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 목사님 컬럼

제목 어둠을 응시하는 눈빛 2000년 04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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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말 유신체제의 폭압 아래 모두가 숨을 죽이고 있던 때, 내가 다니던 대학에서는 한 편의 연극을 무대에 올렸다. "갇힌 자(The prisoner)". 제목이 상기시키는 도발성 때문에 연극 동아리에 속해 있던 학생들은 물론이고, 학도호국단 임원들, 교수들 모두가 긴장했다. 대학에 상주하고 있던 정보과 형사가 촉각을 곤두세우고 연극을 무산시키려고 동분서주한 것은 어쩌면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연극을 무대에 올리기로 한 그날 아침, 두근거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학교에 갔다. '오늘은 어제와 다른 날이다. 과연 연극을 무대에 올릴 수 있을까? 연극을 준비한 호국단 임원으로서 어쩌면 나도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자못 비장한 표정으로 학교에 도착했지만, 연극반원들은 한 사람도 눈에 띄지 않았다. 잠행인가? 아니면 연행된 것인가? 초조했다. 하지만 우리는 연극반원들의 순발력을 믿었다. '행사 당일 우리가 없어져도 놀라지 말라'고 귀띔했던 연극반장의 말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주저주저 하던 시간이 진주군의 입성처럼 들이닥쳤을 때, 마침내 강당의 문이 열렸다. 학생들은 조용히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무대는 캄캄했다. 저 어둠,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 속에서 대체 무슨 일이 준비되고 있는가? 궁금했으나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별빛조차 비쳐들지 않는 강당에는 적막한 긴장이 흐르고 있었다. 일순 흐릿한 조명이 들어왔는가 싶었는데 우리는 다 '억' 하며 신음을 삼킬 수 밖에 없었다. 무대 한복판에는 나무로 얼키설키 엮어놓은 감옥이 있었고, 감옥 창살마다 마치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처럼 배우들이, 아니 인육들이 걸려 있었다. 모두가 그 광경에 압도당했다. 창살에 매달린 것은 바로 우리들 자신이었기 때문이었다. 간간히 조명은 바뀌었지만 배우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하긴 인육이 어떻게 움직이겠는가? 10분, 20분이 지났다.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암담한 세월을 상기시키는 노랫소리가 계속되면서 고통은 증폭되었다. 우리는 무대를 보고 있었지만 사실은 우리 속에 있는 어둠을 응시하고 있었다. 어둠이 성큼 온 세상을 뒤덮듯 우리는 어둠에 사로잡혀버렸다. 30분이 지나면서 객석에서는 숨죽인 흐느낌 소리가 배어나기 시작했다. 어둠을 폭발의 정점을 향해 치솟고 있었다. 그때 뒷자리에서부터 누군가가 천천히 무대를 향해 걸어나갔다. 무대에 오른 그는 광포하게 감옥의 창살을 그러쥔 두 손으로 내려치기 시작했다. 우리의 온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그의 절규를 듣고 있었다.
"이 지긋지긋한 감옥을 깨뜨리고 나와. 왜들 그러고 있어. 나와, 나오란 말이야. 자유의 세상은 누가 거저 가져다 주지 않아. 바로 네가 깨뜨려야 해."
그는 엉엉 울면서 창살을 때려부쉈다. 부러진 나무에 맞아 몇몇 배우가 실신하고, 피를 흘리기도 했다. 그때 객석에서는 조용히 노래 소리가 울려나기 시작했다. 독창은 곧 합창이 되었고, 합창은 물결이 되어 우리 사이를 흘렀다.
"우리 승리하리라. 우리 승리하리라. 우리 승리하리 그 날에, 아아 참 맘으로 나는 믿네 우리 승리하리라."
무대와 객석에 있던 우리는 모두 한 덩어리가 되어 울었다. 울면서 노래를 불렀다. 그때 우리는 자아의 좁은 감옥에서 해방되어 새처럼 훨훨 날았다. 두려움과 비겁의 창살을 깨뜨리고 자유를 향해 눈부시게 도약하는 '우리'를 만났다. 폭압의 어둠을 깨뜨릴 힘은 어둠을 향한 치열한 응시에서 비롯됨을 절감했다. 아무도 연출하지 않았지만, 우리 모두의 가슴 속에 숨어있던 단 하나의 대사를 우리는 만났다. 자기 속에서 소용돌이를 치고 있던 '말'을 더 이상은 가둬둘 수 없어 해방시켜버린 한 친구를 통해 우리는 하늘의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이 지긋지긋한 감옥을 깨뜨리고 나와. 왜들 그러고 있어. 나와, 나오란 말이야. 자유의 세상은 누가 거저 가져다 주지 않아. 바로 네가 깨뜨려야 해."
그로부터 열흘 후 우리는 한 독재자의 부음에 접했다. 중년의 나이에 20년 전을 회상하는 까닭은 어둠을 응시하는 눈빛이 너무도 흐려져 있음을 절감하기 때문이다. 함께 울고 웃는 우리의 '우리됨'을 확인할 기회없이 살아가는 잿빛 나날에 지쳤기 때문이다. 그때 그 벗들은 어디에 있는가? 온 몸으로 어둠을 향해 돌진해 부싯돌처럼 빛의 알갱이를 만들었던 그 벗들, 그리고 그 방, 그리워라.
"보잘것없는 물건들이 서로 비춰주고 되비춰주며
제 안에서 스스로 발광하는 낮은 빛을
조금씩 끊임없이 나누던 방."
-김기택, [어둠도 자세히 보면 환하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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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ita(20 10-19 06:10)
비슷한 시대를 같이 살고 있는 일인으로 윗글을 이제서야 보며 당시 세상이 회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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