아이처럼 방황했다'는 카프카의 말을 빛 삼아.

3.
'신학은 인간학이다.' 얼마나 근사한 말인가? 나는 이 말이 좋았다. 포이에르바하가 서있는 자리가 신학사 좌표평면의 어디쯤인지, 불트만이 이 명제를 어떤 의미로 사용했는지는 몰라도 좋았다. 막연하기는 했지만 이 말이 신학교에 머물고 있는 나의 숨구멍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신에 대한 말들'이 너무 많았다. 교회의 설교는 인간을 지나치게 비하했고 복잡다기한 삶을 교리적 도식으로 단순화시켰다. 스스로를 소외시키지 않고는 설교를 들을 수가 없었다. 신학은 건조했고, 권위주의의 의상 속에 인간의 알몸을 숨겼다. '상황은 물음이고 복음은 답'이라는 신학적 진술을 나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인간의 마당에서 벌어지는 일을 그 마당에서 해결하지 않고 '절대의존의 감정'이라는 신앙에 맡겨버리는 불성실에 화가 났다. 당대의 문제와 치열하게 씨름하지 않으면서 쉽게 영원에서 답을 구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인간의 게으름이었다.
천의 얼굴을 한 현실, 들뢰즈의 말대로 '파시스트적인 속도'로 변화해가는 세상에 신학이 내미는 해답은 언제나 퀴퀴한 냄새가 났다. 무한히 확산수렴하는 현실에 선험적 확실성과 절대적 진리라는 항수(恒數)로 대응하는 신학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었겠는가? 방황의 여지를 주지 않는 신학과 교회, 한 점의 유보도 없이 확신에 찬 신학적 담론, 그것은 신화였고 허구였다. 그런데 '신학은 인간학'이라니! 그 지저분하고 냄새나고 변덕스럽고 추한, 사랑의 갈망으로 몸을 태우고 때로는 미움과 질투의 불길을 지피는 인간들의 냄새를 신학이 허용한다니, 그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그러나 불행히도 나는 저 밑바닥에서 자신의 욕망을 부둥켜안고 울고 웃는 신학을 발견하지 못했다. 아마도 눈이 어두웠던 탓일 것이다. 건조해 보이는 신학적인 담론 속에 담겨있는 절제의 미학을 모르냐고 꾸지람을 당한다해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어두웠다. 신학은 나의 욕망을 줄여주지도 못했고, 정직하게 내 모습을 비추어주는 거울이 되지도 못했다.

4.
목이 말랐다. 영혼의 허깃증을 엎드림으로 채우기에 나는 너무 젊었다. 팽팽히 당기고 있던 저항의 줄을 놓을 수 없었다. 신학과 인간학의 행복한 결합은 꿈이었던가? 신학은 인간학이지만 인간학이 아니다. 인간학은 신학이지만 신학이 아니다. 이 비동일성의 고통을 나는 견딜 수 없었다. 고향 이타카를 향해 고된 항해를 계속하는 오디세우스처럼 나는 방황했다. 가끔 시원한 샘물을 만났다. 그러나 그것은 신학 텍스트 속에서가 아니었다. '소설'이나 '시' 속에서 였다. 주저하지 않고 방황하고, 대척없이 정직한, 그리고 비명과 한숨소리를 숨기려하지 않는 그 허구의 세계에서 나는 막혔던 숨을 토해내곤 했다. 신학이라는 거대 담론 속에서 질식할 것 같았던 나의 혼은 평범하고 사소한 것/순간들을 잊을 수 없는 것/순간으로 바꾸는 문학의 연금술적 마술에 매료됐다. 물음에 해답을 제시하려 하지 않고, 새로운 물음을 통해 길을 여는 문학, 이것은 내가 생각하는 신학적 인간학의 대안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대안동경이 있단다. 자기가 서있는 곳보다는 건너편을 이상화하는 마음 말이다. 문학은 내가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저 건너편에 있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바라보고, 감탄하고, 그 세계가 열어젖힌 창문을 통해 신학 속에 유폐되어 살아가는 수인들을 조롱하는 것으로 족했다. 얼마나 유치했던가. 시인들의 언어를 모방하고, 소설가들의 현실 인식을 적당히 훔치면서 나는 자족했다. 스스로 비창조적인 아웃사이더가 되어가는 것은 모르고, 신학의 권위주의에 반잘하고 신학의 변방으로 스스로를 유폐시켰던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문학세계의 변방에 편입되기를 꿈꿨다. 그곳에는 내 마른 목을 축여줄 감로주가 있는 것처럼.

5.
문학은 인간존재의 기본 범주인 시간의 예술이다. 시간, 소름끼치는 시간. "지옥에서 가장 인적이 드문, 그렇지만 가장 가혹한 동네가 있다면 그곳은 단 한 순간도 '시간'을 잊을 수 없는 곳이다." 에밀 시오랑의 아포리즘이다. 문학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가는 행위이거나, 사람들의 시간 경험에 대한 기록이다. 시간과 함께 사멸해 가는 것들을 기록하고 표현하는 것, 그것이 문학행위이다. 튼실한 언어의 밧줄로 한 순간을 사로잡아 그 순간 속에서 영원의 흔적을 보려는 것. 왜? 모든 스러져가는 것들을 사랑하기에. 망각의 강물을 마시기 전, 키케로의 마술에 걸려 돼지로 변하기 전에, 아니 변한 후에도 자신이 인간이었음을 잊지 않으려는 사람들처럼, 사람들은 무늬와도 같은 흔적을 남긴다. 여름 장대비에 숨막힌 지렁이가 집밖으로 나와 진흙 위를 온몸으로 기어가 흔적을 남기듯 문학은 시간 위를 기어간 사람들의 흔적이다. 눈물의 흔적이다.
한 시인에게 물었다. "왜 시를 쓰시오?" 그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게 제일 편하니까. 하지만 나는 시를 쓸 줄 몰라. 그냥 잘 살고싶을 뿐이야." 그말이 눈물임을 나는 안다. 소설가 친구가 말했다. "절망스럽지만 나는 계속 쓸거야. 나는 소설로 내 인생에 복무하고 있으니까." 한 문학 평론가는 나를 붙잡고 울었다. "말이 자꾸 나를 배신한다"면서. 나는 한숨짓는다. 오련히 그 자태를 드러냈던 문학의 봉토가 이러저리 옮겨다닌다는 사막의 호수처럼 떠돌고 있음을 확인하기에. 그러나 그들이 눈물로 그린 그 흔적들은 일회적인 것이기에 아름답고, 아름답기에 영원의 그릇에 담길 것이다. 이 지점에서 문학은 종교와 만난다.
시간의 예술인 문학은 위로 날아오르든, 아래로 낮은 포복을 하든 불멸을 지향한다. 그러기에 진실/진지한 문학은 이미 종교적이다. 꼭 기독교적인 소재를 다루어야 기독교문학(사실 나는 이런 냄새나는 표현조차 버리고싶다)인가? 아니다. 신/교회/목사/집사가 등장하지 않아도 작가의 문제의식이 기독교적 가치관을 관통하고 있다면 그것은 기독교문학이라 할 수 있다. 역으로 그런 소재들을 다루고 있으면서도 기독교적 가치들을 구체적 상황의 법정에 세우지 않고 선험적인 삶의 법칙으로 제시하는 문학은 참된 기독교문학이라 할 수 없다. 전복적(顚覆的) 상상력이 문학의 생명이다. 하늘과 땅을 뒤집고, 선과 악을 뒤집고, 미와 추를 뒤집고,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를 허문다. 문학은 그런 의미에서 신성모독자들의 세계여야 한다, 고 나는 생각한다. 기존의 가치관에 순치된 문학, 한 시대의 이데올로기의 대변자 노릇을 하는 문학을 나는 경멸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는 이 땅에서 참된 기독교문학을 발견하지 못했다(이것은 철저하게 나의 주관적 평가이고, 나의 단견의 소치일 수도 있다. 아니, 그러기를 바란다). 작가들은 가위눌려 있다. 스스로 금제의 팻말을 내다걸고, 절대로 넘어선 안 될 금줄을 임의로 설정해 놓고는 그 한계를 지키려 한다. 에덴을 둘러친 화염검을 향해 돌진하는 작가가 없다. 물론 시늉은 있다. 그러나 화염검에 불타버리든, 찔리든 개의치 않고 내달리는 작가가 없다. 예술로 형상화되지 못한 천박한 수준의 담론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흘낏 기웃거린 것에 지나지 않는만 나는 이땅에 기독교문학이라 할 수 있는 작품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아프게 생각한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기를 꿈꾼다. 금제의 팻말을 몰래 치워버리거나, 가볍게 금줄을 넘어서서 이땅의 작가들에게 놀 자리를 마련해 주는 것, 그리고 공기 구멍을 뚫어 척박한 땅에 산소를 공급하고, 박토를 삼켜 자신의 체액으로 기름지게 만든 후 분변토로 배출하는 지렁이처럼 기독교라는 척박한 땅에 문학의 성취를 소개하는 것, 써놓고보니 외람되다. 가관이다. 하지만 꿈도 못 꾸랴. 남들은 不惑이라 하는 나이에 나는 여전히 迷惑의 들판에 서있다.
6.
횡설수설을 마치려고 한다. 나는 여전히 방황하고 있다. 문학과 신학이, 신성모독을 꿈꾸는 문학과, 인간학이라는 신학이 내 혼 에 지울 수 없는 '문신'이 되기를 꿈꾼다. 이 꿈이 나를 속일지라도. 속는 것도 나의 생이므로. 오스카의 북소리를 들으려고 나는 귀를 모은다. 이웃 공장의 마이크 소리, 야채를 싣고 온 장사꾼들의 핸드마이크 소리, 자동차 경적 소리, 그리고 나의 신음소리. 나는 아프다. 오스카의 북소리는 들려오지 않고, 네가 하늘의 북을 울리라는 소리를 듣는다. 그 소리를 끈다. 그러나 잠시 후 또 다른 소리가 들려온다….

(이 글은 몇 해 전에 쓴 글인데 감리교 신학대학교에서 "종교와 문학"이라는 과목을 가르치게 된 것을 계기로, 나의 정신의 궤적을 돌아본다는 의미에서 수정없이 그대로 여기에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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