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스승과 내가 하나되어 2000년 04월 12일
작성자


"미래는 빛의 속도로 발달하고 있다. 사실 미래는 쉬고 싶어도 쉴 수 없는, 어떤 의미에서는 살기 힘든 세상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했다는 말이다. 빛의 속도로 발달하고 있는 세상에서 나는 과거를 살고 있다. 세상을 따라잡기에 너무 게으른 것이다. 공업고등학교 기계과를 나왔지만 나는 기계를 무서워한다. 그 흔한 자가용도 없고, 휴대전화도 없이 살다보니 후배들은 나를 보고 원시인이라고 놀려댄다. 시인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농담조로 말한다. "나는 a primitive man이 아니라 the ur-poet이야." 후배들은 선배 대접해주느라고 그런지 놀리기를 포기하고 대체로 고개를 끄덕여준다. 기계를 경원시하는 나의 버릇은 심하긴 심하다. 전자 렌지 작동법, VTR 작동법, 디지털 카메라의 조작법도 모른다. 아내가 가전 제품을 들여와도 나는 그것을 들여다볼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궁금해서라도 여기저기 기웃거릴 법도 한데 나는 도무지 나와는 관계없는 기계인 것 같아 무시해버리고 만다. "왜 그렇게 기계하고 친하지 못해요?", 하고 누가 물으면 점잖게 대답한다. "기계를 좋아하면 기심(機心)이 생겨서 마음 속의 항심(恒心)이 손상을 입는다고 그럽디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나의 유구한 기계혐오증은 '그것 없이도 살 수 있는데' 하는 고집 때문이다. 그러니 원시인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은 없다.
그래도 나는 컴맹이 아니라고 자부한다. 미숙하기는 하지만 문서 작성은 아쉬운대로 컴퓨터로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컴퓨터에 문제가 생기면 속수무책이다. 팔짱을 끼고 앉아 도우미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며칠 전이다. 컴퓨터를 켰더니 무슨 파일(뭐냐고 묻지 말라. 그 복잡한 걸 내가 지금까지 기억할 리가 없다)이 손상되어 작동이 불가능하다는 메시지가 나왔다. 여러 사람이 손을 댔지만 컴퓨터는 눈만 껌벅거릴 뿐 도무지 비의의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점심을 먹는데 컴퓨터로 박사학위를 받은 대학교수가 내 앞에 앉았다. 그에게 내 컴퓨터를 좀 봐달라고 부탁했다. 먹던 음식을 마저 먹고 올라가보니 그 밉살스럽던 컴퓨터는 그간 잘있었느냐는 듯이 눈을 반짝이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컴퓨터를 다루는 그의 솜씨는 신기였다. 내게 컴퓨터는 다이달로스가 만든 미궁이지만, 컴퓨터 언어를 이해하고, 움직임의 길을 아는 이에게는 그저 기계였던 것이다. 길을 알고 모르고의 차이가 이런 것이다.
그 일이 있은 후 나는 자연스러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그 소리가 그렇게 나오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파바로티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내 영혼이 어떤 신성의 벌판을 향하고 있음을 경험한다. 지금 전축에서 흘러나오는 안드레아 보첼리의 "Agnus Dei"를 들으면서 나는 영혼의 고양을 느낀다. 그가 노래를 한다기보다는 노래가 그를 이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보첼리는 사라지고 노래만 남은 것이다.
지금 나는 봄기운에 이끌려 산에 오르게 될 날을 고대하고 있다. 분주함을 핑계로 미루고 미루어왔던 산행이 아닌가. 산의 넉넉한 품에 안겨 산 기운을 호흡하는 흥겨움에 취하고 싶다. 영화 "책읽어주는 여자"에 나오는 미우미우의 그 활달한 보법으로 산길을 걷고 싶다. 울퉁불퉁한 산길을 걷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한걸음 한걸음 조심하지 않으면 넘어지기 십상이다. 그러나 조심스럽게만 걸어서는 산의 맛을 즐길 수 없다. 걷다보면 어느 순간 걷는다는 의식조차 없이 걷고 있음을 느낀다. 머리가 계산을 해서 걷는 것이 아니라, 발이 리드미컬하게 너덜겅을 타고 넘는 것이다. 내 몸과 길이 하나의 리듬을 타고 있을 때 나의 발걸음은 상쾌하다.
내가 오늘 세상살이의 힘겨움에 지쳐 비틀거리는 것은 내가 무엇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이다. 리듬을 타지 못하고, 리듬을 거스르려는 버릇 때문이다. 스승께서는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고 하시면서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시는데, 내 삶이 이렇게도 무거운 것은 불초(不肖) 제자인 때문이다. 집채만한 파도에 뛰어들어 날렵하게 보드에 몸을 싣고 파도를 타넘는 서퍼(surfer)처럼 살 수는 없을까?
서툰 가수의 노래가 귀에 거슬리고, 초보 산꾼이 돌부리에 채여 비틀거리고, 초보 서퍼가 물 속에 쳐박히듯, 서툴기 그지없는 내 삶은 지금까지 미궁 속을 헤매고 있다. 서툰 내 삶에 채여 상처입는 이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그들 모두에게 용서를 구하고 싶다. 노래와 노래꾼이 하나이듯, 몸과 길이 하나이듯, 파도와 보드가 하나이듯, 스승과 내가 하나 되어 바람처럼 살 수 있다면…
목록편집삭제

Anita(20 10-19 06:10)
생각하고, 느끼며, 글을쓰고, 목회하며... 불초가 아닌 수제자이심을 진심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