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오월의 산에서 드리는 편지 2000년 04월 12일
작성자


모처럼 도봉산을 찾았습니다. 번다한 일상을 괄호 속에 묶는 심정이었습니다. 계곡에서 능선으로 이어지는 등산로를 걸으며 행여라도 퀭한 눈을 한 낯익은 이들을 만날까 저어하기도 했지만, 다행히(?) 낯익은 얼굴은 하나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가파른 능선길을 휘돌아 작은 봉우리에 오를 때마다 바람은 얼마나 시원했던지요. 그뿐입니까? 5월의 신록은 어쩌면 그리도 싱싱한지요. 시인 천상병님은 하나님이 제일 좋아하시는 색은 청녹색인 것 같다고 했습니다만, 아닌게 아니라 5월 산은 온통 초록의 바다였습니다. 간간히 들려오는 멧새들의 푸른 울음은 초록의 싱그러움에 흰 빛을 더해주고요.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창8:22) 하셨던 님의 약속이 새삼 떠올라 가슴 한 켠이 무지근해지더군요.
매일 수 만 명의 어린이들이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하루에도 수 십 종의 무고한 생물 종들이 멸종의 위기를 맞고 있고, 지구상에는 이 혹성을 여러 번 파괴하고도 남을 핵무기가 비축되어 있다지요. 그런데도 해가 떠오르는 광경은 장엄하고, 엄마 품에 안겨 있는 아기의 미소는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잿빛 도시에 피어나는 함박꽃 한 송이는 차라리 기적이라 할 만합니다. 인생이란 이처럼 처연하면서도 경이로운 것인가 봅니다. 좌절과 희망, 슬픔과 기쁨이 갈마드는 인생길, 누구라 고단하지 않겠습니까? 문득 산중거사 김달진님의 문장이 떠올랐습니다. "인생이란 큰비가 쏟아지는 광야를 걸어가는 나그네와 같은 것이다. 달려보아도 헐떡거려보아도 비에 젖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다. 먼저 젖기를 각오하시오. 그리하여 비를 맞으며 유유히 걸어가시오. 젖기는 일반이나 고뇌는 적을 것이다." 대체 얼마를 살아야 기쁨도 슬픔도, 희망도 좌절도 나의 생으로 받아들이면서 유유히 걸을 수 있을까요?
생각에 잠겨 걸어가는 제 팔을 잡아채며 아내가 한 군데를 가리켰습니다. 수직의 암벽에 몇 사람이 매달려 있더군요. 아무리 보아도 길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마치 익숙한 길을 가듯 쉽게 바위를 기어오르는 것이었습니다. 변변한 홀드조차 없는 직벽, 조그마한 크랙에 손가락을 끼우고, 없다시피한 스탠스를 딛고 몸을 위로 밀어올리는 그들의 안간힘은 위태로워 보였지만 아름다웠습니다. 자신의 전 존재를 오로지 하나에 집중하는 무아(無我)의 시간, 온 몸으로 전율이 흘렀습니다. 그 가파른 절벽과 하나되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훈련과 집중력과 인내가 필요했을까요. 길 없는 곳에 길을 내는 것이 희망이라지요? 절벽을 길이라 치고 나가는 것이 믿음이라지요? 폭력과 증오의 가파른 절벽을 맨몸으로 기어오른 한 사나이가 떠오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명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생래적인 사랑 때문에 걸으실 수밖에 없었던 십자가의 길이 내 눈 앞에 보였습니다.
"爲學日益 爲道日損". 외람되지만 제 사무실에 붙여놓은 노자의 글귀입니다. 맥락과 관계없이 "배움을 위해서는 날마다 더해가고, 진리를 위해서는 날마다 덜어가라"는 이 말씀을 나의 일상의 지침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런 글귀는 가슴에 새기고 살아야 한다는 것은 잘 압니다. 하지만 어쩝니까. 천성이 게으른 사람인걸요. "爲學日益", 이 글귀는 게으름과 안일과 나태에 빠지려는 저를 불꽃같은 눈으로 지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한 날마다 공부를 거르지 않으려고 애를 씁니다. 하지만 문제는 "爲道日損"입니다. 제 삶에서 날마다 비본래적인 것들을 덜어내야 하는 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저는 쟈코메티의 조각을 좋아합니다. 사물을 본래성이 드러날 때까지 깎아내고 또 깎아내는 그의 고행을 저는 경외의 심정으로 바라보곤 합니다. 하지만 저의 일상은 하나에 또 다른 하나를 더해가는 삶인 것 같습니다. 더하면 더할수록 영혼의 남루는 심해가건만 버린다는 것은 제 능력 밖의 일인 것 같아 참담한 심정이 되곤 합니다. 하나를 얻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가르쳐 주신 님 곁을 뒷걸음질로 슬그머니 떠나간 어느 젊은이의 초상에 제 모습이 겹쳐지는 걸 어쩌겠습니까. 사람들에게 생활 속에서 진리를 택하며 살라고 수없이 외쳤습니다만, 오늘이라도 예기치 않았던 행운이 찾아온다면 진리고 뭐고 다 팽개쳐 버리지 않을까 스스로 염려하기도 합니다.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얼굴에 그늘이 드리운 이웃들을 만날 때마다 백면 서생같은 저는 언어의 빈곤을 느낍니다. '힘드시지요?', '괜찮으세요?', '별 일 없으신가요?', '힘겹지만 견뎌야지 어쩌겠어요.' 이런 말이 무슨 위로가 되고 힘이 되겠습니까만 그래도 좋게 받아들여주시니 고마울 따름입니다. 일전에 입원하신 김장로님을 찾아가서 그랬어요. "장로님, 모처럼 앓는 건데 밑지지 마세요." 함석헌 선생님이 하신 말씀을 슬쩍 써먹은 것인데요, 오늘 어려움을 겪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도 들려주고 싶은 말입니다. 기왕 어려움을 만났으니 그 어려움 속에 숨겨져 있는 선물을 찾아내야 하지 않겠어요? 얍복강 나루에서 천사를 만나 밤새도록 씨름을 한 야곱이 환도뼈가 부러져 절룩거리면서도, 자기에게 축복해 주지 않으면 보내지 않겠다고 떼를 썼던 것(창32:26) 기억나시지요? 믿음의 반대말은 운명론이라더군요. '할 수 없다'는 말보다 무신론적인 말이 없다는 것이지요. 물론 예수만 잘 믿으면 만사형통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믿음은 '모든 것이 다 잘 될 것이다' 하는 천박한 낙관론이 아니라, 불운과 고통 속에서도 생은 계속될 것이고 님께서는 시련 가운데서도 그것을 이겨낼 힘을 주신다고 믿는 철저한 낙관론이 아니겠습니까? 잔소리가 길어졌습니다. 하지만 산에서 겪은 일을 조금 더 이야기해 볼께요.
우리는 산행 코스를 조금 더 연장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초록의 5월 산의 매혹을 떨쳐버릴 힘이 없었던 것이지요. 늘 다니던 주봉 계곡을 버리고 오봉 능선을 향해 걸었습니다. 작은 봉우리에 올라 서쪽 능선을 바라보니 이름 그대로 봉긋봉긋 솟은 다섯 개의 봉우리가 참 정다와 보였습니다. 한 사람도 만나지 못해 불안하기는 했지만 길은 어디로라도 통한다고 생각하며 험준한 등산로를 겁도 없이 기어 오르고 내렸습니다. 삼봉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 길이 끝났음을 알았습니다. 50여 미터의 자일 없이는 도저히 내려갈 수 없는 지점에서 우리는 물러나야 했습니다. 아쉬웠지만 별 수 있나요. 하지만 하산길이 문제였습니다.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망설이다가 눈에 뜨이는 길을 골라 하산을 시작했습니다. 30분 쯤 걸어내려 갔지만 사람의 흔적은 보이지 않고, 아무리 아래를 내려다 보아도 사람들이 사는 마을은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습니다. 비로소 길을 잘못 들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오던 길을 되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맥이 탁 풀리더군요. 하지만 별 수 있나요. 지쳐있는 아내에게 너스레를 떨며 말했습니다. "단단히 훈련시키시는구먼. 잘못된 길인 줄 알면서도 지금까지 걸어온 거리가 아깝다고 내처 간다면 어찌 되겠어. 돌아서야지. 신앙이란 돌아감의 과정이 아니던가. 절망과 허무에 굴복하지 않고 말없이 바위를 산정으로 굴려 올리는 시지푸스는 부릅뜬 눈으로 운명을 응시하는 인간의 존엄성을 드러내고 있지 않소. 자, 내 아내 시지푸스여. 돌을 굴려 올리세." 아내의 얼굴에는 '저 어쩔 수 없는 직업병' 하는 표정이 역력했습니다. 산을 거슬러 오르는 일은 힘에 겨웠습니다. 하지만 옆에 함께 걷는 이가 있어 견딜 수 있었습니다.
지금 어디쯤 계십니까? 어디에 있든 희망의 공간을 넓히며 살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사람의 성숙은 원점에서 다시 출발할 수 있는 용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본래적인 것이 삶을 구속하려 할 때마다 원점으로 돌아가 다시 길 떠나시는 모습 늘 보기 좋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겪고 있는 경제적, 사회적 어려움은 바쁨(忙) 속에서 잃어버렸던(忘) 하나를 찾으라는 그분의 초대가 아니겠습니까? 틈 나시면 가까운 산에라도 함께 거닐면서 좋은 말씀 들려주시기 바랍니다.
목록편집삭제

anita(20 10-19 08:10)
진정한 거룩한 삶이 무엇인지 밝히 가르쳐주신 목사님의 삶이 늘 동경의 대상이었는데, 글 속의 목사님께서는 우리, 아니 저와 같은 생각도 하신다고 느껴져 감동을 더해 주십니다.
삭제
박승혜(22 07-08 08:07)
지났지만, 다시보고픈내용을찾을때가 있는데 , 이렇게 검색되어지니 좋습니다,
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