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품이 사라진 세상에서의 희망찾기 2000년 05월 22일
작성자
품이 사라진 세상에서의 희망찾기

이윤기, 『나무가 기도하는 집』(1999), 세계사
김영래, 『숲의 왕』(2000), 문학동네

1.
끙끙 앓는 하느님
누구보다도 당신이 불쌍합니다
우리가 암덩어리가 아니어야
당신 몸이 거뜬할 텐데

피둥피둥 회충떼처럼 불어나며
이리저리 힘차게 회오리치는
온몸이 혓바닥뿐인 벌건 욕망들
(최승호, 「몸」전문)

시인의 예민한 감성은 끙끙 앓는 하느님의 고통을 느낀다. 시인에게 있어서 하느님은 불쌍한 존재이다. 이게 웬 독신의 언사냐고 할지 몰라도 한 시대를 꿰뚫어보는 시인의 시선은 병든 신의 몸을 보는 것이다. 시인에게 있어서 세상은 신의 몸이다. 따라서 사람들이 '발전'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행하는 모든 일들은 신과 무관할 수 없다. 세상과 연루됨, 이것이 신의 본질이다. 시인은 인간의 벌건 욕망 위에 세워진 현대 문명의 어둠 속에서 신의 신음소리를 듣는다. 어쩌면 신이 사라진, 혹은 죽어버린 세상을 예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안으로 굳게 걸린 문 밖에 서성이며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는 신의 초라한 모습이 시인의 심상에 계시처럼 새겨진 것일까?
오늘 우리가 누리는 문명의 꽃은 화려하다. 하지만 꽃이 지고 난 후에 우리가 거두게 될 열매는 무엇일까? 아지랑이처럼 피어났다가 실체도 없이 사라지는 허상에 집착하면서 우리는 그것을 발전이라고, 행복이라고 말했던 것은 아닌가? 백두대간의 중추가 불에 타 재가 되는 것을 무력하게 지켜보면서 나는 신의 신음소리를 듣는다. 구제역을 앓다가 생매장을 당한 생축들의 원통한 울음 속에서 나는 신의 눈물을 본다. 자연이라는 마술동산에서 해방되었다고, 그것이 인류의 진보라고 말한 사람이 누구던가? 조화롭고도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자연의 리듬을 깨고 자연의 상호작용 과정을 인위적으로 차단한 오늘, 우리는 중병에 걸려 있다. 육신의 질병, 영혼의 질병, 문명의 질병, 자연의 질병 말이다. 이 질병 혹은 질환을 치유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이윤기의『나무가 기도하는 집』과 김영래의『숲의 왕』은 이런 물음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보여준다. 인간문제, 문명문제에 대한 인문학적 담론은 넘치지만 그것을 형상화해 소설로 만든 이들이 많지 않음을 생각할 때 두 사람의 작업은 그들이 거둔 문학적 성과에 관계없이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비롯해 동서양의 신화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작가 이윤기는 신화의 숲을 거닐다가 마침내 생의 본원인 자연에 다가선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자연이야말로 상처 입은 인간을 감싸안고 치유해주는 '품'이라고 보고 있다. 환경문제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고, 그러한 실천의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김영래도 우리가 추구해야 할 대안적 삶의 가능성을 신화와 종교학적 성찰에 근거해 묻고 있다. 하지만 이들 두 작가는 비슷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지만,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과 태도는 상이하다. 이윤기의 화법은 가볍고 경쾌하다. 그래서 맑고 투명하다. 일부러 가려 둔 부분이 없다.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하지만 김영래의 화법은 묵직하다. 그는 숨기면서 말하고, 일부러 모호하게 말하기도 한다. 그의 소설은 산책하듯 가볍게 읽을 수 없다. 『나무가 기도하는 집』이 수채화라면 김영래의『숲의 왕』은 유화라 할 수 있다.

2.
때로는 착각이 운명을 만들 때가 있다. 실성기가 있는 자야 아가씨의 경우가 그렇다.『나무가 기도하는 집』은 어두운 기억과 상처를 안고 있는 자야 아가씨가 우야 아저씨의 집을 기도원으로 오인하여 찾아든 데서부터 시작된다. 그 착종의 계기는 활짝 핀 귀룽나무 꽃이다. "귀룽나무 꽃이 하도 좋아서…". 이것이 우야 아저씨 집에 들어온 자야 아가씨의 발명이다. 40대의 노총각인 우야 아저씨 이민우는 나무를 사랑하고, 나무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이다. 그가 도로공사 현장에서 뿌리뽑혀 말라 죽어가는 나무를 가져다가 자기 밭에 심는 것은 수익을 위해서가 아니다. 나무의 생명도 사람의 생명 못지 않게 소중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가 후천적으로 획득한 이념이나 사상이 아니라 그의 자연이다. 그는 인위의 군더더기를 말끔히 벗은 자연인이다. 그의 시간은 달력의 시간이 아니다. 그에게 시간은 귀룽나무에 꽃필 때, 산벚나무에 물오를 때, 산목련 꽃필 때, 활엽수가 연둣빛 푸르름을 머금을 때, 늦감자 씨 넣을 때…처럼 자연의 리듬을 따라 흘러간다.
우야 아저씨가 자야 아가씨를 내치지 못하고 자기 집에 머물게 한 것도 그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뿌리뽑힌 나무조차 그저 무심히 지나치지 못하는 사람이 "정신이 온전치 못한 듯한 여자를 밖으로 내몰" 수는 없었던 것이다. 마을 사람들의 염려 섞인 시선도 그의 마음을 바꿀 수는 없다.

「어르신, 새 한 마리가 기도원 올라가다가 나뭇가지에 앉았습니다. 그 나무가 바로 귀룽집 이민우입니다. 걱정해주시는 것은 고맙습니다만, 나무 된 처지에 무슨 수로 새를 골라서 앉히겠습니까? 더구나 나무밖에 모르는 제가……」(61-2)

자야 아가씨는 상처를 입고 지쳐 날아온 한 마리의 새인 동시에 우야 아저씨의 '나무 고아원'에 찾아든 뿌리뽑힌 나무인 것이다. 우야 아저씨는 굳이 자야 아가씨의 삶에 인위적으로 간섭하려 하지 않는다. 상처받은 영혼에게 필요한 것은 삶의 중심을 회복하기까지의 평화이지 이웃의 열정적인 충고가 아니라는 것을 나무를 통해 배웠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야는 자야가 어머니인 자연의 품에 안겨 스스로를 치유하기를 기다린다. 생명의 자정능력을 믿기 때문이다.
형부로부터 받은 성적 학대의 기억에서 자유롭지 못한 자야 아가씨의 의식은 파편화되어 있다. 주어와 서술어로 된 문장을 이루지 못하고 토막말만 하는 자야 아가씨의 어법은 자야가 입은 내상의 외적 증거이다. 자야의 말에는 주어가 없다. '나'라는 정체성에 상처를 입은 것이다. "기도원 오느라고 버스를 타고…", "…그런데 귀룽나무 꽃이 하도 좋아서…", "…버스에서…", "…내렸더니 마침…". 이런 식이다. 자기 감정을 개입시키기 싫은 추상명사의 음절을 뒤집어서 발음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시간과 공간을 함께 공유하면서 둘 사이에는 교감의 통로가 열린다. 서로 자기의 속내를 드러내기 시작하는 것이다. 우야라는 자연 속에 머물면서 자야 아가씨가 잃어버렸던 자연이 회복되기 시작한 것이다. 둘 사이의 은밀한 사랑이 싹터 갈 무렵 우야 아저씨는 스스로 '나무가 기도하는 데'라고 부르는 숲을 통해 어머니의 무덤가로 간다.

"숲은 우야에게 더 이상 어둠의 덩어리가 아니었다. 자신을 이 세상에 있게 했고, 있게 하고 있는, 그러나 그로서는 이름을 붙일 수 없는 어떤 존재의 품속이었다."(118)

어머니의 무덤가에서 우야는 "생각이라는 이름의 저급한 뚜쟁이가 사라진 자리에서 자연과의 원초적 교감이 복원된 듯하다는 느낌을" 맛본다. 그때 자야가 우야를 찾아 무덤가로 온다. 어둠의 자궁에서, 숲의 품안에서 둘은 오랜 내상으로만 간직했던 자기의 상처와 그리움을 내보이고 서로의 상처를 보듬는다. 어둔 밤, 어머니의 무덤가에서 이루어진 그들의 사랑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이미 숲이 되어버린 어머니의 무덤가, 바로 그 존재의 품속에서 그들은 새로운 존재로 탄생한 것이다.
이 작품은 우야 아저씨와 자야 아가씨의 침묵과 기다림 사이사이에 독자들에게 서비스처럼 제공되고 있는 나무 이야기, 꽃 이야기, 그리고 신화로 말미암아 더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작가가 독자들에게 직접적으로 들려주는 그 이야기들이 군더더기로 여겨지지 않는 것은 작가의 탁월한 이야기 솜씨 때문이다. 생의 근본을 탐구하느라 신화연구에 심혈을 기울이는 작가가 소박하나마 나무를 통한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은, 신화가 드러내 보이는 궁극이 결국은 자연과 통하는 것임을 암시하는 것일까?


3.
김영래의 세계 인식은 그다지 낙관적이지 않다. 작중인물인 정지운의 말을 작가의 말로 듣는다해도 무방할 것이다.

"우리들의 세계는 너무 늙었습니다. 지나치게 원숙한 나머지 노쇠해버리고 말았지요."(24)
"용서받을 수 없는 신성모독에 사로잡힌 채 치닫고 있는 이 불경스런 문명에서 붕괴는 대대적이고 파상적이며 무제한한 것입니다. 아무도, 어떤 사물도 그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34-35)

늙어버린 세계는 무기력한 세계이며, 자기 갱신의 의욕이 없는 세계이다. 이 세계는 동시에 신성모독에 사로잡힌 세계이다. 삶의 이면에 있는 접혀진 질서에 대해 무지한 세계이다. '숲과 사람들' 모임에서 신학대학 교수가 한 말은 현대세계에 대한 비극적 인식을 보여준다.

"지상에서 신성함은 사라지고, 자연은 늙고 병들고 쇠약해지고, 생명은 위기에 처하고, 영성(靈性)은 심연의 끄트머리에서 방황하고, 인간은 포만과 외눈박이 휴머니즘으로 자멸의 구렁텅이를 파고 있다는 것, 이것이 바로 제 강연의 요점이지요."(131-132)

작가는 문명의 파열음을 듣는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거의가 신성함이 사라진 현실 세계로부터 한 걸음 물러나 대안적 삶의 길을 찾는 이들이다. 내셔셜 트러스트 운동을 하는 정지운, 환경운동단체인 '늘푸른 사람들'의 사무국장 박성우, 개발주의자의 수족으로 살았던 과거를 속죄하는 마음으로 식물의 신비를 그리고 있는 애니메이션 제작자 성준하, "노래를 부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선율로 세상이 나를 유혹하는 날"을 기다리는 가인(歌人) 오르페, 비록 백치이기는하나 대지의 진실을 배운 자로서 살아가는 산지기의 아들 성치(聖癡)…이들은 모두 "아름다움 안에서 세상은 완성"된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숲속에 있는 "에피쿠로스의 정원"은 그런 믿음의 싹을 키워내기 위한 묘판이다.
그런데 '아름다움'은 꿈꾼다고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모든 자유는 피 냄새가 난다고 했던 어느 시인의 말은 '아름다움'에도 적용될 수 있다. '정원' 사람들이 그곳에 대규모 리조트를 세우려는 개발업자들의 끈질긴 시도에 대항해 싸우다가 좌절했을 때 그들이 취한 길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자기 희생의 길이다. 이것은 정지운의 길이다. 그는 "절망을 먼저 보는 사람만이 희망을 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는 먼저 절망을 본 자로서 세계의 갱신과 인간의 부활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한다. 물론 소설에서 정지운의 죽음이 타살인지, 자살인지는 가려지지 않지만, 그의 죽음은 속죄양의 죽음이다. 숲의 평화와 갱신은 누구나 원하는 바이지만 그 일을 위해 자기를 제물로 바치려는 이들은 많지 않다. 오직 강자만이, 승리자만이 희생제물이 될 수 있으며 그 희생제물은 사제인 동시에 왕이다.
또 하나의 길은 투쟁의 길이다. 이 길은 늑대 청년과 성우가 택하는 길이다. 늑대 청년은 '스칼프, 개발지상주의자들의 머릿가죽을 벗기는 것'만이 투쟁에서 승리하는 길이라고 믿는다. 그들의 투쟁은 결국 리조트 사장의 죽음과 개발 계획의 백지화로 이어지지만, 과연 그것을 승리라고 말할 수 있을까? 사장의 죽음은 속죄의 죽음도, 재생으로 이어지는 죽음도 아니다. 그는 숲을 지키려는 이들의 폭력에 희생당한 또 다른 피해자일 뿐이다. 자기들을 지키기 위해 다른 이들을 희생제물로 삼으려는 순간 '숲의 왕'은 사라지는 것이며, 숲도 사라지는 것이다. 폭력의 피가 대지에 뿌려지는 순간 "에피쿠로스의 정원"은 이미 없다. 그곳은 이미 의심과 불신의 암종이 자라고 있는 메마른 땅이었을 뿐이다.
광대버섯에 취한 성치는 불 속에 자신을 던졌다가 밝음으로 다시 태어나는 인디언 신화의 나나후아친처럼 불의 제전을 벌인다. 승리를 자축하는 그 시간 숲은 불타고 사람들은 흩어진다. 사실 소설은 여기서 끝나야 한다. 하지만 작가는 준하가 남겨놓은 미완성 시나리오 "태양의 집으로 가는 길"을 통해 독자들에게 자기의 음성을 들려주고 싶어한다. 작가는 우리에게 구원의 길이 있다면 그것은 "싸움이 만물의 어머니"라는 데몬의 가르침에 따라 공격적인 감정과 행동을 내면화해왔던 옛 길을 벗어나, 모든 것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본원의 세계로 귀향하는 데 있다고 말한다. 그 세계는 '새로이 만나게 되는 모든 것에 노래로 인사' 하는 세계이며, '신이 모든 사물 속에 살아 계시며, 여행하면서 만나게 되는 모든 것이 우리를 돕는'(246-247) 세계이다.
과연 숲의 왕은 누구인가? 정지운인가? 그는 될 뻔한 숲의 왕일 뿐이다. 늑대 청년인가? 그의 투쟁은 세상을 이 지경으로 만든 이들이 사용하는 무기를 그대를 사용한다는 측면에서 속죄양, 곧 숲의 왕일 수 없다. 속죄양은 강자여야 하며, 강자의 무기는 세상이 보여줄 수 없는 희생과 자기 헌신이지 남에 대한 미움이 아니기 때문이다. 작가가 숲의 왕으로 내세우는 것은 조상적부터 산을 지켜온 산지기 임노인이다. 자기들의 꿈이 좌절되었을 때 모두가 숲을 떠났지만 그는 불타버린 숲을 떠나지 않는다. 그곳은 그의 삶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목매달아 죽은 성치를 나무묘지에 묻고 숲으로 발을 옮기다가 그가 본 도토리 한 알, 잿더미 속에서 연둣빛 뾰조록한 싹을 밀어올리고 있는 도토리의 강인한 생명력에서 작가는 희망을 본다. 그리고 정원을 다시 일구기 위한 임노인의 외롭고 고된 노동을 역사의 봄소식으로 제시한다. 임노인이 꿈에서 받았던 소명, 즉 풀의 세상, 물의 세상을 지키고 보살피라는 명령을 새삼스레 반추하면서 하는 혼잣소리, "나, 나는 숲의 왕이다"는 사실 작가의 음성이다.
『숲의 왕』을 읽는 일은 쉽지 않다. 소설에 사용된 추리 소설적인 기법 때문이라기보다는 작가 스스로가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절제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곳곳에 등장하는 다양한 신화, 종교학적인 지식, 생태계의 위기를 보여주는 다양한 정보 등은 작가의 인문학적 소양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그런 정보의 나열이 오히려 소설적인 감동을 가로막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할 것 같다. 소설의 등장인물들이 다양한 개성과 경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어법이 한결같은 것도 작가가 소설적인 형상화보다는 전하려는 메시지에 집중했기 때문이 아닐까싶다. 산지기 임노인과 그의 백치 아들 성치의 말과 독백에서 엘리트주의의 냄새가 나서야 되겠는가?
4.
병든 세상, 늙어버린 세상에 구원과 갱신의 길은 있는가? 누가 '숲의 왕', '물의 왕'이 될 것인가? 이제 이 물음에 대답해야 할 사람은 바로 우리들 자신이다. 거대 이념이 퇴조하고, 영성에 대한 담론이 시대적 유행이 된 이 시대에 기다림과 돌봄의 영성을 보여주는 우야 아저씨를 만난 것은 우리의 행운이다. 그리고 모두가 떠난 텅 빈 숲, 아니 잿더미로 변해버린 숲에서 뾰조록이 돋아난 도토리 싹을 볼 눈을 가진 사람은 역사의 봄을 가져오는 '봄'의 사람이다. 그러나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희망을 파종하기 위해 척박한 땅에 구슬땀을 흘리는 이들이야말로 이 시대의 왕적 존재들이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12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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